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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얼굴이 익어 가도 좋아

작성자하얀마음|작성시간26.06.06|조회수14 목록 댓글 0
얼굴이 익어 가도 좋아

  쏴아아, 파도 소리가 머리 위에서 맴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니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다. 나는 갈라파고스 해변에 바짝 엎드려 있다.

  날이 뜨거워 땀도 흐르다 금세 말라 버린다. 적도의 날카로운 햇빛에 목덜미는 벌써 빨갛게 탔다. 하얀 모래사장이 햇빛을 튕겨 올려 얼굴도 천천히 익어 간다.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지금 꽤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내 앞에는 새끼 바다사자 여럿이 세상모르고 놀고 있다.

  갈라파고스에는 바다사자가 많다. 우체국 옆에 턱 하니 누워 있거나 작은 은행 앞에서 쿨쿨 잠을 자고, 공원 벤치가 자기 집 안방인 양 배를 드러낸 채 늘어져 있다.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한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이곳에서 바다사자는 풍경의 일부다. 모래와 빛 위에 무심히 얹힌 색감처럼 놓여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누워 있는 카롤라 해변은 새끼 바다사자의 놀이터 같은 곳이다.

  새끼들은 하루 종일 와글와글 모여 뛰어다닌다. 서로를 툭 밀치고 푹신한 모래 위에 털썩 넘어진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쪼르르 달려간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장난꾸러기들이다.

  녀석들은 밀려오는 투명한 파도를 놀이기구처럼 이용한다. 모래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다 바닷속에 퐁당 빠지는 식이다. 반짝이는 물결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떠밀리다 지치면 서로를 껴안고 드르렁 낮잠을 잔다.




갈라파고스 바다사자는 그 지역에만 사는 고유종이며, 멸종위기 동물이다. 해변은 이들에게 단순한 휴식 공간이 아닌 번식과 생활, 사회 활동이 이뤄지는 장소다. 낮에는 해변에서 쉬고 주로 밤에 먹이를 찾기 위해 바다로 들어간다.


  '찰칵, 찰칵.' 나는 카메라를 들고 그 모습을 한참 따라다닌다. 셔터를 누르다가 가끔 웃음이 픽 새어 나온다. 호기심 많은 녀석이 쫄래쫄래 다가와 렌즈 끝에 코를 톡 갖다 댄다. 엄청나게 귀엽다. 이 순간을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온 듯, 그 모든 수고가 전혀 아깝지 않다.

  생각해 보면 내 삶에는 늘 동물이 함께였다. 글도 떼기 전부터 강아지가 마당에서 노는 모습을 구경하며 자랐다. 녀석들은 마당을 타다닥 뛰어다니다 햇볕 아래 철퍼덕 드러누워 잠을 잤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곤 했다. 동생 같던 녀석이 새끼를 낳고 어미가 되는 것도, 이제 막 눈 뜬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모습도 여러 번 지켜봤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은 마당이 아닌 갈라파고스 해변에 있다. 마치 어린 시절 그때처럼, 바다사자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척이나 단순해진다. 세상이 괜히 조금 더 부드럽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동물을 바라볼 때는 이런 점이 참 좋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마음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순간이 온다. 어쩌면 동물에게는 인간 마음속 어둠을 물리치는 신성한 사명이라도 있는 걸까? 이럴 때는 얼굴이 조금 익어 가도 괜찮다.

  어느덧 노을이 천천히 내려앉고 바다가 반짝반짝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해변 위 그림자도 길게 늘어진다. 조금 전까지 천방지축 뛰어다니던 새끼들도 하나둘 움직임이 느려진다. 그렇게 신나게 놀던 녀석들이 해질녘이 되자 각자 어미를 찾는다.

  "메에에." 생각보다 염소와 비슷한 울음소리다. 놀이터에서 한바탕 놀던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목소리로 "엄마~." 하고 부르는 것 같다.

  나는 카메라에서 손을 떼고 두 눈으로 바라본다. 민들레 솜털 같은 새끼의 몸은 온통 모래투성이다. 한낮의 뽀송함은 온데간데없다.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얼굴은 바스러진 조개껍질 범벅이다. 저런 꼴로 가니 낮잠 자던 어미가 놀라서 몸을 일으킨다. "컹컹!" 꾸짖으며 혼을 내다가도 조심스레 얼굴을 닦아 준다. 그 모습이 노을보다도 아름답다. 사람 사는 것 크게 다르지 않다더니, 동물 사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암컷은 보통 1년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호기심 많고 장난기 있는 새끼 바다사자는 해변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동물 보호 구역같이 관리되는 이곳 해변이 어미 바다사자의 육아 공간이 돼 준다.

  박성호 | 여행 작가


박성호 님은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뒤 세상을 향한 호기심에 이끌려 직업 여행가로 살고 있다. 선한 사람과 동물, 광활한 자연 속 홀로 누워 있기를 좋아한다. 책 《여행가의 동물수첩》 《 은둔형 여행 인간》 《바나나 그 다음》을 썼다.



  Colbie Caillat - Bubbly (Lyr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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