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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복음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원수를 사랑하여라 (마태5,43-48)

작성자로마노|작성시간26.06.14|조회수2 목록 댓글 0

2026년 06월 16일 화요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원수를 사랑하여라 (마태5,43-48)

 

 

 

1독서<너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1열왕21,17-29)

나봇이 죽은 뒤에, 17 주님의 말씀이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18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19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21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22 나는 너의 집안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너는 나의 분노를 돋우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23 주님께서는 이제벨을 두고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25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26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27 아합은 이 말을 듣자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28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9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화답송>시편51,3-4.5-6ㄱㄴ.11과 16(3◎ 주님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하느님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당신께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돌리시고저의 모든 죄를 없애 주소서하느님제 구원의 하느님죽음의 형벌에서 저를 구하소서제 혀가 당신 의로움에 환호하오리다

 

복음<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5,43-4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제1독서(1열왕21,17~29)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 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27~29)

 

열왕기 상권 21장 20~26절까지는 엘리야를 통해 전해진 아합과 이제벨을 향한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 신탁과(20~24), 저자가 아합에 대한 심판의 정당성을 부연하여 밝힌(26, 27절) 내용이 기술되었다.

이어지는 21장의 마지막 단락인 27~29절에서는 하느님의 심판 신탁을 들은 아합의 회개와 그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심판 유보 사실을 기술한다.

 

그 중에서 본문은 다섯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아합의 회개하는 행위가 마치 눈 앞에서 이루어 지듯이 자세히 묘사된다.

옷을 찢거나(2사무13,19; 욥기2,12,) 맨 몸에 자루옷을 걸치는 행위 (굵은 베로 몸을 동이는 행위; 2열왕6,30)는 전형적인 회개의 모습이었으며, 단식을 하는 것은 매우 강력한 자기 부인의 표현이다.

 

그리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니는 것 행보를 천천히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일종의 근신의 표시로 일상생활 모두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내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렇게 아합이 회개의 모습을 보였을지라도, 인간의 관점으로 보자면 그는 결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없는 자였다. 백성을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게 하여 파멸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22절) 자신이 돌보아야 할 백성인 나봇을 탐욕으로 인해 모함하여 살해하는 등의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아합에게 크나큰 자비를 베푸시어 심판 실행을 유보하여 주신다(29절).

이처럼 극악무도한 아합의 회개까지도 받으시는 하느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징계하시지만, 죄인이 회개할 때에는 죄인 자체는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때의 아합의 회개가 진실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아합의 모습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아합은 하느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자비에 의해 자신에게 임할 재앙이 자신을 비켜 아들의 시대로 옮겨가자, 몇 년이 못 되어 다시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아람과 전쟁을 벌이다가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22,37.38).

 

즉 엘리야가 먼저 선언한 대로 그의 가문 전체의 파멸은 일시적으로나마 그가 보인 겸손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로 잠시 유보 되었지만, 비참한 죽음을 당하리라는 아합 개인에 대한 심판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 예언은 아합 이후 아하즈야를 거쳐 요람 시대에 예후의 쿠테타로 성취되어진다.

 

'그 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28)

 

아합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또 다른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

첫번째 신탁 나봇을 죽이고 그의 기업인 포도밭을 강탈한 아합왕과 그의 일가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였으나, 본절 이하에 나오는 두번째 신탁 심판을 유보하신다는 메시지였다.

아합 같은 악인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 베풀어진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이해를 따라서 내려지는 자비가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고 자비로운 성품에 근거해서 내려지는 신적 자비이다.

분명 하느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이사42,33; 마태12,20) 죄인이 죄를 떠나 회개하면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29ㄱ)

 

의문문으로 되어 있는 본문은 죄인이 하느님 앞에 회개하여 돌아오자마자 즉각적으로 반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잘 드러내준다(루카15,7).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유발했던 행위를 나타내는 새 성경의 '(자신을)낮춘 것' (겸비, 겸손)에 해당하는 '니크나으'(niknah)의 원형 '카나으'(kanah)는 '무릎을 꿇다','엎드리다' 라는 의미이며, 본문처럼 수동형일 때에는 '낮아지다'(2열왕22,19),'뉘우치다'(2역대32,26)라는 의미가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아합이 하느님께 대적하기를 멈추고 하느님 앞에 낮아져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자, 이에 대해 자비를 베푸시고 심판을 유보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한편, 본 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와 같은 하느님의 자비가 부각되는 내용이 수록된 것은 저자가 본장에서 강조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서 저자가 속한 당시의 상황과 이를 일차적으로 읽을 대상들, 즉 하느님의 징계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독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서 저자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은 죄로 인한 것임을 아합의 범죄와 이에 대한 심판 선언을 통하여 분명하게 인식 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심판 선언 이후에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있다.

이같은 본문의 결말은 궁극적으로 이를 읽는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29ㄷ)

 

본문의 '그의 아들' 요람을 지칭한다. 본문의 말씀과 같이 아합의 아들 요람은 예후의 활에 맞아  전사하여 나봇의 밭에 던져지게 된다(2열왕9,21~26).

한편, 이렇듯 아합의 죄로 말미암아 그 아들이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부당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아비의 죄로 인해 죄의 책임을 자손들에게 전가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불의한 아비로 인해 의로운 자손을 처벌하시는 분은 더더욱 아니시다.

그러므로 본문의 심판 예언은 하느님께서 아합의 아들이 어떤 인물임을 이미 알고 계셨고, 아버지의 악한 영향을 받은 아합의 아들 요람을 당신이 죄 가운데 그대로 버려 두신다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같은 일들을 예고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심판의 시기를 유보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를 받아들이는 아합의 아들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아합이 회개를 통해 가문이 멸절되는 심판을 유보받은 것처럼 이를 전해 듣는 아합의 아들 요람도 그의 아버지와 같이 회개하였다면, 그 심판은 지속적으로 유보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자신을 참으로 낮춘 아합을 보시고 그에게서 재앙을 거두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부족하고 부당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편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50],3).

하느님께서는 죄인이며 참으로 보잘것없는 우리를 자비로이 부르시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여섯 가지 대당 명제(마태 5,21-48 참조) 가운데 마지막인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미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너무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좀 더 주목하게 되는 구절은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는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의 중심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핵심 조건으로 원수에 대한 사랑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고,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본받고 따르며 아버지의 모습을 비추는 이들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서양 격언에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마귀의 일이며,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일,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고,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하여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버지를 닮아 사랑과 자비로 주위의 모든 사람을 품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사랑을 하라는 말씀은 사랑이신 분을 주어라는 말씀

 

(마태5,43-48)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잘 안다고 말하자 ‘그렇게 해, 그럼 네가 살 것이다’ 하십니다.

 

(루가10,29.-30)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착한 사마라아인 비유를 주신 후~“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로 율법사의 질문을 바꾸어 물으십니다. 비유 말씀을 보겠습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 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 옷을 벗기고 초 주검으로 만든 강도?

 

(잠언25,18) 이웃에게 해로운 거짓 증언을 하는 자는 방망이와 칼과 날카로운 화살과 같다

= 율법을 선악의 법으로 주어 진리의 옷을 벗기고 구원의 생명을 빼앗긴 그 죽음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 그 율법의 가르침이 강도인 것입니다.(요한10,1참조)

그 율법의 법은 구원, 생명을 줄 수 없기에~ 율법자들은 그 강도 만난 자를 피해 가버리는 것입니다.

 

(루가10,31.-36)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 생명의 옷을 줄 수 있는 진리의 반대 쪽으로~~~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예수님의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 상처에 기름(메시아)과 포도주(피)로 돌보아 주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 이웃, 하면 우리들은 먼저 율법사들 처럼 내가 돌봐줘야 할 그 어떤 다른 이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도움을 받아야 할 이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법의 신앙으로 진리의 옷, 구원의 생명을 빼앗긴 강도 만난 자로~ 이 땅에 사마리아인으로 오신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 할 너희가 이웃임을 알아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지요.

 

44ㄱ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사랑(아가페)을 주어라

 

(필리3,18)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예수님의 도움이신 십자가의 피, 그 구원의 진리를 믿지 않는 것, 예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독서-(1열왕21,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 나봇의 포도밭은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인 것, 그곳 하느님의 듯인 생명의 말씀을 자신의 뜻을 위해 듣는 것, 뺏는 것. 그렇게 자신들의 뜻을 위해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이들은 모두 아합이며 하느님의 원수인 것. 그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아합과 같은 나, 그 원수인 나(이웃)에게 그 죄인들의 죗값으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그 아가페 사랑을 들려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박해 할 것이니~~

 

44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 기도, 프로쉬콤마이(흘려주다) -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흘려주라는 것, 그들도 그 진리로 하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 떠오르게,아나텔로스 - 아나(위) 텔로스(완성)

위에 발광체- 해(빛-예수)를 비추어 ~ 善인, 義인 그 모든 이를 해(말씀)로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이사60,19) 해는 너에게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고 달도 밤의 광채로 너에게 비추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

 

(말라3,20)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너희는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나와서 뛰놀리라.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 세리-(텔로네스) 완성(안식)을 값을 주고 사는 자 라는 뜻, 그것이 죄인 것.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 세리와 다른 민족들의 그들이 하는 일의 대가인 償이 아닌 그리스도인이 받는 償, 福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 하늘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아버지처럼 되는 것, 그러니 나와 이웃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죠.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아버지처럼, 아버지(하느님의 성전) 하느님의 듯을 담아 그분의 성전이 되면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릇보다 담긴 내용물이 참인 것처럼 하느님의 완전하심, 그것이 무엇인지도 우리는 모르지 않는가?

그분은 창조주시며 우리의 생명이신 진리이시라는 것밖에는~~ 아멘.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복음(마태5,43~48)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3~45)

 

마태오 복음 5장 43절은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두고 완전한 대칭을 이룬다즉 '사랑해야'와 '미워해야'가 대칭을 이루고, '네 이웃을'과 '네 원수는이 대칭을 이룬다.

문장 구조를 보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같은 비중을 지니는 가르침이라는 뉘앙스를 준다하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지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표현은 모세 오경이나 예언서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후자는 성경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당시 유다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보편적인 교훈이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예수님 시대에 유다인은 로마의 압제하에 있었고이민족과 반민족적인 동족들의 압제를 받고 있었기에이들을 공동의 적으로 생각하고 증오심을 갖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당시의 시대상을 지적하시며이웃 사랑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계신 것이다.

 

마태오 복음 5장 44절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에서 '사랑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가파테'(agapate; love)의 원형 '아가파오'(agapao)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랑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 단어로서자기 희생적인 순수한 사랑을 나타낸다.

 

사실 인간 본성적으로 생각하면 원수를 결코 사랑할 수 없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상이 원수라 할지라도계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라고 요구하신다그런데 이런 사랑은 누가 베풀 수 있는가?

하느님 대전에 죄를 지어 사탄의 노예가 되어 하느님과 원수가 된 자신을 하느님 몸소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찾아오셔서 십자가상에서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조건없이 사랑하셔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그 사랑을 확신하고 체험한 자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체와 말씀 앞에 아담과 하와의 이기적이고 본성적인 자아를 내려 놓았을 때비어진 우리 자신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러한 원수 사랑을 실천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에서 '기도하여라'에 해당하는 '프로슈케스테'(proseuchesthe; pray)의 원형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는 '~을 위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스'(pros)와 '기도하다', '원하다'는 뜻의 '유코마이'(euchomai)의 합성어로서 '~을 위하여 간구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 지체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원수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자세로 나아가는 영적 수준까지 이르러야완덕(完德)의 근원이시고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하느님의 속성을 본받는 것이 된다는 말씀이다.

 

마태오 복음 5장 45()의 '너희 아버지의 자녀'에 해당하는 '휘오이 투 파트로스 휘몬'(hyoi tou patros hymon; the children of your Father)에서 '아버지의'로 번역된 '투 파트로스'(tou patros)는 소유격이다.

희랍어에서 소유격은 그 속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어서여기서 '아버지의 자녀'는 '아버지를 닮은 자녀', '아버지의 속성을 가진 자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림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속성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연중 제11주간 화요일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복음은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분이시라고 전합니다그런데 완전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주님의 완전함은 그분의 자비하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6,36 참조).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아합 임금과 같은 악인도자신을 낮추고 용서를 청하기만 하면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완전해져야 합니다.

완전해진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원수가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 사랑과 용서는 자비하신 하느님과 당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또한 자비와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더는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도계속 미움과 원망 속에 휩싸인 자신에게 실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은 자신에게 계속 상처를 냅니다그래서 다른 이에 대한 자비와 용서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첫 시작이기도 합니다.

용서는 마음이 완전히 풀렸을 때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는 행위는 완전한 용서를 향하여 첫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완전한 용서는 아니지만자비로운 마음에서 시도한 이 용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지배하던 분노를 녹이고연민과 사랑을 자아내며 마침내 완전한 용서로 이끌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은?

 

복음(마태5,43-4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ㄱ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직역하면 ‘가장 가까운 이웃’이란다.

 

43ㄴ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 *박해(미쎄오)- 어뚱한 말(인간의 뜻, 욕망을 위한 선악의 말)로 주어 헛된 신앙의 삶을 살게 하므로 하느님의 미움을 박게 만드는 것, 박해(迫害)다. *기도(祈禱 프로콤마이) 흘려주다.

이웃 사랑은 큰 계명(誡命)이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이웃은 누구이며, 원수는 누구인가?

 큰 계명의 말씀에서 예수님께 율법교사가 ‘제 이웃이 누굽니까?’ 하고 묻자, 비유(比喩)로 강도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이 율법의 사제, 레위인의 외면으로 그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원수로 생각했던 사마리아인에게 도움을 받는 이야기를 하신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개 추급했다)

 

(루가10,36-37)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율법의 사제, 레위인이 강도(强盜)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 했듯, ‘율법자인 너는 누구에게도 이웃이 될 수 없어. 네가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그분의 이웃으로 자비(慈悲)를 받아야 해’ 하시는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비유하신 것이다. 그렇듯 원수(怨讐)같은 예수님의 이웃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아 제일 먼저 전해 주어야 할 가장 가까운 이웃이 ‘나 자신’인 것이다.

 

오늘 독서(牘書)에서 내 뜻, 욕망을 위해 하느님의 원수로 살았던 ‘아합’이 도리어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를 원수로 부른다.

독서(1열왕21,20-21)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 왜? 인간의 뜻, 욕망을 부린, 그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듯 내 욕망을 부수시는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이가 원수가 된다.

 

(마태10,34)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이 원수 같은 하느님을,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의 ‘흠 투성’이고 ‘사라질 평화’가 아닌 ‘완전한 하늘의 평화’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이웃, 다른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반드시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한다.

 

(요한3,16-17)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세상(원수)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요한4,9-10)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그분께서 우리(원수)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 원수를 위해 외아들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인간의 지각(知覺)으로는 알 수 없는 그 하느님의 사랑을 내가 먼저 흘려 받아, 채워야(믿어야) 이웃에게 흘려 줄 수 있다. 이웃을 살리는 ‘큰 계명의 이웃 사랑’을 할 수 있다. 기도(祈禱) 또한 사람을 완전하게 하는 그 올바른 기도(祈禱)를 할 수 있다.

 

(로마5,10)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 ‘십자가에서 내 죄의 속죄 제물로 죽으신 그 완전한 사랑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지난날 하느님의 원수로 살았던, 더러웠던 그 ‘죄악의 부끄러운 나’를 사랑해야 한다. 곧, 나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사랑, 말씀을 계속 들려주어 옛 죄에 대한 죄의식에 빠지지 않고 완전히 자유하게 하는 그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죄(罪)를 통해서 ‘용서(容恕), 생명(生命)’의 하느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적의 부끄러웠던 나를 통해,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마르2,17)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 하느님의 ‘해, 비’는 모두 우리의 생명인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시는, 완전하게 하시는 사랑으로 모든 이들의 생명의 양식으로 똑같이 내리신다.(이사55,10-11참조)

 

(요한1,1.4) 1 한 처음에 말씀이계셨다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해, 비, 말씀’을 흘려주셨듯이, 이웃에게 말씀을 흘려주는 삶이 완전하게 되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나 자신과 이웃의 죄, 잘못을 용서하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그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말씀을 주는 것이다.

매일, 자주 흘려주어야 한다. 나의 부인(否認), 버림, 비움으로 받아들이면(담으면) 완전하신 분 안에서 완전한 사람이 된다.

 

(골로1,28)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요한1,12-13)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옛것은 지나갔습니다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48절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세상 어둠()에서 건져 내시어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게하신 아버지의 마음사랑을 굳게 지켜 이웃에게 흘려주는 신앙을 살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6년 06월 16일 화요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율법의 핵심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도인간이 그 계명의 뜻을 축소하여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라고 암묵적으로 해석한 부분을 정면으로 깨뜨리십니다.

본디 레위기의 문맥은 원수를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웃의 범위를 친구, ‘자기 사람으로 점점 좁혀 왔지요.

그러면 사랑은 이해관계에 따른 윤리가 되어 그 이해관계에서 밀려난 사람을 배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라는 낱말을 민족이나 정치의 범주로 제한하시지 않고개인의 삶에서 나를 적대시하는 존재 전체로 확장하십니다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라고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이르십니다.

기도는 악과 원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선으로 악을 압도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의 바탕을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품으신 선의에서 찾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분의 차별 없는 자비가 곧 하늘 나라의 질서입니다.

세리나 이방인도 자기편은 사랑합니다그러나 하늘 나라의 질서를 따르는 제자는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나옵니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는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기보다하느님의 선의가 친구와 자기 사람을 넘어 모든 사람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경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하느님을 닮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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