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어(萬魚) / 정일근
다시 일만 마리 물고기 꼬리 물고
만어산 오른다, 나를 불러낸 만신(萬神)은
대뜸 내 별자리 묻는다
어쩌나, 나는 내 별자리 알지 못한다
내가 태어난 해의 띠를 알고 있을 뿐
그 띠로 어제와 오늘의 운세 보며 살아왔는데
대답 못 한 채 우물쭈물하는데
여기 만어는 모두 산에 오른 물고기라
만신은 자신도 물고기자리라고 말한다
그렇구나, 다 자리가 있구나
태어나는 자리가 있고 죽는 자리가 있다
사랑하는 자리가 있고
이별하는 자리가 있다
산정 아래 미륵전에는 그 물고기 이끈
동해 용왕 아들의 자리 있는데
오래만에 뵙는 미륵은 여전히 고래로 살아 있다
내일의 운세에 내 자리가 주어진다면
만신의 물고기자리 옆에 딱 붙어서
나도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
복지부동하며 너덜 바윗덩이로 살고 싶다
만어에서 만년쯤 만신 곁에
물고기자리로 머물고 싶다
슬쩍 스치는 바람 한줌에
후드득 지나가는 비 몇 방울에
때로는 찾아오는 산수유꽃 꽃향기에
내 몸을 때려 편경(編磬) 소리 내며
시를 읊듯 노래하며 살았으면.
- 정일근 시집 <시 한 편 읽을 시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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