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에 쓴 시 / 손택수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21|조회수348 목록 댓글 0

이력서에 쓴 시 / 손택수

생년월일 사이엔 할머니의 태몽이 없고

첫 손주를 맞은 소식을 고하기 위해

소를 끌고 들판에 나가셨다는 할아버지의 봄날 아침이 없고

광주고속 거북이 등을 타고 와서 여기가 용궁인가

동천 옆 고속터미널에 앉아 있던 소년의 향수병이 없고

길바닥보다 지붕을 좋아해서

못을 징검돌처럼 밟고 슬레이트 지붕을 뛰어다니던

도독괭이 문제아가 없고

가난하고 겁 많은 눈망울을 숨기기 위해

아무데서나 이를 드러내던 청춘이 없고

남포동 통기타 음악실 무아에서 허구한 날

죽치고 앉아 있던 너를 그냥 보내고 시작된

서른 몇 해 동안의 기다림이 없고

신춘문예 응모하러 가던 겨울 아침

그게 무슨 입사지원서나 되는 줄 알고

향을 피우고 계시던 어머니가 없고

참 신기하지 재가 되었는데 무너지지도 않고

창을 비집고 든 바람 앞에서 우뚝하던 향냄새도 없고

늦깎이 근로 장학생으로 대학에서 수위를 보던 그때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힘내라고

밥을 사준 이름도 모르는 그 행정실 직원이 없고

이후로 나를 지켜준 그 밥심이 없고

이력서엔 영영 옮겨올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구겨진 이력서에 나는 시를 쓰고 있네

- 손택수 시집 <어떤 슬픔은 함께 할 수 없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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