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리 日記 / 김지하 (1941~2022)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19|조회수821 목록 댓글 0

수유리 日記 / 김지하 (1941~2022)

누구의 목을 조를 명주띠일까

하얗고 긴 손길이 있어 밤이면 밤마다

내 이마를 스치고

나리꽃 만발하여 바람 따라 스적이는 높은

산맥이란 산맥으론 모두 다 핏빛

시냇물이 달리데 뛰어 달리데

달은 낡은 화투짝 위에서만

두둥실 떠올랐다

버얼겋게 취한 달이 비내려가고

목숨이야 한낱 그림자 뿐이어서

흙벽에 어룽이는 호롱불 허리굽은 그림자일 뿐이어서

독한 소주로도 못다 푼 폭폭증

가슴에 불은 이는데

불은 일어쌌는데

솟아라

산맥도 구름 위에 화안히 솟아라

붉은 호롱불도 하얀 애기달도 두둥실

하늘 높이 솟아라

배추 포기 춤추고 노래 불러라 바람 따라

신새벽이 뚜벅뚜벅 걸어서 돌아오는 때까지

어금니에 돌소금 소리내어 깨어지고

보이지 않는 외딴 숲속에 들개는 짖어대고

산맥이란 산맥으론 모두 다 핏빛

시냇물이 달리데 가슴에 불은 이는데

새파랗게 새파랗게 일어쌌는데.

- 김지하 시집 <황토>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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