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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과 시련속의 역사 3. - 여순반란사건(1948년) !!

작성자달구벌|작성시간19.02.04|조회수45 목록 댓글 0

여순반란사건(1948년) !!







여순반란이 진압된 후 붙잡힌 반란군들. 이들 가운데 1000여 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1948년 9월 9일 38선 이북에서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헌법안도 국호도 국기도 소련이 만들어 준 ‘괴뢰국가’였다.
    그로부터 한 달 열흘 뒤인 10월 19일에는 여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제주도로 출동할 예정이었다. 14연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세포였던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는 “경찰이
    습격해 오고 있다” “동족상잔의 싸움터인 제주도로 갈 수 없다”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38선을 넘어 진격해 오고 있다”고 선동했다.

    장교들과 반란에 반대하는 사병들은 사살됐다.
    여수를 장악한 2000여 명의 반란군은 경찰관, 한민당 등 우익 정당·사회단체 간부 및 그 가족을 학살했다.
    여수경찰서장 고인수 경감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총살당했다. 여수경찰서에 근무하던 여경들도 처참하게
    학살됐다. 20일에는 순천이, 22일에는 보성·고흥·광양·구례·곡성이 반란군의 손에 떨어졌다.
    순천에서는 순천중학교 학생들이 주동이된 인민재판이 벌어져 400여명이 총살되거나 맞아죽거나 목졸려죽었다.
    산 채로 불에 태워진 사람도 있었다.

    반란은 일주일 만에 진압됐다. 7000여 명이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3000여 명이 체포되어 그중 1000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토벌군에 쫓긴 반란군은 지리산 등으로 들어가 공비가 됐다.
    여순반란이 일어난 것은 미군정이 국방경비대 를 만들면서 장병들의 이념을 검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순반란을 계기로 국군은 군내 좌익 세력에 대한 숙군(肅軍)을 단행했다.
    군사 영어학교를 나와 군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던 군번 1~100번 가운데 25명이 좌익으로 처벌되었다.

    초급 장교와 부사관 가운데 3분의 1이 좌익으로 드러났다.
    병사들까지 포함해 병력의 5%에 달하는 4749명이 총살, 징역, 파면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육사 2기 출신 박정희 소령도 있었다.
    이러한 숙군 덕분에 1950년 6·25가 일어났을 때, 국군은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1948년 12월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됐다.



여수 순천 반란사건(1948년10월19일) !!




1948년 10월 19일 밤 8시. 전남 여수 주둔 제14연대 연병장에 2500여명의 장병들이 집결했다. 이윽고 “경찰을
타도하자”는 구호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자 장병들은 옳소라며 호응했고 반대한3명의 하사관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국방 경비대 제14 연대 병사들이 단독정부 수립 반대 와 제주도에서 일어난
4.3항쟁을 진압하라는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한 것이었다.이 봉기는 남로당과 사전에
연락을 갖고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14연대 남로당 세포원 들이 독자적 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남로당
중앙은 물론이고 전라남도 도당이나 여수·순천지역의 지역당까지도 사전에 봉기 사실을 알지 못했다.



14연대 봉기는 매우 빠르게 파급되었다. 19일 늦은 밤에 시작된 봉기는 다음 날 동트기 전에 여수를 점령했고
아침에는순천에진입하였다. 순천에는 인근지역에서 지원나온 경찰관들이 봉기군을막으려 애썼지만 봉기군은
경찰보다 더 많이 불어났다.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파견대가 봉기에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멀리 광주에서 진압하러 나온 4연대 소속 병사들도 봉기군에 합류했던 것이다. 며칠 만에 여순 사건은
광양, 구례, 보성(벌교)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당시의 군은 미 군정의 남로당 해산령 을 피해 군에 입대한 좌익들에 의해 적화돼 있었고 남로당은 군을 정치
투쟁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리고 지방 좌익 세력과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광범한 민중봉기로 발전
하였고 거리는 온통 인공기로 물결쳤으면 이들은 남한 정권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반란군들이 살해한 우익인사들의 유해

정부는 22일 계엄령을 선포, 38선 경계병력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군대로 진압군을 편성했다 가까스로 순천을
탈환했지만 여수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두 차례의 진압이 모두 실패하자 26일에는 바닷가 경비정에서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며 상륙을 시도했다. 27일에야 9일 동안의 반란사건이 겨우 진압됐으나 2,300여 명이 사망했고,
2.800여 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진압군







반란군과의 구별을 위해 흰 머리띠를 한 토벌군

여수 장악 이후 협조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최소 400명 넘는 억울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 체제 구축에 나섰으며, 군대 내의 공산 주의자를 색출해 척결하고 국가 보안법을
제정해 좌익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에 나섰다. 도망친 반란군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6 ·25 를
맞았다. 한국전쟁의 서곡이었다.









부역자 색출을 위해 학교 운동자에 주민을 모아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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