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센트럴시티 출발
수군재건로를 답사한다면 회진을 빼놓을 수 없다. 회진은 충무공이 판옥선 12척을 인수하여 비로소 수군을 재건할 수 있게 된 포구이기 때문이다. 난중일기에는 회녕포(會寧浦)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현지에서는 지금도 회령포라는 간판을 흔히 볼 수 있다.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은 8월3일 하동에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되었다. 그날부터 8월18일까지 보름동안에 통제사는 화개, 구례, 곡성, 옥과, 순천, 곡성, 순천, 낙안, 보성, 장흥, 회녕포(회진)까지 쉴 틈 없이 다니며 장병과 무기를 모았으나 따르는 자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10여만 명의 일본군이 바로 지척의 남원을 공략하고 있는 중이라 그 주변 지역은 엄청난 전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충무공은 회진에서 배설이 도망하여 정박시킨 전선 12척을 찾았다. 그는 여기서부터 수군의 명색을 겨우 유지하면서 뱃길로 이동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대파하여 기세등등한 일본 수군이 남해를 제압하고 있었기에 형세가 외로운 조선 수군은 서해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충무공은 8월20일 회진을 출항해 8월29일까지 10일 동안에 이진(해남군 북평면), 도괘, 어란진, 갈두(해남군 송지면), 벽파진으로 항해하면서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벽파진은 명량해협 입구의 진도에 있는 포구다. 일본수군은 이순신을 뒤 쫒아 여기까지 왔다.
답사팀은 고속버스터미널의 센트럴시티(구 호남선) 08시발 장흥 행 버스에 올랐다. 장흥행 버스는 회진, 노력항까지 선택적으로 운행한다. 선택적이란 승객이 없으면 운행을 안 한다는 뜻이다. 양평, 인천, 수원의 회원들도 새벽에 집을 나와 서울의 센트럴시티 터미널에 모였다. 금오랑이 예매한 승차권을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버스에는 답사팀 외에 10여명의 승객이 더 탔다. 그들은 모두 장흥에서 내리고 회진까지 가는 사람은 없었다. 출발 후 1시간쯤 지나자 금오랑이 안내 자료를 나누어 주었다. 자료에는 일정과 지도, 난중일기 중 회진관련 기사, 당시의 명군 이동, 일본 사정, 강화회담 등이 소개되어 있었다.
버스는 5시간을 달려서 일행을 회진에 내려주었다. 장마철이지만 구름만 끼었기에 걷기에는 오히려 좋은 날씨다.
“여기서 아침 식사를 하고 출발합니다.”
금오랑이 아침 식사라고 했지만 시간은 점심이다. 회원들은 2시간 정도 걸은 후 각자 지참한 중식을 펼칠 것이다. 그들은 ‘정남진한우식당’에 들어가 곰탕을 주문했다. 수봉이 식대를 감당해 주었다. 지난 주 아들 혼사에 축하한 회원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일 것이다.
2. 회진성과 방촌유물전시관
회진성은 터미널 바로 앞이다. 검암이 앞장서서 성에 오르니 모두가 따랐다. 금오랑은 그런 성이 있는 줄도 몰랐다. 출발 인증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14:10)
20분쯤 걸으면 덕흥 마을과 회진면 경계 표지석을 만나고 10분 정도 더 걸으면 저수지다. 답사자들은 자동차도로를 피해 저수지 둑 위로 올라갔다. 흔히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들 때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저수지도 만든다. 그래서 이 지역에 저수지가 많다. 답사자들은 관흥 삼거리를 지나 그늘을 찾아 휴식했다. (15:00) 1시간 걷고 휴식하는 것이 순례자 건강수칙이다. 수봉이 큰 봉지를 꺼내더니 옥수수튀김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최근 3일간 계속 술자리를 가야했기 때문인지 몸이 무겁고 걸음이 힘들어 자주 쉬었다.
수동마을 표지석과 정남진 전망대까지 2 km 표지판을 지나면 한옥으로 지은 마을 회관을 만난다. 답사자들은 회관 앞 큰 정자나무 아래서 각자 준비한 점심 식사를 나누었다.(16:20)
답사자들은 16시50분경에 방촌유물 전시관에 도착했다. 이번에 처음 참가한 박 변호사가 위(魏) 명예관장에게 안내를 부탁해 두었 다. 박 변호사는 장흥이 고향이므로 이곳의 유지를 여러분 알고 있는 듯했다. 전시관에는 장흥 위씨(魏氏)의 후손들이 간직한 농촌 살림살이 유물은 물론이요 왕으로부터 받은 교지와 가문에서 발행한 목판본 인쇄물, 선비들이 일상으로 사용하던 문방사우, 장흥위씨 족보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방촌의 실학자 존재 위백규(1729-1798)는 덕행이 뛰어났고, 그의 저술은 널리 알려졌다. 위 명예관장이 1시간 가까이 안내해 주었다. 위 관장은 조상의 덕과 업적을 설명하기에 1시간은 턱 없이 부족했지만 무턱대고 답사자들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기에 현수막을 펼치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17:50)
유물전시관 맞은편에는 고인돌(지석묘) 군락지가 있다. 키 큰 소나무 아래 큰 바위가 여러 개 널려 있는데 고인돌이라고 알려 주지 않으면 그냥 바위로만 알고 지나갈 형상이었다.
관산읍 사무소 건너편에 있는 관산초등학교 교문 중간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어 주의를 끈다. 교문 서편에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 회원들은 뜻밖의 충무공 동상을 보고 기념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18:10)
3. 관산읍의 만찬
금오랑은 인터넷으로 검색해 알아둔 여관(로얄장)으로 갔다. 유물기념관 근처에도 모텔이 있지만 다음날 또 걸어야 하므로 읍내에 있는 여관을 택했다. 그는 방을 정할 때는 여성회원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다. 대표로 방을 둘러본 김 여사가 좋다고 했다. 그들은 숙소와 가까운 곳에서 적당한 식당도 발견했다.
“방 4개에 14만원입니다. 짐을 풀고 저 앞의 식당으로 모이십시오.”
금오랑이 낙지볶음. 갈치조림, 김치찌개 등을 주문했다. 더위에 지친 답사자들은 맥주로 갈증을 풀었다. 맥주 진도가 빨리 나가면서 안주가 부족해 낙지볶음을 추가했다.
“오늘 처음 참가한 박 변호사님은 지난번 서울 중구청장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이 곳 장흥이 고향인데 이 청준 작가도 여기 회진 출신입니다. 두분 다 명문 광주일고를 나오셨습니다. 박 변호사님의 소감 말씀과 건배사를 청하면 어떻겠습니까?”
“짝 짝 짝”
회원들은 금오랑의 제의를 박수로 동의했다.
“우연히 백의종군로순례회 회원들이 저희 고장을 답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꼭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이 먼 곳까지 오셔서 충무공을 기리며 저희 고장의 산천과 문화를 접하고 음식을 나누는 분들을 만나서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 저녁 여러분과 함께 있고 싶으나 오랜만에 모친을 뵈오러 장흥에 가야 합니다. 내일 다시 합류하겠습니다. 백의종군로순례회와 장흥의 발전을 위해 건배를 제의합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위하여!”
4. 수박 파티
식사가 끝나고 숙소에 들어가려는데 청호가 근처 청과시장에서 엄청나게 큰 수박을 들고 나왔다. 그는 저녁을 먹어 배가 부른데도 수박을 샀다. 낮에 더위로 목이 탔을 때부터 눈앞에 시원한 수박이 어른 거렸는데 막상 수박을 보니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배부른데 웬 수박?”
“밥 들어가는 배와 수박 들어가는 배는 따로 있어.”
이어서 나 여사가 맥주를 한 꾸러미 들고 나타났다.
“아니, 배부른데 웬 맥주?”
“밥 들어가는 배와 술 들어가는 배는 따로 있다네요.”
회원들은 상점에서 포장용 박스를 얻어서 길가에 펴고 둘러앉았다.
“길가에 앉아도 될까?”
“시골에 다니는 사람도 없으니 괜찮을 것 같다.”
잠시 후 여관의 주인이 나타났다.
“아주머니, 어떻게 알고 나오셨어요? 수박 좀 드셔요.”
“이 바로 앞 찻집도 우리가 하는 가게요.”
“그래요? 이 동네 유지이시네요.”
관촌읍 길거리 수박 파티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5. 죽교상하발로
7월28일 06시에 기상하여 07시에 ‘천관산식당’에서 곰탕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수봉과 한산은 식후 숙소에 다시 들어가 짐을 챙겨 나왔다. 그는 계획대로 08시 출발인 줄 알고 나왔는데 아무도 없는 것이다. 다른 회원들은 식사가 끝나자 계획보다 10분 먼저 출발했던 것이다. 수봉과 한산은 출발부터 1km 이상 뒤처졌다. 옥당사거리에서 북쪽의 고읍천을 건너는 죽교를 지나면 죽교상하발로라는 시골길이 나온다. 죽교리에서 하발리를 지나 상발리까지 가는 길이다. 관산중학교를 지나면 죽곡 마을 , 양촌 마을, 동촌 마을이 차례로 나타난다. 마을마다 멋진 정자나무가 한두 그루는 반드시 있다. 하발리에는 효적비(孝積碑)와 창선비(彰善碑)가 있는데 비석 둘레를 네모난 구획으로 보호하는 돌 구조물이 독특하다. 상발 마을에서는 벽화를 볼 수 있는데, 김정미 화가의 ‘자연과 사람의 조화’를 표현한 작품이다.
6. 안양 가는 길
정남진 도로 표시판을 지나면 멀리 남쪽으로 좁은 포구 안의 바다가 보인다. 정남진 녹색 어촌체험마을 입구 아치와 간판이 보이는 산정삼거리에서 서북방향으로 계속 직진하여 약간의 비탈길을 오르면, 오른쪽 나무 사이로 다시 바다가 보인다. 신풍 마을 표지석과 버스 정거장을 지나면, 두암마을 표지석을 볼 수 있다. 30분 쯤 걷기를 계속하면 정자나무 아래에 농산길지(農産吉地) 표지석과 기와지붕의 건물을 볼 수 있다.(11:05) 답사자들은 풍길 삼거리에서 용산 방면으로 30분 정도 더 걸어 남상천 위의 덕암교를 건넜다. 강변 너른 풀밭은 마을의 공원이다. 선발대는 정자에 앉아 후진을 기다렸다. 이때 박 변호사가 금오랑에게 전화를 했다. 안양면 사무소 가는 갈림길에서 기다린다는 연락이다. 박 변호사는 향토사학자 김 이사장과 그 동료들에게 연락하여 함께 마중을 나왔다. 답사자들은 12시 20분 경에 마중 나온 사람들이 기다리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일행은 차량 3대에 분승하여 문수헌으로 향했다.
7. 초계변씨유허비
문수헌 가는 길에 잠시 내린 곳은 초계변씨13충훈유허비(草溪卞氏十三忠勳遺墟碑)였다. 유허비는 길가 밭 가운데 있었다. 박변호사가 초계변씨들이 임진왜란 중에 어떻게 싸웠는지 설명했다.
“잘 아시다시피 충무공의 모친이 초계 변씨인데 우연하게도 충무공의 조모도 초계변씨입니다. 변홍원의 호는 월계인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권율 장군에게 나아가 여러 번 뛰어난 공적을 세웠습니다. 정유년에는 동생과 작은 조카들과 더불어 충무공에게 나아가 힘껏 싸웠습니다.”
필자는 박 변호사가 이야기한 것을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유허비의 기록에 의하면 월계는 정유년에 이충무공이 석방되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회령포로 가서 이순신을 맞았다. 이순신이 격려하니 변홍원이 말하길 “죽을 곳에서 죽는 것은 대장부의 떳떳한 일입니다”하며 적진을 누비었다. 명량에서 공은 김응성 안위 등 제 장과 더불어 돌격하여 들어가 분투하여 큰 승리를 하는데 공을 세웠다. 후일 왜구가 고향에 침입하니 여러 형제와 더불어 정병을 거느리고 지포로 향하여 적을 무찌르는 중 총알이 명중하여 졸하였다. 충무공이 애석히 여겨 임금에게 아뢰니 통정대부로 추증했다. 유허비에는 그 외의 많은 변씨 일가의 충훈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8. 문수헌의 향연
한식당 ‘문수헌’은 평화저수지 옆에 있다. 박변호사가 준비한 오찬상은 우아했다. 답사자들은 뜻밖의 연잎 찰밥 상차림을 보고 놀랬다. 장흥의 막걸리는 조그만 병에 들었는데 값은 서울의 큰 병과 같고 맛은 제 값을 받을 만 했다. 금오랑이 일어나 감사의 말씀을 했다.
“저희가 좋아서 수군재건로를 답사하는 중인데 뜻밖에 이렇게 성찬으로 환대해 주시니 참 감격스럽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금오랑이 순례자에게 배포하는 안내 책자를 향토사학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책자에는 백의종군로 순례자가 알아야 할 지도, 건강수칙, 순례 중 묵상할 충무공의 생애를 요약한 글 등이 기재되어 있다.
“제가 평소에 궁금해 했던 것인데요. 배설이 왜 이순신에게서 도망갔을까요?”
금오랑이 옆자리의 향토사학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가 그냥 상상한 것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배설은 조선 수군에게 막강한 160척의 판옥선이 있을 때도 적의 함대가 너무 커서 두려워 도망갔습니다. 그런 그가 12척으로 싸우겠다는 이순신에게서 도망가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지 않겠어요. 통제사가 자기를 선봉장으로 삼을 것이 두려웠을 겁니다. 12척의 함선은 원래 자기의 휘하 장병들이었죠. 그러니 통제사가 "네가 이번에 너의 부대로 싸워 공을 세워라. 그래야 지난번 탈영한 죄값을 치룰 수 있다"고 명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을 것 아닙니까? 선봉장이 되면 전투중 도망갈 기회도 없지요. 요행히 지난번에는 뒤에 있었기에 도망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영낙없이 물고기 밥이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좋은 질문이고 그럴 듯한 상상이지만 연구해 봐야겠습니다.”
9. 상경
오찬이 끝나고 답사자들은 장흥터미널까지 곧게 뻗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랑비가 오락가락했다. 인송과 검암은 김 이사장의 차로 터미널에 먼저 도착했다. 그들은 상경하는 버스의 시간을 미리 알아보고 나중에 오는 일행의 좌석을 예약해 주었다. 인송은 방금 출발하는 버스의 마지막 표를 얻어서 40분 먼저 상경할 수 있었다. 다른 회원들은 모두 3시반 차표를 샀다. 그 시간 이후에는 상경하는 차가 없다.
“떠날려면 아직 시간이 많은데 뭐 할 건가?”
수봉이 대포나 한잔씩 하자고 권했다. 터미널 건물에 마침 대포집이 있었다.
“버스 타기 전에 막걸리나 맥주 많이 마시면 안 돼. 소변이 급하게 될 거야."
그들은 조심스런 마음으로 목을 축였다.
버스가 출발하자 금오랑이 수입과 지출을 정리하더니 문자로 회계보고를 했다. 회원들은 수봉과 박 변호사가 두 끼의 식사를 감당했기에 예상보다 적은 비용으로 1박2일을 지냈다. 귀가하여 만보기를 보니 집을 나갈 때부터 귀가할 때까지 47,000보다. 28 내지 33km를 걸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