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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부민고소금지법과 노비종모법, 그렇기에 세종대왕은 성군이 아니다?

작성자서초패왕 항우|작성시간22.06.18|조회수1,157 목록 댓글 18

 

 

 

부민고소금지법을 시행하며 억울한 백성들의 언로를 막았고, 노비종모법을 시행하며 노비들의 숫자를 늘렸다.

▶▶ 그러므로 이런 악법들을 통과시킨 세종대왕은 사실 애민군주가 아니다.

 

 

 

 

 

 

라는 논리로 세종대왕을 폄하한 다수의 학자들과 그 의견에 동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 걸로 압니다.

뒤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뭔 X소리야???" 라는 입장을 밝히며 이 글을 시작합니다.

 

 

 

1. 부민고소금지법

 

먼저 이는 부민(향리,아전,백성)은 수령(부윤,목사,현감, 군수)의 죄를 고발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인 수령고소금지법

노비나 하인이 그 주인을 고소하지 못한다는 주인고소금지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법이 제정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 고려의 행정구역 구분 -

 

조선 개국 전 지방 통치의 배경을 살펴보면, 고려는 지방의 관제가 정비되지 못하다 겨우 성종 때 12목을 설치하고

현종 때 5도와 양계 체제를 정비하여 병마사와 안찰사를 파견합니다. 허나 도는 상설기관 없는 일반 행정단위였으며

도를 관장해야 할 안찰사도 실상은 도내에 거주하며 통치하는 게 아닌 순찰직이었고, 임기 또한 6개월로 짧았습니다.

거기다가 안찰사 미만의 지방관들이 직접 파견되는 곳은 어디까지나 군과 현 단위까지라 전방위적 통치가 어려웠고

결국 그 밑으로는 지방 향리나 후기 호족들의 주도하에 중앙의 간접 통치를 받는 구조였습니다.

 

즉, 고려는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강력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 조선 8도 -

 

그리하여 조선은 지방 통치에 대한 중앙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군현 아래에도 규모에 따라 필요 시엔 수령을 파견했고
고려시대의 향리나 후기 호족들은 이제 흔히 아는 아전과 같이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을 보조하는 역할로 변경됩니다.

또한 수령들의 부패나 실정을 감독하기 위해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 상설기관을 세워 거주와 통치를 가능케 하였으며

품계 또한 안찰사(종 5품 이상) 때에 비해 관찰사(종 2품 이상)를 높여주며 통치 권한을 높여줍니다. 그랬음에도...

 

 

 

"고자질[告訏]하는 풍속이 성행하여 사람을 해(害-음해)하려고 무명장(無名狀)을 거[掛]는 자가 있고, 분풀이[逞忿]를 하고자 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치는 자도 있으며, 수령(守令)을 참소(讒訴)하는 자가 또한 많아서 벌떼처럼 일어납니다. 대개 수령(守令)이란 구중(九重)에서 명령을 받고 백리(百里)나 되는 곳에 나가서 정사(政事)를 맡은 자입니다. 열 집이 되는 고을에도 오히려 군신(君臣)의 예(禮)가 있으니, 비록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백성된 자가 휘(諱)하여 숨기는 것이 가하고, 풍자(諷刺)하여 일깨우는 것이 가합니다.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그 대부(大夫)를 그르게 여기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저 토호(土豪) · 향원(鄕愿) 과 교활한 아전 · 간사한 백성들이 혹 태장(笞杖)을 맞거나, 혹 부역(賦役)에 시달리면, 도리어 사사 원수(怨讎)를 삼아 밤낮으로 부지런히 몰래 중상(中傷)합니다. 국가에서는 그 참소한 말을 가지고 수령(守令)에게는 법을 다하고, 간사한 백성이 수령을 고소한 죄는 논하지 않으니, 이리하여 아랫사람으로 윗사람을 해치는 풍속이 일어납니다."

 

『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4월 8일 갑진 2번째 기사, 1410년 명 영락(永樂) 8년

 

 

 

왕자의 난 등을 거친 태종이 즉위하며 왕권을 강화했지만, 위 기사처럼 지방 향리나 호족들은 고려대에 머물렀던 겁니다.

결국 1420년, 세종은 수령고소금지법을 통과시킵니다. 이는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자, 그럼 고을의 백성들은 수령들의 실정이 너무 ㅈ같아도 ㅅㅂㅅㅂ 거리면서 참고 살아야 되느냐?

 

절대로 아닙니다. 세종이 그렇게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정책을 결정했다면 한국사 최고의 애민군주로 평가받았겠습니까?

수령의 비리와 불법행위 및 오판 등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원통한 피해를 당하면 한양에선 송사와 관련된 부처의 판서에게

지방에선 관찰사에게 고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세종은 감찰을 위한 중앙 관리나 찰방(察訪)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며

수령들의 실정에 대한 사헌부의 탄핵 등 보완적인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종대 말기인 1447년에 이르러

부역 불균형, 과중한 세금 징수, 진휼 과정에서의 부정, 노비나 토지 소송의 잘못된 판결 등은 직접적인 고소를 허용하면서

일부분 부민 고소를 수용한 적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백성들의 돌파구를 마련해 두며 수령의 무고도 예방한 겁니다.

 

KBS 드라마 대왕세종 중에서 - '부민고소금지법' 을 발제한 허조(許稠)

 

그럼 주인고소금지법은 왜 통과되었나? 우선 주인고소금지법은 수령고소금지법의 통과 2년 후인 1422년에 제정됐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애초 그 법령이 속한 부민고소금지법, 그것부터 세종의 절대적 의중으로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1419년 6월 21일,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한 입법안이 나올 당시 세종은 회의적 반응을 보이며 이를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의 정승이었던 유정현과 박은은 "수령이 더욱 꺼림이 없게 되어, 백성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라 하며 반대했죠.

 

그렇게 부민고소금지법(수령고소금지법 + 주인고소금지법)을 발제했던 '허조' 는 당시 상왕이던 태종을 찾아가게 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신은 늙었사오니 만약 윤허(允許)를 얻게 된다면, 신이 죽어서야 눈을 감겠습니다." 라 고합니다.

이후 허조에게 감동한 태종이 '즉시 그대로 따랐다.' 는 게 실록기사입니다.(세종 4년[1422] 2월 3일, 경인 3번째 기사)

 

세종 재위초 '임금위의 임금' 태종 이방원

 

즉 주인고소금지법, 아니 애초에 그 법이 속한 '부민고소금지법' 자체가 통과하는 데 태종의 의중이 컸던 겁니다.

그러나... 주인고소금지법이 제정되었다고 하여서 세종이 이후 노비들의 인권까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음의 기록들을 통해 한낱 노비의 대우에 있어서도 인본주의를 지향했던 세종시대에 대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임금 된 자라도 한 사람의 죄 없는 자를 죽여서, 선(善)한 것을 복 주고 지나친 것을 화(禍) 주는 하늘의 법칙을 오히려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無辜)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 윤 7월 24일 신축 3번째 기사, 1444년 명 정통(正統) 9년

 

"『속형전(續刑典)』 에 '노비로서 가장을 고발한 자는 그 고소장을 받지 말고 처교(處絞)하라.' 는 법이 서 있으되, 본주인으로서 함부로 노비를 죽인 자는 고발을 당하는 조목[門目]이 없는 까닭으로, 꺼리는 바 없이 마음대로 때려 죽이니 매우 불가하였다. 또한 왕법에도 어긋나니, 이제부터는 영락(永樂, 명 3대 황제 영락제의 연호) 13년(1415)의 왕지(王旨)에 의하여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6월 8일 계축 5번째 기사, 1434년 명 선덕(宣德) 9년

 

"잔인하고 포학한 무리들이 한결같이 노비를 고소(告訴)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때려 죽이옵는데, 금후로는 비록 죄가 있는 노비라 할지라도 만일 법에 따라 형벌을 주도록 하지 아니하고...(중략, 형조의 보고)"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6월 27일 임신 3번째 기사, 1434년 명 선덕(宣德) 9년

 

 

 

'노비구살금지법' 을 시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노비구살금지법으로 인하여 당시의 노비들은 주인으로부터

대부분 비인도적인 구살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를 지키지 않아 처벌받은 기록도 있고, 다음과 같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9003_002

의금부에서 비첩을 학대한 권채와 그의 아내의 형벌을 정하여 아뢰다.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9월 3일 무자 2번째 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005015_003

형조에서 서가이(西加伊)의 어미인 부가이(孚加伊)의 속(贖)을 청하다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5월 15일 무술 3번째 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206017_001

사헌부에서 계집종을 죽인 이맹균과 그의 처를 탄핵하다.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 6월 17일 정해 1번째 기사,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어쨌든 세종시대의 악법이라는 '부민고소금지법' 은 조선의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지

'백성들을 핍박하려는 의도가 절~대 절~대 절~대 아니었다.' 는 말씀을 미리 드리고 싶습니다.

 

 

 

 

 

 

 

 

 

 

2. 노비종모법

 

고려 이래 양천교혼(良賤交婚)은 금지하였으며, 소생은 모두 일천즉천의 원리를 따라 천인으로 규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는 노비를 소유한 고려 권문세족의 영향으로 이 양천교혼의 금기가 깨져가며

천민이 늘어갔고 그 결과, 양인의 수가 갈수록 감소되자 국가 세입도 줄어들어 국정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겁니다.

태종은 양인 소생이 다수라는 점에 착안하여서 1414년부터 '노비종부법' 을 양인의 비처 · 첩 소생 자녀에 적용,

양인의 인구를 늘리고 천민의 증가를 막아내는 역할을 어느 정도는 하게 되었습니다... 만...

 

JTBC 드라마 하녀들 중에서 - 양인을 유혹하는 천민(이라 합니다... 드라마 안 봤어요.)

 

이 제도가 도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폐단이 일어납니다. 당시 유전자 검사와 같은 기술들이 없었던 만큼

여종이 출산했던 아이가 과연 양인의 자식인지, 천민의 자식인지 명확하게 구분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여종이 양인의 자식을 임신하였지만, 여종을 소유한 양반이 노비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이를 조작한다던지

여종이 천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천민 아버지의 뺨을 때리며 욕을 하고, 아버지로 인정 않는 패륜이라던지...

노비 종부법의 허점을 악용한 사례들도 여럿 차례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결국 허조, 맹사성, 김효손 등이 유교적 인륜 파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노비종부법의 폐지를 요구했고,
여기서 세종이 내린 합리적 결론은 어머니 신분에 따라 자식 신분을 결정하는 '노비종모법' 이었던 겁니다.

 

JTBC 드라마 하녀들 중에서 - 양반의 자식을 임신한 천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403026_002

상정소에서 고증하고 아뢰다.

『세종실록』 55권, 세종 14년 3월 26일 을유 2번째 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그런데, 『세종실록』 14년(1432) 3월 26일자 기록에 여자 종과 양민사이 '관계, 결혼' 을 법적상 엄히 금지했다고 나옵니다.

양천교혼의 금지가 법적으로 강화되는 상황에서 노비종모법은 가속화 될 수 있었던 천민의 증가도 사전에 방지한 겁니다.

한편으로 양천교혼이 양민만의 강제성이든 천민과 양민 사이 찐사랑에 의한 결과든, 무조건 벌하는 것이 옳지는 않았기에

양천교혼을 금지하면서도, 혹시나 발생할 예외상황도 노비종모법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라 보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 양천교혼의 증가를 억압하기 보다는 그로써 발생할 수 있는 폐단도 동시에 방지할 수 있는 게 최선의 선택이겠지요.

 

'노비종모법' 은 신분제의 공고화를 위한 악법이라기 보다는 기존 체계의 헛점으로 야기될 사회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환원책' 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시기 노비종모법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책은 '양천교혼 금지의 강화' 이고요.

 

 

 

 

 

자, 어쨌든 결론을 내려보자면 '부민고소금지법' 과 '노비종모법' 모두

백성을 핍박하는 세종대왕의 악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급격히 변동하는 사회의 균형점을 맞추고자 마련한 대비책이었을 뿐

 

 

 

 

 

마지막으로 참고하자면 '부민고소금지법' 과 '노비종모법' 을 근거로

"세종대왕이 애민군주가 아니었다." 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교수는...

 

 

 

 

 

 

서울대에서 경제학부 교수로 강단에 있었던 이영훈 전 교수이며 대표적 저서로는...

 

 

 

 

 

 

 

 

 

 

 

그만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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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아이마르★ 작성시간 22.06.18 안병직이랑 같은류인가ㅡㅡ
  • 작성자땅파다나온두더지 작성시간 22.06.18 현재 시각으로 역사 속 인물 보면 성군이란게 존재 하기는 할까
  • 작성자다현 작성시간 22.06.18 아오 욕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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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Miami Dolphins 작성시간 22.06.18 오 잘봤습니다.
    혹시 근현대사 관련해서도 글 작성 계획이 있으신가여?
  • 답댓글 작성자서초패왕 항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6.18 나중에 월남전 당시에 있었던 국군이 발생시킨 민간인 피해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 식민지인들이 당한 피해의 차이점에 대해 써 볼까 생각중입니다. 예전부터 이 둘을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서요.(물론 월남전 당시의 국군의 민간인 피해도 잘못한 건 맞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에서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비교한다면 일제강점기 일본과 월남전 국군을 동일시하는 것은 진짜 말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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