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어딘가를 지나가는 나의 잠 / 최금진

작성자섬초롱|작성시간26.06.23|조회수194 목록 댓글 0

구례 어딘가를 지나가는 나의 잠 / 최금진

잠이 산수유꽃 같은 등불을 몸에 켜놓는다

나는 섬진강변 구례 어디쯤

꿀벌들이 오물오물 꿀물을 씹는 봄 햇볕 아래를 지나고 있을까

잠엔 자동항법장치가 있고, 내 육신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이런, 너무 늦었군, 화를 내고 있을까

거리엔 온통 잠들이 바퀴에 사람들을 얹고 배달 다닌다

식기 전에 마시는 잠은 우유를 넣은 홍차처럼

인생을 느슨하고 부드럽게 해준다

어떤 사람의 잠은 다 식어 하얗게 응고된 촛농처럼

그의 머리맡에 떨어져 쌓인다

그는 불 꺼진 삶을 살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 것이다

완벽한 잠을 원하는 사람은 현실도피자가 아니다

초저녁, 달이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가느다란 팔을 창틀에 걸치고 앉아 지구를 바라본다

그 곁에 나란히 기대어 몇 벌의 잠을 더 갈아입어도 좋다

깨지기 쉬움, 취급주의, 흰 장갑을 낀 사람들이

나를 안아 마차에 싣는다

잠은 구례 화엄사 석등 앞에 날 내려놓을 수도 있고

떠내려간 신발을 잃고 울던 유년의 모래톱에 내려놓을 수도 있다

잠은 신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작은 위로

작년에 죽은 친구가

병원 뜰에 벌써 매화가 피었다고 불평을 하며 내 옆에 눕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늑골에 아치형 뼈대를 세워 잠을 보관하고

잠은 출렁이는 한 동이의 항아리에 담긴다

강변 돌멩이에 고인 돌의 무늬와

잠든 아기 손에 새겨진 물결의 무늬는 서로 닮았다

나는 황혼녘 말조개처럼 강물에 떠서 어디를 항해하는가

그리고 때마침 비가 내리는가

양비둘기마냥 젖은 깃털 속에 머리를 묻고 있는가

화엄사 저 아래 더듬이처럼 불을 켜든 사람들의 집이

길을 따라 마을로 흘러가고

뚝뚝 처마 끝에 흘러내리는 잠이

창밖 목련나무 가지에 하얗게 돋아난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초저녁잠에서 깨어

여기가 어딘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황망히 운다

오래된 그릇은 저절로 금이 가고

인간은 거기 담긴 한 국자의 검은 물처럼 쏟아져 대지에 스민다

물줄기기 산 아래로 흘러가 마을의 잠을 이루는 저녁

미농지처럼 얇은 잠 사이로

산수유꽃이 피어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눈을 감고도 환한 구례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가

내 귀에서 어린 은어떼가 조각조각 꿈을 물어뜯고 있는가

누가 내 잠을 석회처럼 하얗게 강물에 풀어내고 있는가

발끝까지 환하다, 화안하다

- 최금진 시집 <황금을 찾아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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