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시골 촌구석의 가난한 농부들은 알뜰살뜰하게 돈을 모아서 자신 명의로 된 땅을 직접 사들이기란 정말 쉽지가 않았다. 기껏해야 지주에게 땅을 조금씩 빌려서 농사를 짓고 난 뒤에 소작료를 주고 남는 것으로 식솔들이 겨우 목구멍에 풀칠이나 할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평생 자기 소유의 땅 한 평을 못 갖고 있다가 생을 마감 할 수도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충청북도 단양의 우리 고향 마을에서는 주로 그런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 밭을 개간하는 일들이 많았었다. 국유림이었던 산속 여기저기의 적당한 땅에 불을 지르고 곡괭이로 땅을 파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농사를 지을 만한 밭을 만들려면 우선 아름드리나무의 숫자가 적으면서도 큰 돌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마을을 감싸고 있던 산은 돌이 없는 땅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전 밭을 일구기 쉬운 곳을 찾아 마을과는 더 높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화전 밭의 개간은 주로 농사철이 끝나가는 늦가을부터 초겨울에 잠깐 동안 이뤄지다가 땅이 해동을 시작하는 이른 봄에 본격적으로 시작하곤 했다. 우선 밭을 만들 만한 예상 후보지가 결정되면 초저녁에 온 가족이 동원되어 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곤 불을 질러놓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주변으로 큰 산불이 번지지 않도록 어린 소나무 가지로 불을 두드려가며 조절을 한다. 뜻하지 않게 불길이 조금 더 외부로 번져 나가더라도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그만큼 밭을 더 넓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욕심과 해가 넘어간 저녁때여서 단속에 걸릴 염려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는 주로 할머니의 주도로 개간이 시작되었는데 불을 지를 때 뜻하지 않게 큰 산불로 번지거나 관청의 기습 단속에 걸리기라도 하면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는 계속 일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한번 불이 붙은 나무는 다음날에도 꺼지지 않고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뿌리를 향해 계속 타들어 가는 곳도 있었다. 불이 완전히 꺼지게 되면 낮으로 남아 있는 작은 나무들은 베어내고 큰 덩치의 나무는 톱으로 밑동을 잘라서 걷어 낸다. 이제 모든 것은 사람의 힘으로만 땅을 조금씩 끈기 있게 한 뼘씩 뒤집어 나가야 한다. 우리가 갖고 있던 연장이라고 해 봐야 쇠스랑이나 곡괭이와 삽 그리고 땅속에 박힌 작은 돌을 뒤집거나 빼낼 수 있는 지렛대 하나가 전부였다. 나 역시도 학교를 들어가기 이전의 일이었지만 형들과 같이 그곳을 따라 다니면서 일을 도와야 했다. 갈대나 야생초들이 자라던 곳은 땅 심이 깊고 비교적 부드러워 삽으로 조금씩 떠서 뒤집어 놓고 뿌리를 털어서 걷어 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자잘한 나무가 있던 곳은 땅속 깊은 곳까지 박혀 있는 뿌리를 모두 뽑아 버려야 하기 때문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아주 큰 소나무의 밑동은 그냥 남겨 둬야 했다. 그런 건 사람의 힘으로는 곧바로 뽑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근처의 땅을 조금 파낸 뒤 톱으로 나무뿌리 몇 곳을 잘라 놓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한 행동은 나무뿌리가 빨리 죽고 쉽게 썩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라도 해놓지 않으면 어떤 나무는 다시 살아서 잎이 돋아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무의 뿌리가 썩어서 완전히 뽑아 버릴 수 있기 까지는 3~4년 정도의 세월이 걸린다. 화전 밭을 개간 하다 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돌 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곤 했다. 잘잘한 돌이 많기 때문에 땅을 떠엎으려고 괭이를 힘껏 내려찍으면 뾰족한 날이 땅속으로 절반도 들어가질 않고 불똥을 튀기면서 다시 튀어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돌은 지렛대를 이용하여 사람이 겨우 옮길 수 있는 것부터 주먹만 한 것까지 모두를 뽑아 올려서 화전 밭 밖으로 옮겨야 한다.
그런 이후 몇 년 농사를 짓는 동안에도 쟁기질을 맘 놓고 못할 정도로 많은 돌들이 쏟아져 나오곤 했다. 아버지는 쟁기질을 하시다가도 작은 돌이 하나라도 걸리거나 하면 소를 멈춰 세우고 곧바로 들어내셨다. 돌을 그대로 내버려 두게 되면 언젠가 다시 흙속으로 묻힐 수도 있고 그러면 매년 농사를 지을 때마다 큰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는 화전 밭이 어느 정도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 이후에도 매년 봄 밭을 갈러 나가실 때마다 집에서 할일 없이 놀고 있던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나가셔서 쟁기가 땅을 뒤집으며 지나갈 때마다 위로 들어난 돌이 있으면 무조건 밖으로 내다 버리라고 하셨다. 그 당시 새로 만든 화전 밭 곳곳엔 널찍한 바위가 몇 개씩 있기도 했는데 그 위에는 자연스럽게 근처에서 가져다 올려놓은 작은 돌들로 수북이 쌓이곤 했다. 그 정도로 큰 바위는 사람의 인력으로는 어떻게 처리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런 바위와 커다란 나무 밑동이 개간한 밭 곳곳에 많이 있을수록 밭은 제구실을 못하게 된다. 밭을 갈아엎을 때도 자꾸만 걸리적 거려 소를 몰고 쟁기질을 하기에도 상당히 불편하다. 그렇게 황무지를 개간한 이후 몇 년 동안 거름을 뿌리고 곡물을 재배해 나가며 계속해서 밭을 갈고 다듬어야만 비로소 쓸 만한 땅으로 변하곤 한다. 버려져 있는 땅을 개간하여 옥토로 변하기까지 보이지 않는 농민이 수많은 땀방울을 흘린 결과다. 이와 같이 화전 밭을 일구는데도 어떠한 제제 조치가 없게 되자 사람들은 더 깊고 먼 곳의 산까지 올라가서 마구 잡이 식으로 화전 밭을 일구다 보니 어느 때 부턴가 정부도 강제적인 통제가 필요 했었던 모양이다. 1974년 이후 부터는 화전 밭을 농민 마음대로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미 개간해 놓은 밭이 있더라도 어떠한 기준을 잡아 그 경계선을 넘어서 있는 산속의 밭들은 강제로 경작을 못하게 하였다.
그 경계를 알리는 표시는 해당되는 밭마다 관계자들이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일정한 크기의 땅에 하얀 석회 가루를 뿌려놓고 비닐로 덮어 놓아 먼 곳에서도 오래도록 잘 보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표시선 위쪽의 땅주인들은 어쩔 수 없이 철수 해야만 했다. 어차피 처음 화전 밭을 개간 할 때 부터 무단으로 들어와 경작을 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엔 적정한 보상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함에도 제제 조치 이후 너 나 없이 산을 파헤치던 화전 밭은 우리 동네에선 단 한건도 이뤄지질 않았다. 대신 경계선 위쪽 깊은 산에서 보기 싫도록 경작이 이뤄지던 밭에는 떠나간 주인 대신 정부 주도로 어린 나무의 묘목을 심어 놓았다. 십 년도 체 지나지 않아 그곳은 자연스럽게 울창한 숲으로 변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정부에서 농민들에게 무분별한 화전 밭을 일구지 못하도록 제제를 가했던 건 시기 적절 했다고 본다.
또한 강제로 주민들을 이전 시키고 난 뒤에도 꾸준히 숲을 가꿔 온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 임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한 화전 밭의 경작지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보기 흉할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