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19일 금요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마태6,19-23)
제1독서<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은 다음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2열왕11,1-4.9-18.20)
아하즈야 임금의 1 어머니 아탈야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
2 그러자 요람 임금의 딸이며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살해될 왕자들 가운데에서,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를 아탈야 몰래 빼내어 유모와 함께 침실에 숨겨 두었으므로, 요아스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3 아탈야가 나라를 다스리는 여섯 해 동안, 요아스는 유모와 함께 주님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4 칠 년째 되던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어 카리 사람 백인대장들과 호위병 백인대장들을 데려다가, 자기가 있는 주님의 집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는 그들과 계약을 맺고 주님의 집에서 맹세하게 한 다음, 왕자를 보여 주었다.
9 백인대장들은 여호야다 사제가 명령한 대로 다 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안식일 당번인 부하들뿐만 아니라 안식일 비번인 부하들까지 데리고 여호야다 사제에게 갔다.
10 사제는 주님의 집에 보관된 다윗 임금의 창과 방패들을 백인대장들에게 내주었다.
11 호위병들은 모두 무기를 손에 들고 주님의 집 남쪽에서 북쪽까지 제단과 주님의 집에 서서 임금을 에워쌌다.
12 그때에 여호야다가 왕자를 데리고 나와, 왕관을 씌우고 증언서를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은 다음, 손뼉을 치며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13 아탈야가 호위병들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백성이 모인 주님의 집으로 가서 보니, 임금이 관례에 따라 기둥 곁에 서 있고 대신들과 나팔수들이 임금을 모시고 서 있었다.
14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는 가운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서 아탈야는 옷을 찢으며, “반역이다, 반역!” 하고 외쳤다.
15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가 군대를 거느린 백인대장들에게 명령하였다. “저 여자를 대열 밖으로 끌어내시오. 그를 따르는 자가 있거든 칼로 쳐 죽이시오.” 여호야다 사제는 이미 “주님의 집에서 그 여자를 죽이지 마라.” 하고 말해 두었던 것이다.
16 그들은 그 여자를 체포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탈야가 왕궁의 ‘말 문’으로 난 길에 들어서자, 거기에서 그 여자를 죽였다.
17 여호야다는 주님과 임금과 백성 사이에, 그들이 주님의 백성이 되는 계약을 맺게 하였다. 또한 임금과 백성 사이에도 계약을 맺게 하였다.
18 그 땅의 모든 백성이 바알 신전에 몰려가 그것을 허물고, 바알의 제단들과 그 상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었다. 그들은 또 바알의 사제 마탄을 제단 앞에서 죽였다. 여호야다 사제는 주님의 집에 감독을 세웠다.
20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였다. 아탈야가 왕궁에서 칼에 맞아 죽은 뒤로 도성은 평온해졌다.
<화답송>시편132,11.12.13-14.17-18(◎13) ◎ 주님은 시온을 택하시고 당신 처소로 삼으셨네.
○ 주님이 다윗에게 맹세하셨으니, 돌이키지 않으실 약속이로다. “나는 네가 낳은 아들을, 너의 왕좌에 앉히리라.” ◎
○ 너의 아들들이 내 계약을, 내가 가르치는 법을 지킨다면, 그들의 아들들도 길이길이, 너의 왕좌에 앉으리라. ◎
○ 주님은 시온을 택하시고, 당신 처소로 삼으셨네. “이곳은 길이 쉴 나의 안식처, 내가 원하였으니 나 여기 머물리라.” ◎
○ 거기서 다윗 집안에 뿔이 돋게 하고, 나의 메시아에게 등불을 들려 주리라. 그의 원수들은 수치의 옷을 입지만, 그의 머리 위에는 왕관이 빛나리라. ◎
복음<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19-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제1독서(2열왕11,1~4.9~18.20)
"그 무렵 아하즈야 어머니 아탈야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 왕족을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요람 임금의 딸이며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살해될 왕자들 가운데에서,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를 아탈야 몰래 빼내어 유모와 함께 침실에 숨겨 두었으므로, 요아스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아탈야가 다스리는 여섯 해 동안, 요아스는 유모와 함께 주님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칠 년째 되던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어 카리 사람 백인 대장들과 호위병 백인대장들을 데려다가, 자기가 있는 주님의 집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는 그들과 계약을 맺고 주님의 집에서 맹세하게 한 다음, 왕자를 보여 주었다." (1~4)
열왕기 하권 1~13장은 엘리사 예언자를 중심으로한 분열 왕국 중반기의 역사를 다룬다. 그 가운데 열왕기 하권 1~10장은 열왕기 상권 19장 15~18절에 기록된 엘리야의 예언대로 아합 왕가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기까지의 북부 이스라엘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며, 남부 유다에 대해서는 단지 결혼으로 맺어진 아합 왕가와 관련된 사건들만을 다루었다.
특히 열왕기 하권 9장과 10장은 북부 이스라엘 제10대 왕 예후가 반란을 일으켜 북부 이스라엘의 왕 요람(9,24)뿐 아니라 남부 유다의 왕 아하즈야(9,29)와 아합의 처 이제벨(9,11)과 아합의 칠십 왕자(10,9)와 아하즈야의 형제 마흔두 명(10,14) 및 모든 잔당들을 숙정한 내용(10,17; 10,25)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에 이어지는 열왕기 하권 11장은 예후의 혁명을 통한 아합 왕가에 대한 심판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남부 유다의 역사로서 남부 유다의 제7대 왕 아하즈야의 모친이자 아합의 딸인 아탈야가 다윗 왕가에 대한 반역을 일으켜 남부 유다를 차지한 사건 (B.C.841~845년)을 기록하고 있다.
아탈야의 반역과 왕자 학살 사건은 지금까지 다윗 가문이 아합 왕가와 결혼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2역대18,1) 우상 숭배라는 범죄에 빠져든 데에 따른 하느님의 징계의 결과였다. 반면에 자신의 모친 이제벨과 비슷하게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아탈야의 죽음은 다윗 왕가에 우상숭배를 도입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형벌이었다(11,16).
그러나 아탈야를 통해 끔찍한 비극을 겪게 하시는 심판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여호야다 사제를 통하여 아하즈야의 숨겨둔 아들 요아스를 구원하여 다시금 다윗 가문을 잇게하는 은총을 베푸셨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다윗과 맺은 계약인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자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7,16)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또한 이 은혜는 "한 지파는 그의 아들에게 주겠다. 그리하여 나의 종 다윗에게 준 등불이 내 앞에서, 내 이름을 두려고 뽑은 도성 예루살렘에서 언제나 타오르게 하겠다."(1열왕11,36)라는 말씀과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종 다윗을 생각하시어, 유다를 멸망시키려고 하지는 않으셨다. 일찍이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영원히 등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2열왕8,19)라는 말씀의 약속을 주 하느님께서 지키신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예후 혁명 이후 남부 유다의 비극적 역사와 극적 회복을 묘사하고 있는 열왕기 하권 11장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열왕기 하권 11장 1~11절은 남부 유다의 아탈야가 아들 아하즈야의 죽음을 계기로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왕자들을 모두 숙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학정을 저지르는 내용을 다루고 있고, 열왕기 하권 11장 12~21절은 여호야다 사제의 주도로 요아스가 왕으로 즉위한 것과 온 국민의 참여를 통하여 종교개혁이 단행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본문에서 아하즈야의 어머니로 소개된 '아탈야'는 북부 이스라엘 제7대 왕 아합과 이제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서 남부 유다 제5대 왕 여호람의 아내가 된 여자였다.
이처럼 아탈야가 남부 유다왕 여호람과 결혼하게 된 것은 북부 이스라엘의 아합과 남부 유다의 여호람이 군사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하여 행한 정략적인 혼인 정책 때문이었다(1열왕22,2~4; 2역대18,1).
아탈야는 모친 이제벨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아 매우 포악하였고, 남편 여호람과 아들 아하즈야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남부 유다에 바알 우상 숭배를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아탈야'라는 이름은 '위대하다' 내지는 '존귀하다'라는 뜻의 앗수르어 '아탈'과 하느님을 지칭하는 '야'(ya)가 결합된 것으로 '하느님은 존귀하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북부 이스라엘 우상 숭배의 원흉인 아합과 이제벨의 딸이 이러한 신앙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부모의 성향을 물려받아 하느님 대신에 바알을 숭배하는데 앞장 선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 무렵 아하즈야 임금의 어머니 아탈야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
아탈야가 머물고 있는 남부 유다의 예루살렘과 아하즈야가 죽은 북부 이스라엘의 이즈르엘(2열왕9,15.25)은 상당히 먼 거리였으므로 아탈야가 아하즈야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을리가 만무하다.
따라서 아탈야는 단지 아하즈야와 함께 있던 병사들을 통해 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듣다' 라는 청각적 동사 대신에 '보다'라는 시각적 동사를 사용하여 사건의 묘사에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새 성경에서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자기 아들을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로 되어 있다. 즉 이어지는 '일어나'('와타쿰'; wathaqum; arose)동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이것은 실제로 아탈야가 일어나는 행동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개시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아탈야가 남부 유다의 왕이며 아들이었던 아하즈야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그것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켰음을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이런 표현들을 통해 아탈야는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이며 치밀하게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
아탈야가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행한 일이다. '왕족'으로 번역된 '제라으 함마믈라카'(zerah hammamlakah)는 '왕의 씨'를 말한다.
'씨'(seed)의 뜻을 가지고 있는 '제라으'(zerah)는 '뿌리다','퍼뜨리다'라는 뜻의 동사 '자라으'(zarah)에서 유래된 명사로서 본문처럼 사람과 관련해서 사용될 경우에는 '자손','인척'을 가리킨다.
또한 '왕의'에 해당하는 '함마믈라카'(hammamlakah)는 문자적으로 '그 왕족'을 뜻하는 단어로서 다윗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남부 유다의 왕권을 지칭한다.
병행 구절인 역대기 하권 22장 10절에서는 '유다 집안의 왕족'이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왕족'(왕의 씨)이라는 표현은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 다윗 가문의 모든 자손'을 가리킨다.
아하즈야의 형제들은 과거 아라비아 사람들에 의해 모두 살해되었고(2역대22,1), 아하즈야의 조카들도 예후에 의해 모두 살해되었기 때문에(2열왕10,13~14), 여기서 말하는 '왕족'은 아하즈야의 직계 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본문은 아탈야가 자신의 친손자들까지도 제거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그녀가 친손자들까지도 비정하게 죽인 이유는 당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유지하며, 더 나아가서는 북 왕국에서 몰락한 아합 왕가를 남 왕국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아들 아하즈야가 즉위하면서부터 그의 배후에서 권력을 휘둘렀는데 (2열왕8,26~27; 2역대22,3) 그런 그녀에게 아들의 죽음은 자신의 권력의 기반이 흔들리는 큰 위기로 여겨졌을 것이다.
따라서 왕권이 교체되어 자신의 권력마저 붕괴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기회에 몰락한 아합 왕가의 중흥을 도모하기 위하여 왕위에 오를 만한 인물들을 미리 철저히 제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손자들까지도 무참하게 죽이는 반인륜적인 아탈야의 모습은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사악하고 추해질 수 있는지를 잘 반영해준다.
하지만 '죽이기 시작하였다'(진멸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왓태압베드'(watheabed)의 원형 '아바드'(abad)는 열왕기에서 하느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따르는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가 내려질 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사이므로(2열왕 9,8; 10,19; 13,7 등), 아탈야의 잔악한 행위 뒤에 하느님께서 보고 계심을 암시한다.
따라서 다윗 왕가의 왕권이 끊어질 위기에 이른 이러한 암울한 상황은 계약 아래 있었지만 하느님을 진심으로 섬기지 않는 행동으로 일관했던 남부 유다 왕들의 누적된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자 요람 임금의 딸이며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살해될 왕자들 가운데에서,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를 아탈야 몰래 빼내어'(2)
본문에서 '요람 임금'은 북부 이스라엘의 왕 '요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남부 유다의 제5대 왕인 '여호람'을 가리킨다.
또한 새로운 인물로 소개된 요람 왕의 딸 아하즈야의 누이 '여호세바'는 아탈야의 친딸은 아니며 요람 왕의 다른 부인의 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남부 유다의 제6대 왕 아하즈야의 누이였으며, 여호야다 사제의 아내였다(2역대22,11).
한편, 여호세바가 아탈야를 대적하여 요아스를 숨기고 보호했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후에 요아스와 더불어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여호야다 사제의 아내가 된 점들을 감안하여 볼 때, 다윗의 왕위를 견고케 하시겠다는 다윗 계약(2사무7,16)을 알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이 위험한 일을 감행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다윗 왕조를 보호하기 위한 하느님의 주도적인 섭리가 있었다.
열왕기 하권 11장 2절은 요람 왕의 딸이며 아하즈야 앙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왕자 요아스를 극적으로 구출함으로써, 아하즈야의 아들들 즉 다윗의 후손들을 멸절하려는 아탈야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나타낸다.
한편 여기서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유일하게 다윗 가문에 남겨진 한 사람 요아스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북부 이스라엘 왕가의 운명과 관련해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해준다.
즉 다윗 집에 속한 모든 왕자들이 몰살 당하는 가운데서라도 요아스가 남겨져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은, 이전에 북부 이스라엘에 우상 숭배를 도입하여 하느님을 진노케 한 여로보함의 집과, 그 뒤를 따라갔던 바아사의 집, 그리고 전례가 없는 열렬한 바알 숭배자였던 아합의 집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때, 그 집에 속한 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멸당했던 사실과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당신의 계약(언약)을 지키시는지에 대한 신학적 메시지를 함축한다.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보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하여 땅 위에 쌓은 보물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하여 하늘에 쌓은 보물입니다.
땅 위의 보물은 좀과 녹으로 훼손되고 도둑이 훔쳐 가기도 하는 불완전하고 순간적인 것이지만, 하늘의 보물은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훔쳐 가지도 못하는 완전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 삶 전체를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 삶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현세의 것과 하느님의 것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보물을 찾으려면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투신’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비유를 전하는 마태오 복음 13장 44절에서도 밭에 숨겨진 하늘나라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전합니다.
한편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던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주님을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눈은 몸의 등불이다.”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우리 몸 전체를 비추고 이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재물과 이기적인 욕심에 빠진 탐욕스러운 눈은 우리 몸을 어둡고 병들게 하며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반면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애덕과 나눔으로 가득한 맑은 눈은 우리 몸을 밝고 따뜻하게 하며 주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더욱 충만하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바라며 살고 있는지, 내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내 눈은 어디를 쫓고 있는지 곰곰이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땅에서 나오면 하늘이다.
복음(마태6,19-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 나를 위해 땅에 쌓은 보물? - 사라질 것이다.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 하늘에 쌓은 보물? - 영원한 것이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 마음에 쌓은(담은) 것이 ‘나’라는 말씀이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 빛을 어둠으로 보고 담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창조 하셨다. 모든 창조물은 하는ㅁ의 말씀(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곧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 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을 보물로 간직하면 빛인 것이다. 그런데 보이는 대로 보고 담으면, 땅(욕망)으로 갖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이다. 곧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해야할 세상법이 아니라, 말씀을 먹고 땅에서 죽어 하늘이 되어 하늘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선(善)이고, 선의 상태, 마음이다.
(마태12,35.37) 35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진리)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율법)을 꺼낸다. 37 네가 한 말에 따라 너는 의롭다고 선고받기도 하고, 네가 한 말에 따라 너는 단죄받기도 할 것이다.”
= 진리(피의 새 계약)의 말을 하면 생명이다. 율법(옛 계약)의 말은 심판(審判), 죽음이다.
(마태13,52)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 마음에 담은 성경말씀, 그 안에 옛 것에서 새 것을 깨달으면 보물이 된다는 것이다. 곧 죽음의 옛 계약으로 생명의 새 계약을 깨달으면 보물(寶物), 진리(眞理)다.
*그리스도교(敎)는 이 땅에서 강(强)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진리로 내 마음에 가져 세상에서 없음으로 사라져가는 것이다. 하늘로~~~
진리가 되면 내 말이 없어지게 된다. 내 말이 다른 이에게 걸림돌이 될까봐, 인간은 모든 계명(말)을 법으로 듣기 때문이다. 못 알아듣는 사람들 앞에서는 실(實)없는 사람, 인기 없는 사람이 된다. 참 신앙인으로 보지 않는다.
(이사33,6) 6 그분께서 너의 시대에 안녕(평안)을 주시리라. 지혜와 지식은 풍성한 구원이 되고 주님을 경외함은 시온의 보화가 되리라.
= 하늘의 지혜, 지식, 주님을 경외(敬畏)함이 보물을 갖는 참 부자(富者)다. 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福)받는 땅에 가난한 사람이다. (마태5,3)
(잠언20,15) 15 금이 있고 산호가 많다 하여도 더욱 값진 것은 지식(지혜)의 입술이다.
*지식(知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믿어야할 것’과 ‘믿지 말아야할 것’을 분별(分別)하는 은사(隱事)
(골로2,2-3) 2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복음 본문으로 다시~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자기 배설물로 집을 짓는 것)과 녹이 망가뜨리고(아파니조- 흐릿하게, 못보게)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 좀은 자기의 열심히 쌓는 헛된 의(義)를 뜻한다.
바오로는 배설물을 쓰레기로 표현했다.~
(필리3,5-9) 5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계명)으로 ‘자기 의(義)’를 쌓는 이는 하늘의 의(義)를 도둑질 당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늘의 것을 땅의 것으로 받으면, 하늘을 도둑질 당한 것이니까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從)으로서 사도(使徒)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해서 선택받은 바오로’(로마1,1)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당시 적극적으로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의 모습은 전혀 없습니다. 이제는 스테파노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후에 바오로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보물(寶物)을 쌓던 사울의 모습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바오로는 세상의 허무함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성령 안에서 ‘충만함’을 찾았습니다. 비록 세상이 주는 영화(榮華)를 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영원(永遠)을 추구합니다. 영원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질그릇인 우리는 이미 진리를 보물로 갖은 하늘들임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보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진리로 기쁨의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복음(마태6,19~23)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19)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밝으면 온 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22~23)
'좀'에 해당하는 '세스'(ses; moth)는 의복을 갉아 먹는 해충이다. '녹'에 해당하는 '브로시스'(brosis; rust)는 구리를 부식시키는 푸른 녹을 말한다.
'보물'에 해당하는 '테사우로스'(thesauros)는 '저축하다', '보관하다'라는 뜻의 '티테미'(tithemi)에서 유래했는데, '어떤 물건이 보관되어 있는 곳', '창고', '보배함', '보화'등을 통칭한다.
우리 인간은 육신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기 때문에 '보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을 위하여', '너희를 위하여'만 보물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신다.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영적인 일이 아닌, 이 땅의 일에만 현세의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일에만 집착하여 보물을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시는 말씀이다.
그것은 마치 '좀'과 '녹'이 의복을 갉아먹고 구리를 부식시켜 못쓰게 만들듯이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또한 보물 혹은 재화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말씀에 나오는데로 '도둑들'에 해당하는 '클렙타이'(klleptai)가 가리켜 주듯이, 단수가 아닌 복수의 '도둑들'이 땅에 쌓아둔 재물을 끊임없이 넘보게 되는 불안감과 위기가 있게 된다.
우리 인간의 수명은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대다수 100년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는 태어날 때처럼 '빈손'으로 가고, 그래서 시신을 두르는 수의는 주머니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6장 20절에 나오는데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도 말씀하신다.
이 마태오 복음의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 12장 33절에서는 구체적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행위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타인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성경은 형제들의 부족함과 결핍을 헤아리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선행은 하느님의 응분의 갚음과 상급을 받음을 이야기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잠언19,17)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마태19,21)
우리는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기 위해 가진 것을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와 이웃의 선익을 위해 올바로 쓰고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물질적인 재화이든, 재능(탈렌트)이든, 신앙이든, 은사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우리의 도움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밝으면 온 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마태오 복음 6장 22절과 23절은 사람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를 밝히고 있다.
즉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머물 수 밖에 없으므로, 재물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마음의 눈을 밝혀 온몸을 밝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밝으면'(성하면)에 해당하는 '하플루스'(haplous; good; single)는 건강하다는 뜻이며, 윤리적으로는 '관대하다','너그럽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재물에 대하여 관대하며 인색하지 않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재물의 노예가 되어 저지르는 잘못을 범하지 않고, 비로소 '온몸이 환할 것'이 뜻하는 내용, 즉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선항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는 말이다.
또한 '성하지 못하면'에 해당하는'(나쁘면)에 해당하는 '포네로스'(poneros; bad; evil)는 육체적으로 '허약한'이라는 뜻과 더불어 '악한'이라는 뜻도 있다. 여기서도 형제의 필요를 생각하기보다는 재물에 대하여 집착하고 인색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는 것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인색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마치 어둠속에서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악한 일을 일삼으며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임을 뜻한다.
2026년 06월 19일 금요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 복음은 재물에 대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방향을 묻는 말씀입니다.
“좀과 녹”(마태 6,19)은 당시 현실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이미지였지요. ‘좀’은 값비싼 옷감을 갉아먹고, 그리스 말에서 ‘먹어 치우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녹’은, 곡식이나 금속이 썩고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당시에는 흙벽돌로 집을 지었는데 도둑이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도 덧붙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표현에서 땅의 보화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쌓아 두는 행위 자체가 언젠가는 잃어버릴 운명을 지녔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반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6,20)라는 표현은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성전을 재건한, 이른바 제2성전기 유다 문헌에서 자주 나타나는 사상입니다(토빗 4,8-9 참조).
선행은 하느님께 드리는 보화이며, 마지막 때에 그 보화가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사상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미래의 시간을 향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물으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보물은 다만 소유물을 뜻하기보다 삶의 중심, 곧 욕망의 방향을 뜻합니다.
마음은 자기가 쌓아 둔 것을 향하여 기울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이어지는 눈의 비유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눈이 건강하면 온몸이 밝다는 말은 도덕적 은유이기도 합니다.
유다 전통에서 ‘좋은 눈’은 관대함을, ‘악한 눈’은 인색함과 시기를 뜻하였습니다.
결국 빛과 어둠의 문제 또한 시선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재물을 향하여 고정된 눈은 어두워지고, 하느님을 향하여 열린 눈은 밝아집니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맡길 수는 없지요.
사라질 것들을 너머 마지막까지 붙들 수 있는 가치에 우리 삶을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어둠이 어둠임을 아는 것이 빛이다.
하느님은 어둠을 통해 빚을 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마태6,19-23)
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 오늘은 6장의 결론이다. 1절이 ‘보이는 의로운 일은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니 조심하여라’로 시작하셨다. ‘보이는 것을 위해 보이는 것으로 준비하는 모든 것은 헛된 것이니 조심해라’ 하셨던 것이다. 곧 사람이 자신의 뜻을 위한 열성, 그 자기 의로움을 진리로, 보물로 갖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다.
(이사33,6) 6 그분께서 너의 시대에 안녕(안식)을 주시리라. 지혜와 지식은 풍성한 구원이 되고 주님을 경외함은 시온의 보화가 되리라.
= 하느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이 보물이라는 말씀이다.
(1코린1,30)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2코린4,6-7)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뜻, 말씀, 지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빛, 보물이신 것이다.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독)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 좀은 자신의 배설물로 집을 짓는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스팩들, 자신이 열심히 지킨 자기 의로움까지 모두 자신에게 독이 되는 배설물, 쓰레기로 여겼다.
(필립3,7-9) 7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 율법을 제사와 윤리로 열심히 지킨, 쌓은 그 자기 의로움이 자신을 보호하는 선(善)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독이 되는 배설물 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둑질(카바- 덮어버리다),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로 드러내지 못하고 덮어버리는 것, 가려버리는 것, 하느님을 도둑질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법으로 이해하여 행하고 있는 이들은 이미 도둑질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 안에서 진리를 덮어버린, 도둑질 한 그 거짓말을 듣고 땅의 것으로 보물을 쌓으면 이미 도둑에게 보물을 빼앗긴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이다. 우리가 열심히 성취해야 할 법(法)정도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땅에서 죽고(부인하고) 하늘로 연합이 되어 들어가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선이다. 그래서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너희 마음이다 라는 말씀이다. 그 마음으로 심판이다. 선한 말(보물)을 갖고 있느냐 악한 말(보물)응 갖고 있느냐에 대해 심판 받는다. 어떤 보물을 어디에 갖고 있느냐에 의해 그것은 마음이 되는 것이고, 그 마음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요한5,43-44)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 사람의 영광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원하지 않는 것, 좀, 독이다.
(필립2,21) 21 모두 자기(땅)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습니다.
(골로3,1) 1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옳음)에 앉아 계십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 원문을 직역하면 “몸에 등불은 눈이다. 눈이 성하면 다른 것을 밝혀주는 온전한 몸이다”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 성한 눈, 깨달음(호라우)의 눈이다. 눈으로 보는 단계 - ➀ 옵타노마이- 보이는 대로 보는 것. ② 에이도오- 있으니까 보는데 그것을 껍데기로만 보면 에이돌(우상)이 된다. 곧 예수님을 겉으로만 보아 섬기면 ‘우상 섬김’이다. 십자가와 예수님을 자신의 뜻을 위해 열심히 섬기게 되며 헛된 신앙, 우상이 된다는 것이다. ③ 블랙보우- 눈에 보이는 것을 진짜 내용으로 보기 위해서 만져보고 먹어보는 등, 여러 가지로 시험하는 단계. 그래서 ④ 호라우- 제대로 깨달아 보는 것, 성한 눈이다.
말씀을, 예수님을 어느 단계로 보느냐에 따라 어둠(땅)의 빛이냐 하늘의 빛(진리)이냐가 되는 것이다. 성경을 호라우 그 깨달음의 눈이 아닌 다른 눈으로 100번을 읽고 외우고 필사를 해도 소용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나를 죽이는 좀, 독이 된다. 눈에 보이는 그것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참 뜻, 진리를 깨달았을 때 그를 빛, 진리라고 한다. 그래서 반드시 보이는 것 안에서 보이지 않는 그 내용을 들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묵시21,22-23) 22 나는 그곳(새 하늘)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 보이는 성전으로, 빛으로 보이지 않는 참 성전, 빛이신 하느님(주님)을 깨닫는. 아는 것이 선(善)이다. 그러나 보이는 성전, 빛을 열심히 섬기면 좀, 독이 된다.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보이는 분을 섬기는 신앙이 아닌 보이지 않는 분을 아는, 그 앎을 위한 성한 눈으로 보고 깨닫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 하느님의 진리를 통찰하시어 가르치시며 완성하시는 영원한 보호자 성령님! 저희를 의탁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