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더딘 저녁 / 황동규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21|조회수359 목록 댓글 0

쓸쓸하고 더딘 저녁 / 황동규

이제 컴퓨터 쓰레기통 비우듯

추억 통 비울 때가 되었지만,

추억 어느 길목에서고

나보다 더 아끼는 사람 만나면 퍼뜩 정신 들곤 하던

슈베르트나 고흐, 그들의 젊은 이마를

죽음의 탈 쓴 사자(使者)가 와서 어루만질 때

(저 뻐개진 입 가득 붉은 웃음)

그들은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밀밭이 타오르고

밀밭 한가운데로 달려오는 마차가 타오르고

사람들의 성대(聲帶)가 타오를 때

그들은 왜 신음소리에 몸을 내주거나

가슴에 피스톨 과녁을 그렸을까?

'왜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재빨리 빠져나가고 싶어했는가?

시장 인심이 사납던가,

악보나 캔버스가 너무 비좁던가?

아니면 쓸쓸하고 더딘 지척 빗소리가

먼 땅 끝 비처럼 들리는 저녁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던가?'

- 황동규 시집 <꽃의 고요>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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