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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 신전

[[자료]]카탈라우눔 평원(또는 카탈로니아 평원 또는 샬롱) 전투

작성자클라우디우스|작성시간04.10.19|조회수806 목록 댓글 0
이전에 포로 로마노에 인용했던 타메를랑님의 글을 재인용합니다.

원본출처 : 다음 '역전사'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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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 카탈라우눔 평원(또는 카탈로니아 평원 또는 샬롱) 전투

번호:1033 글쓴이: 클라우디우스 조회:14 날짜:2002/06/20 19:24


역사 속의 전쟁사 카페에서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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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아이티우스와 아틸라의 최후의 전투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번호:1727 글쓴이: 타메를랑 조회:89 날짜:2002/05/10 12:08


아에티우스는 390년 무렵에 출생해 로마의 장군이 되었고 정변에 훈족을 끌어들여 권력을 획득했고 아틸라와 친교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451년 파리 북동방 평원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고트족과 로마군을 이끌고 아틸라의 훈족과 맞서 크게 싸웠는데 아틸라가 아에티우스와 싸울때 훈기병은 중앙에 배치되었던 5만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훈족과 게르만족의 혼합보병이었지요. 이러한 병력구성은 기동성을 잃고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성전을 할 수 있다는 결정적인 장점을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에 보면 훈족은 야만인중 유일하게 요새공략이 가능했다고 나옵니다.) 가지게 되었고 상대보다 숫적으로 압도했던 아틸라는 이러한 병력구성을 더 선호했었습니다

카탈라우눔 평원(또는 카탈로니아 평원 또는 샬롱) 전투에 대해서만 아는대로 답을 드리겠습니다. 이 싸움에 대해서는 먼저 몇 가지 일반적 인식과 다른 부분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1. 이 싸움은 평원전투가 아니었다.
2. 로마측의 병력이 크게 밀리지 않았다.
3. 흉노측도 보병이 주력이었다.
4. 이 싸움은 무승부다.

즉 카탈라우눔 평원은 이름만 평원이지 양쪽에 가파른 언덕이 있어서 아에티우스의 로마군 및 데오도릭의 비시(서?)고트군등 기타 부족 연합군이 한쪽 언덕에, 그리고 아틸라의 흉노군이 다른 쪽 언덕에 자리하여 고지 쟁탈전 끝에 혼전으로 돌입한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아틸라군도 말만 흉노군이지 실제로는 오스트로(동)고트군 등 피정복민이 다수였고 가이세릭의 반달군도 동맹군으로 참여하여 실제 보병이 다수였습니다.
또 정확한 기록은 확인못했으나 나중의 사상자수를 보면 양측이 각각 수십만의 대군으로 싸웠으며 로마측의 병력수가 크게 밀리지도 않았고 흉노측도 주력이 기병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흉노측이 기병이라 해도 지형의 특성상 기동전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양측 모두 복잡한 구성의 연합군인 상태에서 아틸라의 잘못된 지휘가 승리를 얻지 못하게 했다고 생각되는데, 싸움은 먼저 중앙 후위에 자리잡은 아틸라가 노예를 다루듯 흉노 연합군을 로마측의 고지로 돌격시킨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이 각각 좌우익을 맞아 진두지휘한 아에티우스와 데오도릭에 의해 쫓겨 내려오자 그제서야 아틸라는 언덕을 내려와 전투에 돌입함으로써 결국 아에티우스와 데오도릭의 사이에 낀 상태로
얽혀버려 싸움은 소모적인 혼전이 되어 버립니다. 무슨 이유론지 아틸라는 지형선택과 지휘의 양 측면에서 흉노의 장점인 기동전을 발휘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셈입니다.
아에티우스와 데오도릭은 좌우익에서 아틸라를 몰아붙여 전투는 점차 흉노에게 불리해졌는데 이들의 진두지휘 스타일이 로마측을 지지 않게 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흉노측도 지지 않게 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즉 비시고트 왕 데오도릭이 오스트로고트의 영주 안닥의 창에 찔려 전사하게 된 겁니다. 그러자 아에티우스는 후퇴하는 흉노군을 추적하는 대신 왕자 도리스무드를 비시고트로 돌려보내 왕좌를 이어받게 합니다.

결국 아에티우스는 이 싸움으로 아틸라의 골 침입을 저지하였을 뿐 실제로는 흉노의 주전력을 고이 돌려보내 아틸라는 죽기 전까지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다시 로마를 침입합니다.
즉 이 싸움은 소문대로 아틸라가 참패한 것이 아니라 양측이 각자의 사정으로 물러선 무승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엄청나게 소모적인 혼전이었던 것이 전장터에 무려 16만(기록에 따라 20만 또는 30만)의 엄청난 전사자가 남았답니다. 슬프게도 그 대다수는 로마측과 흉노측의 동맹부족들의 전사자들이라 하는군요.

양쪽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훈족의 갈리아 침입은 방어할 수 있었지요.

그 이후 서로마 황제의 견제를 받아 별 활약을 못하다 454.9.21 사망합니다. 자세한 사인은 알 수 없고 황제의 독살 내지 암살설이 유력합니다.

아틸라는 453년 이탈리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와 동로마 원정과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며 게르만 왕비와 결혼식을 치르던 도중 그날 밤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여러가지인데 복상사라느니, 왕비가 칼로 찔렀다느니,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코피를 쏟았다느니 하는 것들인데 정확한 설은 없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제 마지막 훈족에 잘 나와 있는... ^^~

< 주1 :
타메를랑님의 소설입니다. 출판계약은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배경은 454년 이후의 유럽... >

추신 : 그리고 중국 기록엔 당연히 아틸라가 안 나옵니다. 중국에서 먼 로마 사정까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위의 자료 출처는 디펜스코리아 고대 전사란입니다.

< 주2 :
참고로 타메를랑님은 디코에선 테무진이란 아뒤로 활동 중입니다.
디펜스코리아는 전쟁과 군사관련 전문사이트입니다.
(http://www.defenc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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