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더딘 저녁 / 황동규
이제 컴퓨터 쓰레기통 비우듯
추억 통 비울 때가 되었지만,
추억 어느 길목에서고
나보다 더 아끼는 사람 만나면 퍼뜩 정신 들곤 하던
슈베르트나 고흐, 그들의 젊은 이마를
죽음의 탈 쓴 사자(使者)가 와서 어루만질 때
(저 뻐개진 입 가득 붉은 웃음)
그들은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밀밭이 타오르고
밀밭 한가운데로 달려오는 마차가 타오르고
사람들의 성대(聲帶)가 타오를 때
그들은 왜 신음소리에 몸을 내주거나
가슴에 피스톨 과녁을 그렸을까?
'왜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재빨리 빠져나가고 싶어했는가?
시장 인심이 사납던가,
악보나 캔버스가 너무 비좁던가?
아니면 쓸쓸하고 더딘 지척 빗소리가
먼 땅 끝 비처럼 들리는 저녁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던가?'
- 황동규 시집 <꽃의 고요>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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