맨드라미 / 하린

작성자강건너그집|작성시간26.06.19|조회수800 목록 댓글 0

맨드라미 / 하린

옥상 위 사람들

현기증 속에서

붉은 지뢰를 왜 하나씩 품고 있나

햇살의 압력은 약하고

비탄의 장력은 질겨서

다년생을 그만 끝내고 싶다는 생각

이미 숨 막히도록 촘촘한데

왜 꽃처럼 폭발하고 싶어서 안달인 걸까

뇌관이 심장 속에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부터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비난할 수 없어서

광장을 참고 또 참는 수밖에 없어서

위선을 신뢰하는 정수리와

밀실을 사랑하는 혓바닥으로

질문을 덧씌우고 또 덧씌우면서

깨알 같은 분노를 옆구리에 쟁여놓으면서

확실한 절망을 품고 살았으면 그뿐인데

모든 지뢰는 왜 착하지 않다고 여기는 걸까

울음이 망각으로 바뀌는 속도를 아직도 믿지 못하는 걸까

극단을 감지하는 능력

뒤꿈치를 누르는 순간 쏟아지는 능력

한번 사용하면 끝장인데

왜,

왜!

왜?

태양에게 자꾸 머리를 들이미는 걸까

라이터를 켜고 도화선을 든 채

​**************************************

타자의 시선 혹은 '언어- 극장'의 일회적 나타남 / 박성현

만일 이 세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폭주기관차라면, 시는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 이 세계가 '붉은 지뢰'를 하나씩 품고

있는 '옥상 위 사람들'처럼 뒤도 돌아볼 수 없는 어두운 파국

그 자체라면 시는 과연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 옥상이다.

햇살의 압력은 느슨하고 밀도는 거의 없다.

이상하리만치 투명하고 정지된 듯하지만 촉발할 듯 엄청난

속도로 부풀어 오르는 고요다. 지상과 단절된 옥상 - 일상적인

시선의 흐름은 끊겼고 통상적 인과 또한 해체된 -에서

시인이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은 絶滅에 가깝다. 왜 이런 사태가

갑작스레 찾아왔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옥상'이라는 비현실적

공간에서 그는 대상을 느끼되, '현상으로 재현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죽음과 동시에 산산조각 난 '너머'들을 감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의 일생을 단 1분 만에 가속하는 극단적

허무와도 같은. 옥상이 재현하는 것은 이미 '옥상'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을 통해 변성된 무대 장치로, 일종의 '마취된

이미지'에 해당한다. 만일 그렇다면, 시인이 기록한 '옥상-

이미지'는 시인의 생래적 허무와 맞물리며 '파국'- 공통감각을

허용하지 않는 관계의 결여이며, 블라인드 처리된 시선에서

촉발되는 말과 기록의 화해 불가해성을 정조준한다.

시인은 이것을 "극단을 감지하는 능력"과 "뒤꿈치를 누르는

순간 쏟아지는 능력"으로 부르고 있으며, 바로 이 부분에서

'맨드라미'와 '붉은 지뢰'는 서로를 정확히 투사한다.

다시, 완벽한 밀실이자 극장으로 변성된, "숨 막히도록 촘촘한"

옥상이다. 여기에 "꽃처럼 폭발하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이

"라이터를 켜고 도화선을 든 채"로, "태양계에 자꾸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이 기괴한 행동은 보이지 않는 끈에 사지를

결박당한 마리오네트처럼 어딘지 모르게 인위적이고 불편하다

(그 둘은 거의 식별 불가능하다). "다년생을 그만 끝내고 싶다"는

죽음을 향한 무의식적인 욕망(타나토스콤플렉스)과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비난할 수 없어서 광장을 참고 또 참는 수밖에

없"었다는 암묵의 자기 부정 혹은 결벽이 촉발한 것은 명백하지만,

시인이 묘파한 바와 같이 '광장'이란 주체를 억업하는 타자의

시선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광장'이란 거대한 '밀실-효과'를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억압-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를 반복시키며 공포를

만들어내고 좀 더 파국에 다가간다. 그러므로 "보는 자는

볼 줄 모른다"라는 랑시에르의 지적과 더불어 "모든 지뢰는

왜 착하지 않다고 여기는 걸까 울음이 망각으로 바뀌는

속도를 아직도 믿지 못하는 걸까"라는 질문은 이 모든 사태의

핵심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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