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어(萬魚) / 정일근 ​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20|조회수486 목록 댓글 0

다시, 만어(萬魚) / 정일근

다시 일만 마리 물고기 꼬리 물고

만어산 오른다, 나를 불러낸 만신(萬神)은

대뜸 내 별자리 묻는다

어쩌나, 나는 내 별자리 알지 못한다

내가 태어난 해의 띠를 알고 있을 뿐

그 띠로 어제와 오늘의 운세 보며 살아왔는데

대답 못 한 채 우물쭈물하는데

여기 만어는 모두 산에 오른 물고기라

만신은 자신도 물고기자리라고 말한다

그렇구나, 다 자리가 있구나

태어나는 자리가 있고 죽는 자리가 있다

사랑하는 자리가 있고

이별하는 자리가 있다

산정 아래 미륵전에는 그 물고기 이끈

동해 용왕 아들의 자리 있는데

오래만에 뵙는 미륵은 여전히 고래로 살아 있다

내일의 운세에 내 자리가 주어진다면

만신의 물고기자리 옆에 딱 붙어서

나도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

복지부동하며 너덜 바윗덩이로 살고 싶다

만어에서 만년쯤 만신 곁에

물고기자리로 머물고 싶다

슬쩍 스치는 바람 한줌에

후드득 지나가는 비 몇 방울에

때로는 찾아오는 산수유꽃 꽃향기에

내 몸을 때려 편경(編磬) 소리 내며

시를 읊듯 노래하며 살았으면.

- 정일근 시집 <시 한 편 읽을 시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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