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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노예제와 농노제

작성자클라우디우스|작성시간02.06.09|조회수1,406 목록 댓글 0
예전에 그라쿠스 형제님이 포로 로마노에 올리셨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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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와 농노제(참고하시길...)

번호:70 글쓴이: 그라쿠스 형제 조회:9 날짜:2001/07/31 15:35


노예제와 농노제



노예제



Ⅰ. 개관

노예가 존재하는 제도.

노예는 인격이 부인되고 타인에게 소유되어, 권리와 자유의 태반 또는 전부가 박탈된 자이다. 법적으로는 개인재산을 뜻하며 양도 ·매매가 가능한 물건으로 생각되었다. ‘생명 있는 도구, 말할 줄 아는 도구’라 하여 가축과 같이 생각되었으며, 소유자는 어떤 종류의 노동도 시킬 수 있었고, 원칙적으로는 그 생명도 빼앗을 수 있었다.

노예제 안에는 각양각색의 사회적 신분을 가진 자가 포함된다. 가령 고대 로마의 노예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대개의 경우 자유를 매수할 재력(財力)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 남북전쟁 전의 남부 흑인노예는 법률로써 그런 것이 명확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매수하기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노예제의 극단적인 형태의 예로는 나치스 독일의 강제노동자를 들 수 있는데, 이 경우 유대인 ·슬라브인, 기타 피정복민족은 일반적인 노예개념과는 달리 귀중한 자본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Ⅱ. 기원

노예제의 기원에 대하여는 추정하는 방법밖에 없으나, 수렵 ·식물채집의 문명단계에서는 노예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면, 미국의 인디언,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사회에 노예 관습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노예가 제도화한 것은 여러 부족(部族)이 수렵단계에서 탈피하여 목축단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그러나 그때도 사육동물을 관리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일손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노예제는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또 그런 단계에서는 생활도 지극히 단순하였으므로 노예와 주인 가족과의 신분관계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가족은 주인의 절대적 권위 아래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노예노동의 이용은 농경단계(農耕段階)에 이르러 증가하지만, 노예제의 확대 및 그 성격의 현저한 변화는 자급자족의 경제단계로부터 시장경제로 변화하면서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광대한 토지가 소수의 부유한 지주의 손에 귀속되었을 때, 집단적으로 일하는 노예의 사용은 매우 유리한 경영방식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노예는 이름도 없는 다수자(多數者)가 되었고, 그들에 대한 대우는 노예가 주인의 가족의 일원이었을 시대와는 달리 매우 가혹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대규모농장 노예제의 실례로는 고대 그리스 ·로마 및 남북 아메리카의 대농장경영에서 볼 수 있었다. 노예는 가사노동(家事勞動)뿐만 아니라 광업 ·공업 ·상업 노동자로도 사용되었으며, 여자노예는 매춘업(賣春業)의 요원이 되어, 고대사회의 권력자의 규방(閨房)에는 여러 명의 여자노예가 있게 마련이었다. 때로는 노예경찰관과 병사(兵士)도 있어, 그 중에는 이집트의 술탄, 맘루크와 같이 마침내 큰 세력을 형성하여 하나의 왕조를 창립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드문 예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노예는 낮은 계급의 천한 신분으로 시종하였다.



Ⅲ. 발생원인

노예제의 발생원인은 주로 포획(捕獲) 또는 폭력에 의하여 한 개인이 노예로 전락하고, 그 밖에는 범죄자에 대한 징벌, 채무불이행(債務不履行)을 이유로 하는 매각, 또는 부모 ·보호자 ·부족장에 의한 매각, 노예 남녀에 의한 출생(出生), 전쟁 포로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포획이 가장 오래된 노예 발생원인데, 일단 노예에 대한 수요가 늘자 인간을 포획하기 위해 원정(遠征)이 계획되었다. 이리하여 노예사냥과 인신유괴(人身誘拐)가 노예공급의 주된 수단이 되었고, 이러한 폭력은 고대 ·근대를 막론하고 변함이 없었다.

이와 함께 범죄자에 대한 징벌도 또한 오래된 노예 발생원이라 할 수 있다. 범죄를 징벌하는 권리가 개인으로부터 사회에 옮겨지면서 범죄자는 개인적 노예보다도 공공(公共)의 노예가 되는 것이 상례였다. 예를 들면, 갤리선(船)에서의 노역을 선고받은 범죄자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런 종류의 노예는 이미 근절되었지만, 이와 유사한 예를 징역(懲役)의 일종이나 식민지 당국이 사용한 강제노동, 또는 어떤 정부가 정적(政敵)에게 과한 강제노동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문명세계가 되면서 채권자는 채무불이행자를 노예로 삼거나 제3자에게 매도하는 일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반적으로 채무자가 차용금의 담보로서 자신의 노역을 제공하기로 서약하는 데서부터 발생하는 것이지만, 일단 노예가 되면 거기에서 벗어날 희망은 거의 없었다. 만약 채무자가 죽은 뒤 채무가 남았으면 채무는 그의 처자에게 인계되어 노예의 신분은 세습적인 것이 된다. 여러 부족사회에서 자유민인 개인은 자신의 권한에 예속된 아내와 첩 ·자손 또는 피보호자를 돈 ·보수를 받고 팔 수가 있었다. 또 부족의 수장(首長)은 자신의 재판권 밑에 있는 개인 또는 집단을 노예상인에게 팔거나 인도할 수도 있었다.

다음으로 출생 또한 노예의 발생원이 되는데, 이는 노예가 그 주인의 소유재산이라는 관념에서 생긴 결과이다. 그래서 노예인 양친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노예소유자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러나 출생은 그다지 중요한 노예 발생원은 아닌 것 같다. 로마의 대지주와 뒷날 미국에서의 대농장경영에서는 여자노예보다도 남자노예가 훨씬 많은 것이 상례였다. 즉, 아이가 성장하여 노동이 가능한 시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성인노예를 사들이는 편이 유리한 것이었다.

한편, 고대 근동지역에서의 노예의 발생원은 전쟁이었다. 전쟁포로는 처음에는 학살하는 것이 상례인 듯하나, 나중에는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여자를, 다음에는 남자를 살려 두었다. 포로 중에는 개인소유로 귀속되는 자도 있으나 태반은 국왕의 재산이 되었고, 국왕은 그들을 신변에 두든지 아니면 신전(神殿) 봉사자로 헌납하였다.



Ⅳ. 고대 오리엔트

고대 오리엔트의 노예제도는 이른바 고전형(古典型)이라 일컫는 그리스 ·로마와, 근대노예제도라고 하는 미국의 그것과 비교할 때, 그 발전의 형태 및 과정에서 현저하게 달랐다. 정복왕조(征服王朝)의 태반은 피정복민에게 공납의무(貢納義務)와 부역(賦役)을 부담시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피정복민을 노예화하지는 않았다.

노예의 수도 많지 않아 대부분의 노예는 도시국가 또는 신전의 소유였고, 수공업노동에 종사하였으며, 그 밖에 가내노예(家內奴隸)와 부채노예가 있었다. 노예와 자유민과의 신분적 차이도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고, 노예에 대한 대우도 매우 관대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초기 농경사회에서는 노예노동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노예는 원래 가정 내에서의 일꾼이며 부유한 가정에서는 1∼4명의 노예를 소유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노예는 법적으로 볼 때 하나의 동산(動産)이었으므로, 매매되거나 빌려주거나 또는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예는 일반적으로 인종 ·언어 ·종교 등에 있어 자유민과 공통되어서, 실제로는 법의 규정만큼 가혹한 처우를 받지는 않은 것 같다. 2,000년 이상에 걸친 고대 오리엔트의 여러 민족의 역사를 통하여 그들의 노예제도를 살펴볼 때, 노예제도의 기원과 기능 및 역사적 성격 등에서 각 민족이 놀랄 만큼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Ⅴ. 이슬람

이슬람교가 일어나기 전부터 아랍사회에는 많은 노예가 있었으나, 이슬람교시대에도 금지되지는 않았다. 다만 《코란》에서는 노예를 해방시켜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는 일을 선행(善行)이라 하였고, 632년 무하마드는 그의 설교에서 “주인은 노예와 똑같이 먹고, 자기의 옷과 똑같은 천의 옷을 입혀라. 노예도 다같은 알라의 종이므로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 뒤 이슬람권(圈)은 확대되고, 노예도 그 역사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9세기 초 아바스왕조의 칼리프는 주로 중앙아시아에서 데려온 터키계의 백인 노예를 근위병으로 삼았기 때문에, 마침내 그들은 강대한 세력을 쥐고 군사령관 기타 요직에 앉는 사람도 많았다. 또 지방에 왕조를 건설한 사람의 예도 있고, 노예의 신분으로 당대의 대학자가 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많은 노예의 극히 일부분일 뿐, 그 밖의 노예는 여전히 천대받고 열등한 생활조건에서 허덕였다.

9세기 후반 약 15년간 이라크 남부를 소란하게 하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잰즈(Zanj)의 반란은 바스라 주변에서 고역(苦役)을 강요당한 흑인 노예 수십만 명이 중심이 된 것으로, 한때는 아바스왕조의 운명을 위태로운 형세에까지 몰아넣었다. 이슬람 세계에 대한 노예의 공급지는 중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인도 등이고, 노예의 종류에는 전쟁포로와 노예상인의 수매에 의한 노예 등 다양하였다. 따라서 곳곳에 노예시장이 있어 중개인이 노예를 경매에 붙임으로써 고객의 수요를 충족시켰다. 이런 현상은 19세기에 이르러 유럽 여러 나라의 비난과 간섭이 심해지자 점차 폐지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Ⅵ. 동아시아

동아시아의 노예는 일반적으로 노(奴:男)·비(婢:女)로 통칭되었으며, 양민(良民)과 구별되는 천민(賤民)을 뜻하였다. 노비는 통상 반인반물(半人半物)로 생각되어 매매 대상이 되었으나, 한편 노비가 재산과 가족을 갖는 것을 인정받는 경우도 많았으며, 이들은 주로 가족노동의 보조자 또는 일종의 사치노예(奢侈奴隸)로서 이용되었다. 노예가 가장 많았던 것은 물론 고대였으나 중세 ·근세에도 존재하여, 중국에서는 1909년 법률로서 노예를 폐지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1. 중국

중국에서는 노예를 노비 ·노복(奴僕)·동복(욍僕)·동노(욍奴)·가동(家욍)·가노(家奴)·창두(蒼頭)·청의(靑衣) 등으로 불렀으며, 소속에 따라 관천민(官賤民)·사천민(私賤民)으로 구별하였다. 양천제(良賤制)를 법적으로 정한 가장 오랜 기록은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의 연창(延昌) 2년(513)이나, 노비에 대한 기록은 춘추전국시대(BC 771∼221)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시대 이후 전제적 군주제의 발전에 따라 양천제도 발전하여 당대(唐代:618∼907)에 이르러 가장 많이 발달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관천민으로 관노비(官奴婢)·관호(官戶)·잡호(雜戶)·공악(工樂)·태상음성인(太常音聲人) 등이 있었고, 사천민으로는 사노비(私奴婢)·부곡(部曲)·객녀(客女:여자의 部曲)·수신(隨身:부곡과 같은 지위) 등이 있어 각각 소유 ·매매 ·혼인 ·재산권리 등에 차이가 있었다. 관호 ·잡호에게는 균전(均田)을 받을 자격이 있었고, 부곡은 노예로서의 소유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관천민은 일반적으로 범죄자 ·전쟁포로인 경우가 많았고, 이들 관노비는 때로 신하(臣下)에게 하사되는 일도 있었다. 사천민은 부채를 갚지 못하여 전락한 사람이 많았고 이들은 시장에서 매매되었다.

한(漢)나라 이후의 여러 왕조에서는 자주 조칙(詔勅)을 내려 노비의 해방, 매매의 금지, 소유제한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권농정책의 일환으로서 농민의 몰락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관천민은 궁정 소속의 작업장에서 노역에 종사하고, 사천민은 가내노예로서 잡역에 종사하였다. 왕포(王褒)의 《동약》에는 노비가 종사하여야 할 일을 ‘백역(百役)’이라는 명칭으로 많은 종류의 노역을 들고 있다.

한(漢)나라 이후의 대지주(大地主) 등의 소유지에서 얼마나 많은 노비를 사용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으나, 남북조시대의 속담에 “농사[耕]는 노(奴)에게 묻고, 길쌈[織]은 비(婢)에게 물어라”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사노비의 가장 중요한 일은 농경과 방직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천민과는 달리 양민(良民)에게는 사(士)·서(庶)의 구별이 있었다. 사는 지배층이며 관(官)이기도 하였으나, 서는 서민으로 그 대부분은 일반농민이었는데, 형벌 또는 채무에 의하여 천민으로 몰락하였다. 이 사서(士庶)의 사회적 ·정치적 신분은 한(漢)나라 이후 점차 고정화되었고, 한편 서에서 몰락한 천(賤)도 또한 고정화되어 190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2. 일본

일본에서는 노비를 얏코[奴]라고 총칭하며,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 등 중국의 역사서를 보면 ‘히메코[卑彌呼] 등 왜왕(倭王)이 조공(朝貢)을 바칠 때 생구(生口:포로 ·노예 ·가축 등)를 헌상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에도 이미 노예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의 여러 문헌에서 노비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으며, 얏코는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에 의한 율령제(律令制)의 성립에 따라 그 신분이 확정되었다.

즉, 얏코에는 관천민(官賤民)인 료코[陵戶]·간코[官戶]·구누히[公奴婢]와, 사천민(私賤民)인 시누히[私奴婢]·게닌[家人]의 5종류가 있었으며, 료코는 천황 ·황족의 능묘를 지키는 수위, 간코는 상급천민으로 관전(官田)의 경작 등에 종사하였다. 구누히도 관전 경작에 종사하였으나 신분은 간코보다 낮았다. 이에 대하여 사천민인 게닌과 시누히는 과역(課役)을 면제하는 일, 상속의 객체(客體)가 될 수 있는 일, 양민의 2/3의 구분전(口分田)이 지급되는 일, 택지(宅地)의 지급이 없는 일 등 공통점이 있는 반면, 게닌은 시누히와는 달리 가족을 형성하고 자기 땅을 경영하였다.

일본의 역사상 노예와 농노(農奴)의 구분은 곤란하며, 그 시대적 구분에 대하여도 정설이 없다. 다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천재(天災)와 연공(年貢)의 착취 등으로 인하여 노예는 항상 발생하였고, 그것은 근대까지 계속되었다.



3. 한국

한국의 노예제의 존재 여부 및 시대적 구분 등에는 많은 이론(異論)이 있어 일률적으로 단정하기는 곤란하나, 이른바 동방적(東方的) 노예사회는 엄연히 존재한 것으로, 이러한 노예제는 여러 면에서 중국 ·일본 등 동방 제국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기원전 1세기에 완전한 농경사회를 이룬 부여(夫餘)는 국가를 건설, 신분제도를 4가(四加)·대사(大使)·하호(下戶) 등으로 나누었다. 4가는 귀족, 대사는 관리계급이었고, 하호는 토착민으로서 공납을 강요당하는 농노적(農奴的) 노예신분이었다.

고구려 때에 이르러 대량의 하층민이 하호의 이름으로 귀족 ·무사에게 사역되었고, 죄를 범한 자의 처자를 노비로 삼았다. 삼국시대에도 범죄 ·채무 등에 의한 노비가 생겨났고 인신매매도 시작되었다. 또한 포로의 확보가 전쟁의 목적이 되어 전리품으로서 분배되는 것 외에 궁정 ·관영공장, 귀족 밑에서 많은 노비가 노역에 사용되었다.

신라 때에 이르러 골품제도(骨品制度)의 확립과 함께 천민제도가 성립되어 향(鄕)·부곡(部曲)이라는 천민구역이 전국적으로 설치되었다. 관사(官私)의 노비도 증가하여 귀족 중에는 노비 3,000명을 거느린 자도 있었고, 때로는 그들 노비가 병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신라의 멸망과 함께 골품제도는 없어졌으나, 고려시대에도 엄격한 신분제가 존속되어 향 ·소(所)·부곡 등의 천민이 있었고, 그 밑에 관 ·사의 노비가 있었다. 또 사노비(私奴婢)의 매매 ·증여 ·상속이 공인되었으며, 이들은 주가(主家)의 잡역과 경작에 종사하였고 그 중에는 가령(家令)을 맡아보는 자도 있었다. 고려 중기 이후 무신의 사노비 중에는 주인의 출세에 따라 고관이 되는 자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향 ·소 ·부곡 등의 천민은 해방되어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는 일도 생겼으나, 이른바 양반제도의 확립과 함께 신분제도는 더욱 강화되어 칠반공천(七般公賤), 팔반사천(八般私踐)이라고 일컫는 여러 종류의 천민이 규정되었고, 그 밑에 노비가 있었다. 노비의 주인은 노비문서(속칭 종문서)를 가지고 그들을 소유하였으며, 매매 ·증여 ·저당 ·상속 등의 수속이나 방법도 국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 ·천민제는 폐지되었으나 그 유풍은 한동안 존속되었다.



Ⅶ. 근대

근대의 노예제는 15세기부터 성행한 유럽인의 신영토 발견을 위한 활동과, 이에 이어지는 신대륙에의 식민활동에서 비롯된다. 신대륙의 정복이 진척되어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예노동에 대한 수요가 높아져, 신대륙을 무대로 노예제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학대 ·반항 또는 토벌 등으로 인하여 원주민의 인구가 급속히 감소될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강건하고 도망할 염려가 없는 흑인 쪽이 노동착취에 보다 편리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흑인노예에 대한 수요는 증가 일로에 있었다.

16세기 전후에는 아이티 ·푸에르토리코 ·파나마 등에서 노예폭동이 일어났으나, 아프리카로부터 신대륙에의 노예수송은 연간 수천 명의 규모로 행하여져, 1592년 에스파냐 왕은 연간 3만 8000명의 노예수송을 허가할 정도였고, 17세기에 접어들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도 본격적인 노예무역에 착수하였다. 아프리카의 서해안지대는 노예 사냥터로 변하였고, 노예는 배 밑에 짐짝처럼 실려 항해 중에 약 1/6이 사망하고, 다시 길들이는 기간에 1/3이 죽어가는 등 노예의 운명은 비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높은 사망률에도 불구하고 노예상인은 참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가 있었다.

1607년 마침내 식민활동을 개시한 영국령(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노예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619년에는 버지니아에 최초의 노예가 수입되어 남부의 담배 ·인디고 ·쌀 생산지대의 중요한 노동력이 되었고, 17세기 중반부터는 각 지방에서 노예제에 대한 법적 뒷받침까지 마련되었다. 이들 지역의 원주민 인디언은 정착농업에 적합하지 않았고, 백인의 계약노동자는 계약기간이 끝나면 자유민이 되기 때문에 안정된 노동력의 공급원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플랜테이션 경영자는 일생 동안 사역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연고자가 없어 도망할 수도 없는 흑인노예의 확보에 나섰고, 법적 보장을 받아가며 노예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 담배산업이 불황에 빠지고, 한편 계몽주의 영향으로 인도주의적 사고방식이 고조됨에 따라 노예해방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계기로 북부에서는 노예가 해방되었으나, 남부지방의 강력한 반대로 합중국 헌법에는 사실상 노예제가 용인되어 노예수입도 1807년까지는 금지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1793년에는 면방기(綿紡機)가 발명되어 목화생산지대가 남부 내륙지방 깊숙이 확대됨에 따라 노예제는 다시 소생하여 노예제 플랜테이션을 기반으로 하는 ‘목화왕국’이 구축되기에 이르렀다.

1808년 노예의 수입은 금지되었으나, 노예제 자체는 발전을 거듭하여 국내의 노예매매가 활발해지면서 흑인노예의 실상은 더욱 비참하게 되었다. 노예가격의 앙등과 함께 노동착취도 가혹하게 되었고 인종적 편견은 매우 뿌리깊은 것이 되어, 흑인의 인격 자체를 부인하고 순전히 상품으로서만 취급하게 되었다.

1831년 나트 터너의 반란을 시초로 곳곳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가차없이 진압되었다. 이리하여 미국의 노예제는 그 민주주의의 이념과 정면으로 대립될 뿐만 아니라 노예제 폐지를 지향하는 시대조류에 역행하는 결과가 되었고, 같은 신대륙에 탄생한 사회이면서도 라틴아메리카제국의 인종문제와는 동떨어진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는 1810년대부터 1820년대에 걸쳐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노예해방이 실현되었고, 가장 노예제가 발달한 서인도제도에서도 1833년 영국의 해방령 이후 노예제의 해체를 지향하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을 배경으로 1820년대 후반 미국 북부에서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정기간행물이 발행되어 1831년에는 《해방자》가 창간되었고, 2년 뒤에는 노예제 반대협회가 설립되었다. 1854년에는 노예반대세력을 결집하여 공화당이 창당되면서 노예해방운동은 정치적으로도 유력해짐으로써 남부측에게는 그만큼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1861년 마침내 남북전쟁이 발발하였고, 대통령 링컨은 1863년 노예해방을 선언하였다.

그 후 1888년 브라질의 노예해방으로 근대사회의 노예제는 종지부를 찍었다. 노예무역이 시작된 이래 최소한 흑인노예 1,200만 명이 신대륙으로 팔려갔다고 하며, 흑인 3,00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여하튼 근대의 노예제는 우리 인류 역사상 최대 오점(汚點)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농노

농노주(農奴主)와의 관계에서 일컬어진 특정한 농민에 관한 역사적 호칭.



Ⅰ. 개관

농노와 농노주와의 관계는 여러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농노는 인신(人身)이 하나의 물건으로서 예속된 노예와 비교하면 보다 자립적 ·자유적 존재이지만, 일체의 전근대적 속박에서 해방된 독립 자영농민(自營農民)과 비교하면 자립성이 보다 낮으면서 부자유한 존재였다.

농노에게는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한 토지가 대여되어 자립적 농업경영이 허용되었으나, 그에 대한 보증으로서 농노주에 대한 인신상(人身上)의 예속관계가 수반되어, 노역(勞役)을 비롯한 현물 및 화폐의 공조(貢租)를 제공해야만 하였다. 특히, 농노주의 직영지(直營地) 경영에 노역을 바쳐야 하는 농민은 농노주에 대하여 강한 인신예속(人身隷屬)의 상태이어서, 좁은 의미로 보면 농노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현물(現物) 및 화폐의 공조를 부담하는 농민은 보다 자립성이 높은 존재로서, 넓은 의미로 말하면 농노 또는 예농(隸農)이라고 한다. 그 어떤 경우이든 농민은 토지 소유자는 아니고, 토지의 이용만이 조건부로 허용된 토지보유자에 불과하였다. 다만 농노의 경우는 토지의 보유권보다 그 이용권의 성격이 강한 편이고, 예농의 경우는 소유권에 더 가깝다.

하여튼 일반적인 농노는 봉건사회의 농민에 관계되는 개념이지만, 사적 특질(史的特質)에 대응해서 농노개념의 적용방법에서는 차이점이 생긴다. 이것을 대별하면 법학적 영역과 경제학적 영역으로 정리할 수 있다.

① 법학적으로 중요시되는 것은 농노가 승려 ·귀족 ·평민과 더불어 봉건사회 신분 구성의 한 요소라는 점이며, 더욱이 고유한 인신적 ·세습적 예속성을 가졌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예속성을 지닌 농노 신분을 노예 신분과 다르게 구분하는 것은, 하나의 생활주체로서 재산을 소유하고 가족을 구성하면서 법정에도 출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물건이 아닌 법적 인격으로서 농노는 원래 신분 규정이다.

② 경제학적으로는 농노를 봉건사회에 있어 기본적 노동력의 담당자라는 관점에서 그 특징을 자기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즉, 고대의 노예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단순한 물건 ·도구로서 주인의 소유대상이 되었고, 근대의 임금노동자가 생산수단 없이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것과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봉건사회의 농노가 토지 ·농구 ·역축(役畜) 등의 생산수단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계급사회의 지배관계는 노예제에서는 직접적 폭력, 자본주의의 경우에는 상품경제의 경제법칙을 통하여 성립하는 데 대하여, 생산수단이 직접 생산자와 결합하는 농노제의 경우에는 인신적(人身的)인 ‘경제외적 강제(經濟外的强制)’를 통하여 지배적 관계가 성립한다. 이러한 점에서 농노는 봉건적 농민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정된 좁은 의미로서의 용어는 경제외적 강제가 노골적 ·직접적인 형태로 행하여지는 경우는 농노로 보다 완화되어 관습화된 경우는 예농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대체로 노동지대(勞動地代:勞動賦役)의 단계는 농노, 생산물 내지 화폐지대(貨幣地代)의 단계는 예농으로 본다.



Ⅱ. 유럽

농노제는 유럽에서도 성립시기와 과정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내용도 동일하지는 않으나, 영주(領主)에 대한 강한 예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점만은 공통적이다. 이것이 법학적으로는 예속농민과 농노를 구별하는 지표가 되며, 또 경제학적으로는 경제외적 강제의 부역농민(賦役農民)에 대한 역사형태(歷史形態)로 간주되는 점이다.

종래 전형적으로 농노의 신분규정이 되어 온 프랑스를 예로 들면,

① 영주에 대한 강한 인신예속성으로, 사료(史料)에서는 자주 체복(體僕:homme de corps)이라고 표현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② 일정한 법적 권리의 결여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성직(聖職)에 취임할 수 없으며, 법정에서 농노가 아닌 자유인에 대한 증언자격(證言資格)도 없다.

③ 이상의 두 가지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신분과 다른 점은, 재산의 소유와 가족구성의 능력 외에 특히 영주에 대한 보호와 복종의 쌍무적(雙務的) 관계가 성립하며,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취급된다는 점에 있다.

④ 농노는 예속농민과 같이 영주에게 부역 ·공조(貢租)를 부담하는 것 외에 농노신분에 고유한 공조를 부담하였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농노의 단계에서는 봉건지대의 형태가 노동지대로 영주의 직영농장 경영에 부역(예:주당 3일)을 제공하였다. 이 부역은 농노의 총노동에 비교하면 상당히 많은 부분이어서, 경제적으로도 무거운 부담인 동시에 영주에 의한 강한 인신구속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삼림벌채(森林伐採), 용재(用材)·곡물운송 등의 형태로 봉건지대를 부담하였는데, 고정된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영주의 필요에 따라 자의적(恣意的)으로 요구되는 부정량(不定量) 부역이며, 그 위에 약간의 부정량 공조가 부과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 타이유세(taille 稅)는 보호대상(保護代償)으로서의 공조였다. 프랑스의 역사가 M.블로크는 타이유세가 농노만의 특유한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였으나, 비농노(非農奴)에게는 정액(定額) 타이유임에 반하여 농노에게는 자의액(恣意額) 타이유가 부과되었다는 설도 있다.

㉡ 인두세(人頭稅:chevage)는 경미하였으나 농노 각 개인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받아들였다.

㉢ 결혼세(結婚稅:formariage)는 농노가 비농노 또는 타령(他領)의 농노와 결혼하는 경우 영주의 허가와 더불어 부담하였다. 결혼은 노동력의 이동을 수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특히 영외(領外)의 결혼은 노동력의 유출을 의미하므로 영주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 사망세(死亡稅:mainmorte)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노의 모든 재산은 원칙적으로 직접 후계인(後繼人)인 동거하는 아들에게 상속되었으나, 자손 없이 사망할 경우에는 영주에게 귀속되었다. 이것을 에슈와트(暴choite)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북부 프랑스의 일부 및 독일에서 농노 재산의 상속에 즈음하여 영주는 가축 등 동산의 일부를 취득하였다.

농노는 일반적으로 보유지(保有地)를 자유로 양도 ·매매 ·대여할 수 없었고, 농노의 자손은 나면서부터 농노였다. 이상의 인두세 ·결혼세 ·사망세의 세 가지 부담을 농노 신분의 고유한 지표로 간주하는 블로크의 설이 근년까지 유력한 견해였으나, 최근에 이르러 이 세 가지 부담은 비농노에게도 부과되었다고 하는 L.베리에스트의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결국 농노가 예속농민과 상이한 점은 영주소령(領主所領) 내의 거주 여부와 관계없이 세습적인 인신적 예속규정과 영주에의 일원적(一元的)인 사법적 예속이라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농노제의 전개 규모에서 본다면, 블로크의 설은 적어도 12∼13세기의 농민의 거의 모두가 농노신분이었다는 데 반하여, 베리에스트의 설은 극히 일부에 한정된 것으로 본다. 이것은 법학적 개념의 적용에서 나온 것으로, 이들 농노 개념의 역사학에의 적용방법을 보면 유럽에서도 특히 자유 ·부자유의 법관념 확립이 빠른 프랑스 학계에서는 압도적으로 법학적 개념이 지배적이다.



Ⅲ. 중국

일반적으로 농노는 유럽 사상(史上)에서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등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에서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여 중국의 농노를 살펴보기로 한다. 자신이 소유한 생산용구를 사용하여 사실상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경작함과 아울러 영주의 직영지 경영에 부역노동을 함으로써, 농민의 잉여노동(剩餘勞動)이 영주에게 급부(給付)된 형태의 농노제는 동양의 그 어떤 지역에서도 명백한 모습으로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농노의 성립 시기에 관해서 여러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5개의 대표적 견해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진 ·한(秦漢)시대의 호족(豪族)에 의한 대토지소유제(大土地所有制) 밑에서 경작에 종사한 부곡(部曲)·장객(莊客)·전객(佃客)·전호(佃戶) 등을 모두 농노로 보는 견해,

② 삼국시대부터 발달한 귀족 ·호족 ·사원의 대토지 소유제 밑에서 경작에 종사한 부곡을 전기의 농노, 송(宋)나라 이후의 지주적 토지소유제 밑에서 경작한 전호를 후기의 농노로 보는 견해,

③ 삼국시대 이래의 경작자인 부곡을 중세 농노로 보고, 송나라 이후의 경작자인 전호를 근세적 계약에 의한 소작인으로 보는 견해,

④ 삼국시대 이래의 경작자인 부곡을 아시아적 노예제에서의 노예, 송나라 때 이후의 경작자인 전호를 농노, 명(明)나라 이후의 경작자인 전호를 예농으로 보는 견해,

⑤ 16∼17세기의 전호를 비로소 농노라고 부를 만한 농민으로 보고, 그 이전의 전호를 고대적 노예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수 ·당(隋唐)시대의 율령제국가(律令制國家)를 노예제국가로 규정하는 관점을 살펴보면, 수 ·당의 균전제(均田制)를 기축(基軸)으로 하는 전제적인 노예제적 수탈과 개개 농민의 인신적 지배의 철저함에서 새로이 발생하는 사적(私的)인 대토지소유가 농노제적 성격을 가지는가의 여부가 논점의 핵심이 된다. 균전농민(均田農民)의 분해에 수반하여 당나라 말기와 오대(五代)부터 송나라 때에 걸쳐 일반적으로 성립하는 지주적 토지소유는 장원제(莊園制)를 기반으로 하여 발달하였다.

이 장원제는 점차로 주가(主家)에서 독립하여 가옥을 이루고 경작에 종사하는 전복(佃僕)·방호(旁戶)에 의하여 경작되었다. 이 전복 ·방호는 노예적인 경제외적 강제를 강하게 받았으며, 타향에서 이주하여 장원의 경작자가 된 것이므로, 가옥 ·경우(耕牛)·농구 ·종자(種子)·식량 등이 없어 주인집에서 급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주인집과 그들과의 사이는 상하의 관계인 주복(主僕)의 관계였고, 국가의 형법상에서도 주인집과 그들 사이엔 차별을 두었다. 그들은 또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도망쳤을 경우 주인집의 고소로 관헌이 연행하여 되돌려 주었다. 토지가 저당잡혀 매매될 때는 계약서에 그들의 이름을 기입한 다음 토지와 더불어 매매 ·양도되었다. 이것을 수전전객(隨田佃客)이라 하였다. 결혼 때는 예물을 주인집에 바치고 허가를 받아야 하며, 주인집의 잡역에도 봉사하고 주인집 방위를 위하여 무기를 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全)전호의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은 주로 생산물지대(生産物地代)의 형식으로 주인집에 수납되었다. 생산물지대의 형식에는 정액조(定額租)·분익조(分益租)가 있는데, 분익조는 생산물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 보통이며 정액조는 주인집에서 만든 130∼150합(合) 용량의 말을 사용하여 수납되었는데, 수확의 절반~6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장원의 구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직영지에 대해서이다.

직영지에 대한 전호의 부역노동은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직영지의 노동력은 노복(奴僕)·고용인 등의 가내노예를 징용(徵用)함으로써 해결하였다. 이 직영지에서의 가내 노예의 노동이 중국에서 농노제의 성립을 분명치 않은 형태에 머무르게 한 특징적인 점이다. 이 직영지 노동의 구조를 기초로 하여 전호층에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전호는 직영지에서 노동을 하지 않는 대신 닭 ·집오리 등을 부조(副租) 형식으로 바쳤다.

이러한 장원 또는 사적 토지소유의 구조는 콜로누스(colonus)와 같이 극히 독립성이 희박한 직접 생산자인 전호층을 형성시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제와는 구별되는 농노제의 성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구조에서 전호층이 단혼가족(單婚家族)뿐이어서, 일단 토지를 보유하고 그 재생산이 가능한 사회적 존재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주인집에 대한 의존관계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노예제 농업단계에 머무르는 것이라는 견해도 성립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여러 설이 나올 수 있는 소지가 되는 큰 문제점이다.

송나라 이후의 토지소유자는 이러한 예속관계에 있는 전호의 재생산과정에 있어 주인집에 대한 의존관계를 이용하여 동족결합, 즉 의제적(擬制的)인 혈연관계를 전호층에 설정하고, 이러한 연결을 이용하여 전호에 대한 수취관계(收取關係)를 확보하였다. 이 점에서도 중국적인 공동체의 존재방식이 유럽과 상이함을 나타낸다.



경제외적 강제

봉건 영주가 농민으로부터 봉건지대(封建地代)를 징수하기 위하여 행사하였던 직접적 강제력.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상품교환의 법칙을 통해 자본가가 이윤을 흡수하는 것이지만, 봉건사회에서는 영주와 농민과의 사이가 지배와 예속의 관계로 나타나고, 이것에 의거하여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수탈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영주 직할지에 있어서의 주부역(週賦役)·공납(貢納)·결혼세 ·상속세 ·이주세(移住稅)·인두세(人頭稅) 등을 포함한 기타 여러 가지 임시 부역과 과세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봉건시대의 착취를 실현하는 법적 근거로서 영주재판권이 있었다.

한편, 봉건지대가 노동지대에서 생산물지대로, 나아가 화폐지대로 형태가 전화(轉化)해 감에 따라, 경제외적 강제 형태도 변화하였으며, 관습 또는 성문법(成文法), 더 나아가서는 계약적 화폐관계로 전화되었다. 이리하여 농민이 독립적인 자영농민이 되면서 경제외적 강제도 점차 소멸하게 되었다.

- 두산 동아 대 백과사전-





정리



농노 : 고대의 노예와 근대의 자유민의 중간적 존재



① 기원 : 로마 제정 말기의 부자유 소작인(콜로누스) 또는 게르만 출신의 몰락한 자유민

② 의무(겅제적 반대 급부) : 부역(노동지대)·공납(현물지대)의 의무, 인두세·사망세·결혼세 부담, 시설 사용료의 부담.

③ 노예적 요소(경제 외적 강제) : 거주·이전·직업 선택의 자유 제한, 영주의 법정에서 재판

④ 자유민적 요소 : 독립된 가정 형성, 농기구·가축·곡물 소유, 가옥·가축·토지의 상속권 보장→ 촌락 공동체의 오랜 관습에 의해 보호.



* 콜로누스

경작인(耕作人) 일반을 뜻하는 라틴어. 로마제국 말기에는 토지에 매어 있는 소작인(小作人)을 지칭하였으며, 이 토착농민제도를 콜로나투스라고 한다. 그들은 노예나 해방노예와는 달랐고, 신분상으로는 자유민에 속했으며 가족과 재산을 소유했으나 농지를 떠나는 일과 다른 신분 사람들과의 통혼이 금지되었다. 또한 반대로 지주가 콜로누스를 농지로부터 추방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콜로누스는 중세 농노제도의 선구적인 형태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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