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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복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날] 내 이름으로 모인 곳 (마태18,19ㄴ-22)

작성자로마노|작성시간26.06.22|조회수1 목록 댓글 0

2026년 06월 25일 목요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날내 이름으로 모인 곳 (마태18,19-22)

 

 

 

1독서<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30,1-5)

모세가 백성에게 1 “이 모든 말씀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화답송>예레31,10.11-12ㄱㄴ.13ㄷㄹ-14(10◎ 주님흩어진 당신 백성을 모으소서.

○ 민족들아주님의 말씀을 들어라먼 바닷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지켜 주시리라.” 

○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사제들에게는 기름진 것을 배불리 먹이고내 백성을 내 선물로 가득 채워 주리라

 

2독서<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4,29-5,2)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복음<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18,19-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제1독서(신명30,1-5)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낸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 (1-3)

 

앞 장 에서는 계약을 위반한 자에게 닥칠 저주를 선포한 이후, 여기에서는 회복의 국면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을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절 다시 번역하면 '내가 너희 앞에 둔 그 축복과 그 저주의 바로 이 모든 일들이 너희에게 찾아온다면' 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앞장까지의 내용 속에서 주로 다룬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선포였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먼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데까지 이르는 비참한 상황이 이루어지는  미래의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때로는 하느님께 순종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전국가적 으로 하느님을 배반하여 저주를 당한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사가, 모세의 설교 가운데 이미 등장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로 번역된 '하세보타 엘 레바베카'(hashebotha el lebabeka)에서 '하세보타'는, '돌이키다' 란 뜻을 가진 '슈브'(shub)동사의 사역형 완료 2인칭으로서, '네가 다시 돌이키다' 라는 뜻이다. 원문은 사역형을 사용해서 능동적으로 곰곰이 생각하여 기억해 내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슈브' 동사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로부터 돌이켜 배반할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여기 언급된 마음의 돌이킴은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배반과 대조되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단어가 다음 절에서도 사용된 것을 볼 때에, 본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회개에 따른 불신앙으로 부터의 회복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으로 번역된 '힛디하카'(hidihaka)는 '몰아내다'란  뜻을 가진 '나다흐'(nadah)동사의 사역형에 2인칭 단수 목적격 접미어가 붙은 말로서, '그가 너를 내몰았다' 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몰아낸 곳은 '콜 학고임'(kol hagoim) 즉 '모든 민족들' 이다.

여기에서 '민족들'(나라들) 즉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은 장차 이스라엘을 침공함으로서 그들에게 포로됨의 고통과 갖은 핍박을 주게 될 이방 국가가, 단 한나라에 그치지 않을 것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멸망당하고, 그 땅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흩어지게 되었으며(B.C.722년), 남왕국 유다 역시 바빌론의 침략을 받아 3차에 걸쳐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어(B.C.605년 /B.C.597년 /B.C.586년)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돌아와서'로 번역된 '샤브타'(shabtha)는 '되돌아가다'란 뜻을 가진 '슈브'(shub) 동사의 완료형 2인칭이다. 앞절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단어가 가리키는 바는 불신앙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어 뒤에서 이 단어를 보완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쓰이는 '들으면' 으로 번역된 '샤마타'(shamatha)는 문자적으로 '네가 듣다'(순종하다)이다. 이러한 표현은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며, 그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회개와 그에 따른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분의 말씀을' 번역된 '베콜로'(beqollo)에서 일반적으로 '말씀'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명사 '따바르'(dabar) 대신에, 말씀의 내용보다는 소리를 발하는 것 자체를 가리키는 '목소리'라는 뜻의 '콜'(qol)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 말씀의 현장감과 생동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서,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에게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임을 알려준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에서, '하는 대로' 번역된 '케콜'(kekol)에서 '콜'(kol)은 '모든'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케콜'은 '모든 것을 따라서' 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것은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한 모든 것' 이다.

 

신명기 29장 28절에 나온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들어야 할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내 주신 율법의 모든 말씀 것이다. 또한 포로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들어야 하는  말씀은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으로 나타냄으로써, 미래의 세대들이 들어야 할 말씀과 오늘 전하는 말씀을 일치키셨는데, 이것은 비록 많은 세월이 지난 그때라 할지라도, 오늘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변함이 없을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러한 말씀의 항구성을 나타내기 위해 '너희에게 명령하는'으로 번역된 '메차웨카'(metsaweka)에는 '명령하다'는 뜻을 가진 '차와'(tsawa)동사의 분사형이 쓰였다. '히브리어에서 분사형은 그 행동이 끊임없이 계속됨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우베콜 나프셰카'(bekol lebobka wubekol naphscheka)는 신명기 4장 29절과 6장 5절에도 언급된다.

여기서 '뻬'(be)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 가지고' 란 뜻이다.  또한 각각의 '뻬'(be)에 붙어 있는 '모든 '이란 뜻의 '콜'(kol)은 수단이 될 수 있는 대상의 최상 혹은 최대의 상태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말 위에는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수단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당사자의 것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다른 사람에 의해 주입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너의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최선의 정신을 가지고' 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레바브'(lebab)는 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란 뜻이며, '마음을 다하고'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너의 모든 중심을 다하여'라고 하는 것이 원어적 의미를 살린 번역이 된다.(with all your heart).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知,意,情)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서, 한마디로 '(한사람의)인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부분이 없이, 완전히 드러낸 상태에서 진실하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정신'으로 번역된 '나프셰카'의 원형 '네페쉬'(nepesh)는 일반적으로 '영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뻬콜 나프셰카' '너의 온 영혼을 다해'(with all your soul)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지녀야 할 가장 귀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자기 영혼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요한4,24)

 

참고로, 신명기 6장 5절의 '힘'으로 번역된 '메오데카'(meodeka)의 원형 '메오드'(meod)를  더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메오드'는 '넘치는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이 단어를 '힘'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with all your strength(might)>,'그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넘치는 활동력'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즉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관념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의 모습과 행동등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종합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되, '전심, 전영, 전력'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너희의 운명'으로 번역된 '셰부테카'(shebutheka)는 '포로로 잡히다'는 의미를 가진 '샤바'(shaba) 동사에서 유래한 '셰부트'(shebuth)에 2인칭 단수 소유격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서, '너의 포로됨'(your captivity ; your fortunes)이라는 뜻이다. 즉 이 단어는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포로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방 민족에 포로되어 있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계약(언약) 백성의 신분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최정훈 바오로 신부)

 

해마다 6월 25일에 한국 교회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 전쟁을 기억하며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우리 민족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이 땅에 평화와 일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무슨 전쟁이냐고 물을 수 있지만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스라엘-하마스 전쟁미얀마 내전 등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평화를 이룩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많은 이가 상대를 누르고 자신을 지킬 힘이라고 생각하지만그것은 그리스도의 방식이 아닙니다.

참평화는 용서와 화해로 이루어집니다.

힘은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2014년 유럽에서 테러가 일어났을 때그 테러에 대응하도록 주요 명소에 군인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는 테러를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었지만도심에서 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은 오히려 긴장과 불안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힘에 대한 더 큰 힘의 대응은 평화를 가져오기보다 더 큰 긴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힘의 대결이 지속되는 한참평화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상황도 그렇습니다북한은 미사일을 쏘며 힘을 과시하고남한은 군사 연합 훈련으로 이에 대응합니다.

더 큰 힘으로 서로 위협하는 이 상황에서 참평화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실천할 방식을 제시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입니다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본받아형제의 죄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바탕으로 서로 화해하고대화로써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우호적인 태도와 그렇게 쌓인 신뢰가 참평화를 이루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복음 (마태18,19ㄴ-22)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22)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해당하는 '아페소'(apheso; I forgive)의 원형 '아피에미'(aphiemi)는 '~으로부터'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보내다', '가게 하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 '히에미'(hi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는 '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아내와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는 뜻에서 '이혼하다'는 용례로 사용되었고(1코린7,11), 또한 숨이 완전히 떠나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용례로 사용되며(마태27,50), 그리고 채권자로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탕감하다'는 용례로도 사용된다(마태18,30).

그러니까 '아피에미'(aphiemi)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것은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을 가리킨다.

 

한편,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타키스'(heptakis; seven times)는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셰바'(sheba)와 마찬가지로, 근동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제7일에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제7년은 거룩한 안식년으로 지켜졌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거룩'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에 피를 일곱 번 뿌린 사실과(레위16,11이하) 관련해 볼 때 이 숫자는 죄 용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숫자인 '7'을 염두에 두고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고 볼 수 있다.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도메콘타키스 헵타'(hebdomekontakis hepta; seventy-seven times)에서 '헵도메콘타키스(hebdomekontakis; seventy times)는 '70'을 의미하며, '헵타'(hepta)는 '7'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숫자가 합쳐진 이 표현은 해석상 다소 문제가 있다. 이것을 '490'(70×7)으로도 볼 수 있고, '77'(70+7)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용도로 '헵도메콘타키스 헵타'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490'이나 '77'이라는 특정한 숫자의 크기에 의미가 있지 않다.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70'과 '7'이란 숫자를 겹쳐서 사용한 것이다.

  

 

 

 

 

6월 25일 수요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마음을 모아”(마태 18,19) 청하면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이며 기쁨인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청하면 하늘에 계신”(18,19) 분께서 응답하십니다.

이렇게 땅과 하늘을 잇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기와 마음을 모아 청하기입니다.

우리는 가끔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기보다 우리의 이름으로우리 계획과 목적을 위하여 모이지는 않나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기도하는 것은 개인 기도만큼 중요합니다.

마음을 모아로 옮긴 그리스 말은 교향곡의 어원으로여러 악기가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소리를 내면서 화음을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 기도에서 마음을 모으려면 분열이 없어야 하겠지요.

형제에게 미움을 품고 기도한다면 마음을 모아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공동체 안에 계시면서 당신 성령을 통하여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고 그분께 마음을 열기만 하면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간청하며 기도하는 이날긴 세월 갈라져 살아온 우리 민족을 다시 불러 모아 조화를 이루어 함께’ 살게 해 주시도록 간절히 청합시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마음 모아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용서(容恕)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언어.

 

1독서(신명30,1-3)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축복과 저주로 다가오신다. 왜?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으면 축복, 생명인 것이고, 인간의 뜻, 욕망을 위한 말씀으로 받으면 저주,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의 대속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그 한 가지 말씀이다. 악(죄)을 선이 대속하여 그 죄를 없애시고 생명(축복)을 주시는 그 하나의 계명, 말씀이다.

그러나 말씀을 선악으로 갈라, 둘로(법으로) 받아 자신들의 이름, 욕망을 위한 신앙을 살으려 했기에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났던, 그래서 하느님께서 흩으셨던 바벨의 사람들이고,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 했던 가파르나움의 사람들인 것이다.

선악의 두 법을 가진 그 두 마음이 잘못, 죄인 것을 깨닫고 하느님의 말씀, 계명을 선이 악을 덮어 생명을 주시는 그 하나로 깨달아 가지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야 할 흙의 띠끌인 우리 피조물들의 운명이다. 그 없음의 운명을 영원의 생명의 운명으로 곧 창조주 하느님을 아버지로, 그 하늘의 존재로 운명을 되돌려 주신다는 약속이 말씀이며 계명이다. 하느님은 모든 율법을 충만을 뜻하는 열(10)로 주셨고, 그 열(충만)은 하늘의 안식인 하나를 뜻한다. (숫자 10은 숫자 1(하나)과 같이 쓰인다)

곧 열(10)은 안식(7)을 주는 하늘의 대속, 그 사랑(하나)의 계명인 것이다. 그런데 십계명을 열 개의 법으로 받아 지켜 버리면, 구원과 상관없는 땅(세상)의 법, 인간들의 계명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저주다. 그것이 바벨이며 가파르나움이었다. 하느님은 말씀을 열(10)로 주셨고, 예수님은 그 열(10)을 하나로 다시 주셨다.

 

(마태22,37-39)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여러 번 확인했듯, 마음과 목숨,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을 없다.(시편14,1 로마3,10외 다수)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의 대속으로 대신 지키신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죄인, 인간들을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 사랑하셨음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이 큰 계명이다.

그래서 둘째도 첫째와 같은 한 계명이라는 말씀이다. 곧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야고2,8~) 첫째 계명과 같이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당신의 이웃으로, ‘당신의 마음과 목숨, 정신을 다해 사랑하셨다.’가 큰 계명인 것이다.

*말씀을 사람의 귀로 대충 들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모세가 권했듯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말씀을 들어야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말씀, 계명이다. ' 그렇게 깨달아 그 깨달음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말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행실(行實M 킵-밖으로 흘리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다), 양의 옷차림을 한, 곧 착한 모습으로 인간의 도리를 신앙인냥 말하는, 그래서 하느님의 이웃 사랑(아가페)을 인간들의 사랑(페네스)으로 말하는(가르치는) 그 헛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계명, 그 하느님의 사랑을 진리로 마음에 간직하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행실(킵)이다.

그렇게 지킨(간직한)그 하느님의 사랑(아가페)을 이웃에게 그대로 전해주어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이 하늘의 용서와 생명을 받게 하는 것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큰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오늘 복음)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복음(마태18,19-22)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 말씀을 선악의 둘로 가진 그 두 마음을 하나로, 곧 선이 악을 덮어 생명을 주는 그 진리 하나로 갖고 청하면 하늘의 용서로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땅(세상)의 것, 사람의 소원을 무엇이든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다.(마태6,31-33참조)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자, 진리, 곧 하느님의 뜻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죄인들에게 하늘의 용서, 생명, 평화, 안식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 계명(10계명)을 대속으로 다 이루시려 십자가를 지러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 개의 계명으로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의로움을 구원의 진리, 그 하나를 깨달아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진리로 용서받아 거저 의롭게(거룩하게)되는 것이다.(로마3,24 히브10,1-22참조)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 십자가의 대속으로 얻는 용서, 안식(7), 그 일곱(7-안식)으로 용서해야 하는데 일곱 번으로 일곱 번까지 용서를 생각하는 베드로이다. 선악의 계명으로, 그 인간의 용서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용서(容恕)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언어이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일흔일곱- 7의 7로, 곧 49년 다음해인 희년(希年)의 정신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레위25,8-10) 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방을 선포하여라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 찾고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 속죄일에 나팔 소리 - 어린양이 죽어 남긴 뿔나팔 소리다. 곧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 죽음으로 얻는 죄에서의 해방, 자유를 얻는 십자가 복음, 그 기쁜 소식(복음)을 선포하라 하시는 것이다.

일흔일곱- 희년의 정신, 그 십자가의 복음 선포로 용서를 받고, 용서하는 것이 일흔일곱의 용서다. 그것이 참 용서인 것이고 십자기의 예수님을 용서, 구원의 진리로 믿는 것이다.

 

 

(마태6,12)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 저희가 십자가의 복음으로 이웃을 용서하였듯이 ‘하느님께서도 그 십자가의 복음으로 용서하시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 믿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로미8,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아멘>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6년 06월 25일 목요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날(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마태오 복음서 18장은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는 절차두세 사람이 함께 모인 자리그리고 기도로 이루어지는 분별그러나 이 모든 규정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전제가 놓여 있지요.

누군가는 이미 상처를 입었고누군가는 그 상처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복음은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 마음을 모아 …… 청하면”(마태 18,19). 이는 단순한 합의의 기술이 아닙니다서로 다른 두 사람이저마다 분노와 억울함을 잠시 내려놓고하느님 앞에서 함께 서 있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 침묵 속에서 공동체는 자기 확신 대신 서로를 향한 두려움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 누군가의 생각과 삶을 더 무너뜨리지는 않을지그 조심스러운 두려움을 안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청은먼저 서로의 아픔을 오래 바라본 뒤에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용서를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용서를 서로 간의 계산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계산을 무너뜨리십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18,22). 이 말씀은 형제에게 받은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상처가 되풀이되는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고단하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의 말씀입니다.

용서는 상처의 크기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관계의 회복을 선택하는 일입니다지치면서도다시분노가 식지 않았는데도다시그 다시가 용서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공동체가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그 대신 상처 속에서도 서로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 배움의 자리 한가운데 주님께서 계십니다그런데 배우기 참 힘들지요배우기 싫기도 합니다.

그런 상처받은 마음 또한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분명히!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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