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22일 월요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마태7,1-5)
제1독서<주님 앞에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2열왕17,5-8.13-15ㄱ.18)
5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는 사마리아까지 쳐 올라와 그곳을 세 해 동안 포위하였다.
6 마침내 호세아 제구년에 아시리아 임금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잔 강 가 하보르와 메디아의 성읍들에 이주시켰다.
7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8 또한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풍속과 이스라엘 임금들이 만들어 낸 것에 따라 걸어갔기 때문이다.
13 주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와 선견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 경고하셨다. “너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보낸 모든 율법대로 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켜라.”
14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주 저희 하느님을 믿지 않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목을 뻣뻣하게 하였다.
15 그들은 그분의 규정과 그분께서 저희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 그리고 자기들에게 주신 경고를 업신여겼다.
18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크게 노하시어 그들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시니,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
<화답송>시편60,3.4-5.12-14(◎ 7ㄱㄷ) ◎ 주님, 당신 오른팔로 도우시고 저희에게 응답하소서.
○ 하느님, 당신은 저희를 버리고 부수셨나이다. 분노를 터뜨리셨나이다. 저희를 회복시켜 주소서. ◎
○ 당신이 땅을 뒤흔들어 갈라놓으셨나이다. 흔들리나이다, 그 갈라진 틈새를 메워 주소서. 당신 백성에게 모진 시련을 겪게 하시고, 술을 먹여 어지럽게 하셨나이다. ◎
○ 하느님, 당신이 저희를 버리지 않으셨나이까? 하느님, 당신은 저희 군대와 함께 출정하지 않으시나이다. 저희를 적에게서 구원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되옵니다. 하느님과 함께 우리가 큰일을 이루리라. 그분이 우리 원수를 짓밟으시리라. ◎
복음<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7,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제1독서 (2열왕17,5-8.13-15ㄱ.18)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주 저희 하느님을 믿지 않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목을 뻣뻣하게 하였다." (14)
열왕기 하권 17장 3절에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많은 예언자와 선견자들이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 백성에게 하느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이어지는 열왕기하권 17장 14절은 단순히 율법을 주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많은 선견자까지 보내어 거듭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듣지 않고 완고하게 거부하였음을 보도하고 있다.
그래서 열왕기 하권 17장 13절의 '모든 율법대로 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켜라'는 17장 14절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17장 14절의 서두에 나오는 '않고'로 번역된 '웰로'(wello)는 접속사 '와우'(wau)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부사 '로'(lo)가 결합된 형태이며, 이어지는 '그들은 듣지'로 번역된 '샤메우'(shameu)는 완료형 동사이다.
이와같이 부정 부사 '로'(lo)와 완료형 동사가 사용된 것은 반복되는 하느님의 회개의 요구에 대해 그들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거부해 왔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17장 15절의 서두에 위치한 접속사 '와우'(wau)가 그 전후 문장이 각각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회개 요구와 이스라엘의 불순종이라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러나'로 번역되었다.
한편 그들은 하느님의 회개의 명령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목을 뻣뻣하게 하였다.
'목을 뻣뻣하게 하다', '목을 굳게 하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과 관련해서 인간의 고집, 완악함, 교만 등을 나타내는 성경의 관용적인 표현이다 (탈출34,9; 신명9,6; 2역대30,8).
특히 열왕기 하권 17장 14절에서는 목이 뻣뻣한 것을 '그들의 조상들'의 모습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들의 조상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인도하였던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해 불순종으로 일관했기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
따라서 이들과 마찬가지로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스스로 목을 뻣뻣하게 한 까닭에, 하느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은 자'로 표현된다. 여기서 '믿다'로 번역된 '헤에미누'(heeminu)는 '지속하다', '받치다', '머물다'는 의미를 갖는 '아만'(aman)의 사역 능동형이다.
'아만'(aman)이 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되면 '의지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열왕기 하권 17장 14절은 출애굽1세대가 주님과 그의 대리자인 모세를 신뢰하지 않고 하느님의 계획에 자신들을 맡기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후손인 북부 이스라엘도 예언자와 선견자들의 권고와 하느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거기에 자신들을 맡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느님의 약속을 저버린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좌우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하느님께 단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들을 단죄하는 그대로 우리를 단죄하실 것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에서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시며 모든 이를 구원에 초대하시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기에, 우리 또한 이웃을 판단하거나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때로는 이웃과 갈등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쩌다 이웃의 부족한 모습이 도드라져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끌, 먼지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커다란 기둥,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이를 꾸짖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형제’라는 낱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께 세상 모든 사람은 ‘타인’이 아닌 ‘형제’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아주 작은 흠은 쉽게 찾으면서도 자신의 큰 허물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형제에게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하는 기막힌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위선자야!” 하시며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한 다음, 맑고 따뜻한 눈으로 형제들을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닮아 주변의 형제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자주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전 일을 마치고, 또 잠들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청하고 매 순간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자녀로 살아갈 것을 새롭게 다짐해 봅시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십자가를 우상의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니겠지요.
(마태 7,1-5)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 성경 말씀을 제사와 계명의 그 율법으로, 그리고 선과 악의 도덕과 윤리로 보게되면 반드시 판단하게 됩니다.
그 선악의 법으로 먹으면 아담 처럼 자신부터, 이웃까지 판단하게 되는 것이지요.
(로마5,12-16. 18) 1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은총)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거져) 내렸습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은총)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는 다릅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 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은총)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십자가의 대속)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로마3,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말씀(예수)을 내 뜻을 위한 제사와 윤리로 보면 심판으로, 그러나 하느님의 뜻인 대속의 십자가, 그 하늘의 진리로 받으면 무죄판결을 받습니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눈으로 보다의 4단계. 말씀을~ ➀. 눈에 보이는대로 보는 것.(옵타노마이) 그래서 ② 내 뜻을 만족시켜줄 능력의 힘으로 우상 삼아 보는(에이돈) 그리고 ③ 말씀의 뜻을 깨닫기 위해 여러 과정을 겪는 훈련의 단계 (블랙보우) 그래서 ④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는 단계(호라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성경을문자 그대로 보아 내 뜻을 만족시켜줄 사람의 규정과 교리, 계명으로 갖어버리면 내 눈에 하느님의 뜻을 헛되게 하는 들보가 되는 것입니다.(마르7,7 티토1,14참조)
(지혜13,1) 1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 사람의 눈으로는 좋게는 보면서 하느님의 뜻으로 보는 눈이 없는 그 무지의 들보를 빼내는 방법은 ‘옵타노마이’로 ‘아이돈’의 상태인 그 욕망의 나를 버리고 깨달음의 과정 ‘블랙보우’를 통해 ‘호라우’, 하느님의 듯인 진리로 깨달아 돌아오는 겁니다.
(루가9,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대속하신 내 십자가임을 믿는다면,~
(골로2,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죄)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 내 뜻을 위해 십자가에 경배를 한다면 십자가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열왕하 18,4 참조)
십자가는 죄의 용서, 구원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 진리의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요한3,18) 아들(진리)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5,24) 내가 진실로진실로(거듭해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진리로)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히브10,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아멘.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마태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가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1~3)
마태오 복음 6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이 일상생활 가운데서 추구해야 하는 자신 스스로의 경건과 의로움과 관련된 규정을 다루었다면, 마태오 복음 7장 1~6절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하는 대인 관계의 규정을 다루고 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크리네테'(me krinete; do not judge)는 단도직입적인 매우 강력한 의미를 지니는 명령문이다.
여기서 '심판하지'로 번역된 '크리네테'(krinete)는 복수 2인칭 현재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명령형은 생활 습관이나 기준을 새롭게 제시할 때 사용되는데,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계속해 왔던 심판하는 일을 그만두고, 심판을 금하는 새로운 생활 기준을 가지라는 말이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율법이나 자신들이 만든 계율로 이웃을 단죄하는 풍조가 만연했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판 혹은 비판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정당한 판단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 금하는 심판(비판)은 유익하고 지혜로운 선악의 구별이 아니라 이해심이나 동정심없이 상대방을 근거없이 헐뜯는 것을 말하며, 절대 공의(公義)로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교만한 태도를 말한다(로마2,1~3; 야고4,11.12).
그리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형제를 심판하는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사실은 마태오 복음 7장 1절의 '심판을 받다'에 해당하는 '크리테테'(krithete; you are judged)가 수동형이라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이 단어에서 동작을 받는 대상은 복수 2인칭 으로서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자들이지만, 비판을 하는 주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불공정하게 심판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단죄하시는 분이 바로 공의로우신 하느님이시라는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7장 2절은 마태오 복음 7장 1절의 보충설명이며 재강조의 성격을 가진다.
여기서 '심판받고'에 해당하는 '크리테세스테'(krithesesthe; yo u will be judged)의 원형 '크리노'(krino)는 사사로운 단죄나 헐뜯는 것을 가리키지만, 판결하고 언도하는 사법적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그 되로 받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메트레테세타이'(metrethesetai; it will be measured)의 원형 '메트레오'(metreo)는 양이나 길이를 재는 것을 가리키는 '메트론'(metron)에서 유래하여 물건 거래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경제적 용어이다.
이처럼 마태오 복음 7장 2절은 사법적 용어와 경제적 용어를 사용하여 이웃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자는 동일한 처우를 받게 될 것을 강조한다.
두 단어가 모두 수동태로 사용되어 상대방을 향한 심판과 되질함이 하느님에 의해 자신에게 되돌려질 것을 보여 준다.
한편 마태오 복음 7장 3절은 '형제의 눈 속'과 '네 눈 속', '티와 들보', 그리고 '보면서'와 '깨닫지 못하느냐'가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는 기교적인 문장이다.
'티'에 해당하는 '카르포스'(karphos; mote; speck)는 '시들다'는 뜻을 가진 '카르포'(karpho)에서 유래하여 지푸라기나 왕겨 등을 뜻한다.
그리고 '들보'에 해당하는 '도코스'(dokos; the beam; the plank)는 '받치다', '지탱하다'는 뜻이 있는 '데코마이'(dechomai)에서 유래하여 건물을 받치는 기둥, 재목 또는 서까래를 뜻한다.
타인의 조그마한 결점을 상징하는 '티'와 자신의 큰 허물을 상징하는 '들보'라는 서로 대조되는 단어를 대구시키는 과장법을 통해 교훈이 전달된다.
예수님께서는 타인의 작은 도덕적 잘못이나 교리적 오류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예리하게 지적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는 더 큰 잘못, 즉 마치 들보와 같은 결함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자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들보와 같은 결함은 자신이 가진 죄악을 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와 형제에 대하여 사랑이 없는 가혹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7장 1절과 2절에서는 동사가 복수 2인칭으로 사용된 것과는 달리 마태오 복음 7장 3절에서는 동사가 단수 2인칭으로 사용된 것이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7장 3절에서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 개개인이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지적하는 심정으로 단수 2인칭을 사용하신 것이다.
2026년 06월 22일 월요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
이 명령은 산상 설교에서 “걱정하지 마라.”(6,25)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걱정이 미래를 향한 불안이라면, 심판은 다른 이를 향한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심판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 ‘크리노’는 법정의 판결보다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하여 성급히 결론 내리는 가벼운 태도를 가리킵니다.
야고보서는 이런 심판을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는 행위로 보고 꾸짖습니다(4,11-12 참조).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마태 7,2).
고대 유다 전승에도 “사람이 헤아린 그 잣대로 그 또한 헤아림을 받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판의 저울이 인간의 손에 있는 듯 보이지만, 마지막으로 그 저울을 가늠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심판하는 그 잣대는 사실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들추어냅니다.
심판의 시작은 나의 밖을 겨누지만, 그 끝은 결국 제 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티와 들보의 비유는 남을 판단하는 우리의 옹졸함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교정하는 자의 어설픈 폭력성을 향합니다.
훈계는 사랑의 행위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훈계는 다른 이에게 폭력이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이르십니다.
다른 이의 흠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자기 안의 갈라진 틈은 어둠 속에 숨기는 것이 우리의 민낯이지요.
다른 이를 판단하고 심판할수록 우리의 어둠은 더욱 짙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의 어둠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일깨우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형제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먼저 善惡의 法을 빼내어라
(마태7,1-5)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 심판의 말을 생각지도 이웃에게 전하지도 말라는 말씀이다.
공부하자~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눈의 들보가 무엇일까? 자신 안에 들어있는 욕망(慾望)이다.
(창세2,16-17)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 하느님께서 세우신 나무를 선악(善惡)으로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하셨다. 나무는, 우리(쓴물-죄인)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인 나무 하나다.(탈출15,25) 곧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신, 그래서 깨끗한 의인으로 재창조하시는 구원의 새 계약인 십자가(十字架) 나무다.
*계약(契約, 스타오로스)- 기둥, 나무를 뜻한다. 악(惡, 죄)을 대속하여 생명을 주시는 그 진리의 나무(새 계약의 말씀)를 자신의 뜻, 욕망을 위해 선악의 법으로 먹어 버리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와는 그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다(죽인 것)
(창세3,4-5)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 하느님의 뜻을 적대하는 뱀, 사탄이다. 그 하느님처럼 선악의 판단을 인간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유혹(誘惑)이다.
(창세3,6) 6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 ‘하느님처럼,’ 의 그 거짓된 말(유혹)을 듣고 쳐다본 눈, 욕망의 눈이다. 욕망이 들어있는 그 위선(僞善)의 눈, ‘들보’다.
그 선(善), 악(惡)의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여 본다. 자신부터 판단한다. 선악의 눈으로 보니 “어? 나 부끄러운 사람 이었네” 이렇게....
(창세3,7) 7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 알몸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으니까.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알몸을 부끄러운 죄로 스스로 판단했고,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까지 만들어 입었다.
*두렁이(하고르)는 띠로 진리를 뜻한다. 선이 악을 대속해서 생명을 주는 그 창조주의 진리를 피조물인 인간이 선과악의 판단으로 스스로 만들어 입은 그 자신의 열심(의)을 진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 창조주 하느님의 자리에 앉은 교만, 큰 죄다.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말씀을 도덕과 윤리의 선악의 말로 먹고, 모든 사물(사람),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현상)들 까지 그 선악의 눈으로 보면서 이웃에게 전한다면 반드시 그 선악의 판단, 심판으로 자신도 죽고 다른 이도 희망이 없는 심판으로 죽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선악의 판단을 할 수 없다. 뱀(악)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 악을 알아야 선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느님께만 선이 있고, 인간은 모두 악이다.> 죄를 알아야 하늘의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목적인 하느님께 영광 드림이 마음으로부터 진실된 감사(感謝)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2코린5,15) 15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로마14,13) 13 그러니 더 이상 서로 심판하지 맙시다. 오히려 형제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 선악의 말, 인간의 계명, 사람의 규정과 교리가 구원의 장애물, 걸림돌이다.(마태15,9 티토1,14참조)
(1코린4,3-5) 3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 어둠 속에 숨겨진 마음속 생각, 속셈을 칭찬 하신다?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속셈, 욕망, 그 모든 것이 죄(罪)임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그 죄악들을 대속하신 십자나무, 그리스도의 피, 그 새 계약으로 깨끗이 씻어 용서하시고 ‘보시니 좋다’ 칭찬하신다는 말씀이시다.
그 모든 일의 과정을 하느님의 말씀이 주관하시며 이끄신다.(히브4,12참조)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의 진의(眞意)인 것이다.
(마태6,34)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창세12,2-3) 2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 아브람이 받은 복(福)은 하늘의 생명이며 그에 대한 믿음(信)이다. 하느님께서 “떠나라”하신 땅으로 아브람이 떠날 때 그는 하늘의 복에 대한 믿음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75세까지 자식이 없었기에 그 자식(복)을 얻을까 해서 떠난 것이다. 그랬던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만들어(이끌어) 가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그렇듯 하느님께서 우리 삶 전체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통해 선, 구원을 이루신다.(로마8,28참조)
그래서 우리에게 악으로 생각되는 모든 슬픔, 고통, 시련 들까지 선, 구원의 재료가 되기에 그 악이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로마5,20참조) 그러나 그 악에 멈춰 있다면 곧 예수님의 십자가 그 새 계약의 피로 받는 용서, 의로움을 모르고 그 죄로 계속 힘들어 하며, 계속 스스로의 열심히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이 진짜 악(惡), 죄(罪)다.
그러니 육의 욕망을 위한 내 눈에 들어있는 선악의 말, 그 들보를 버리고, 십자가의 복음, 그 하늘의 덮으심, 대속, 그 진리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봐야 그의 티끌(죄)을 진리의 복음, 새 계약의 말씀으로 빼내어 줄 수 있는 것이다.
☨ 하늘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어 구원을 완성하신 천주의 성령님 감사 하나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