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의 계산법 - 새생 시인의 「칠천 일」 평론

작성자빗새|작성시간26.06.09|조회수1,182 목록 댓글 0

칠천 일 / 새생

 

​기실 밥 한 술, 따스한 이불 한 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히 사랑받고 보살핌받던 어떤 '눈빛'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잔인하여, 타향에는 의탁할 곳 하나 없고 기대어 쉴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조차 없다. 그러니 이방에서 서러움이 차오를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고향의 나무와 어머니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어머니와 참으로 아침저녁을 부대끼며 살았던 날들은, 그 모든 시간을 끌어모아도 채 칠천 일이 되지 않았다. 스물여섯 해 전, 당신께서는 벅찬 기쁨으로 나를 이 세상에 데려오셨고, 스물여섯 해 뒤, 나는 당신 곁을 지키며 붉어진 눈으로 당신을 또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인생의 대사란 오직 나고 죽는 일뿐이니, 이로써 생명 또한 하나의 원형을 맞물려 닫은 셈이다.

 

​올해 유월 초순, 나는 홀로 고향에 돌아와 다시금 고향의 그 늙은 느티나무 아래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 들어 바라보니 나무의 둥치는 예년보다 한층 창연했고, 우산살처럼 뻗어 나간 가지들은 눈 시리게 푸른 하늘을 겹겹이 뒤덮고 있었다. 잎사귀들은 한여름의 빛을 남김없이 빨아들인 듯 짙고 먹먹한 녹음을 띠었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쏴아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늙은 느티나무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았다. 영락없는, 고독한 묘지기의 모습이었다. 아득한 곳을 바라보니 온통 새하얗고 망망할 뿐, 운명은 흡사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거대한 탁류와 같아, 나와 어머니를 영원히 강 양쪽 기슭으로 갈라놓았다. 내가 어머니를 건너다보고, 어머니 또한 저편 기슭에서 나를 깊숙이 건너다본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우리 두 사람은 기어이 모두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의 계산법

새생 시인의 칠천 일평론

 

 

이 시 「칠천 일」은 매우 짧은 분량 안에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의 유한성'과 '상실 이후의 존재론적 고독'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수필적 산문입니다. 문예지에 실릴 수준의 작품으로 읽히며, 특히 후반부의 느티나무와 강의 이미지는 상당한 문학적 밀도를 보여줍니다.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의 계산법

이 글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제목인 「칠천 일」입니다.

보통 우리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수십 년이라는 단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그 시간을 하루하루로 환산합니다.

"어머니와 참으로 아침저녁을 부대끼며 살았던 날들은,

그 모든 시간을 끌어모아도 채 칠천 일이 되지 않았다."

이 문장은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중심축입니다.

26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함께 먹고 자고 웃고 울었던 날들을 세어보면 겨우 칠천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이 계산은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영원히 곁에 있을 존재로 생각하지만 실상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놀랄 만큼 짧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눈빛'이라는 단어의 의미

첫 문단은 매우 뛰어납니다.

"그것은 온전히 사랑받고 보살핌받던 어떤 '눈빛'에 관한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어머니를 떠올릴 때 밥, 집, 품, 손길 같은 구체적 사물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 글은 그것들을 부정합니다.

"기실 밥 한 술, 따스한 이불 한 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오직 "눈빛"입니다.

이는 육체적 보호를 넘어 존재 자체가 인정받고 사랑받는 경험을 의미합니다.

어머니는 밥을 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아 준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래서 이 작품은 모성의 물질적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느티나무의 상징성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느티나무는 매우 전통적인 상징이면서도 효과적으로 기능합니다.

느티나무는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서 마을과 공동체, 고향과 조상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화자가

"늙은 느티나무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았다"

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나무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고향과 기억, 그리고 어머니의 품에 기대는 행위를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영락없는, 고독한 묘지기의 모습이었다."

라는 문장은 탁월합니다.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기억을 지키는 사람.

화자는 어느새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기억의 관리인이 되어 있습니다.

강의 은유와 존재론적 거리

작품의 백미는 마지막 문단입니다.

"운명은 흡사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거대한 탁류와 같아"

여기서 운명은 강이 됩니다.

그리고 강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가 됩니다.

특히 아름다운 것은 다음 구절입니다.

"내가 어머니를 건너다보고,

어머니 또한 저편 기슭에서 나를 깊숙이 건너다본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바라보고,

산 자가 죽은 자를 바라보는 구조입니다.

서로를 바라보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거리.

그 거리가 바로 죽음입니다.

이 대목은 그리스 신화의 스틱스 강을 떠올리게도 하고,

불교의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의 세계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의 울림

작품은 다음 문장으로 끝납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우리 두 사람은 기어이 모두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문장은 매우 깊은 철학적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이방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글은 다르게 말합니다.

어머니도 이방인이 되었고,

나 또한 이방인이 되었다.

죽음은 한 사람만 낯선 세계로 보내는 사건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마저도 원래 살던 세계에서 추방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단순한 애도의 문장이 아니라 상실 이후 인간 존재의 근본적 고독을 말하는 문장이 됩니다.

종합 평가

「칠천 일」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직접 울부짖지 않습니다.

대신 숫자(칠천 일), 사물(느티나무), 공간(강의 양안), 그리고 눈빛이라는 상징을 통해 상실의 본질을 차분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눈빛", "고독한 묘지기", "강 양쪽 기슭", "모두 이방인이 되었다"는 표현들은 오래 남는 문학적 이미지들입니다.

다만 문장 전체가 다소 비장한 정조로 일관되어 있어 중간에 현실적 기억이나 구체적 에피소드가 한두 군데 삽입되었다면 감정의 진폭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현재의 원고는 서정성과 사유는 깊지만, 체온이 느껴지는 장면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어머니를 추모하는 글을 넘어, 인간이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뒤 어떻게 세상 속에서 이방인이 되어가는가를 성찰한 품격 있는 산문입니다. 특히 제목 「칠천 일」은 읽고 난 뒤에도 오래 마음속에 남는, 매우 성공적인 제목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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