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씨에서 옛날에 싸이 미니홈피에 퍼왔던 거에요..
머 한달이나 지났지만 아래에 궁금해하는 분이 계셔서 음..
(툴루즈 왕 알라리크 2세에게 사로잡힌 시아그리우스)
불펌을 금합니다.
자작이므로, 퍼가실 때에는 본글 리플란에 미리 알려주시고, 다른 곳에 기재하실 때에는 본글의 주소를 출처에 명기해 주시기 바라며, 네이버를 비롯한 포털 계열에는 절대로 퍼가지 말아주십시오.
0.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 양분된 로마 제국은 시대의 주도권을 잃고 북방 게르만족과 훈족의 움직임에 의해 농락당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면서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두 로마 제국 중, 동로마 제국은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강했던 오리엔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페르시아를 비롯한 동방 제국들과의 관계도 비교적 양호했으며, 서로마 제국과의 단절을 통해 북방 만족의 압력을 서부로 상당 부분 분산시키는데 성공했던 덕택에 후에 비잔티움 제국으로 불리게 되는 동지중해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은 마그넨티우스 - 실바누스 - 마그누스 막시무스 - 아르보가스트의 반란을 거치면서 율리아누스 황제와 발렌티니아누스 황제, 그라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일시 회복했던 국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에서, 그나마 여력이 남아있었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절연당하고, 또한 간신히 그런 제국을 지켜내면서 비시고트 족과의 결연을 통해 동서 로마의 재통합을 구상하던 대제의 고명대신 스틸리코 대군이 어이없이 모살당하면서 자생력을 잃고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비시고트 족 알라리크 대왕의 로마 약탈과 반달 왕 가이세리크의 히스파니아 침공은 그 시작에 불과했지요.
1. 다행히 암군 호노리우스 황제의 사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내세운 갈라 플라키디아 여제의 등장으로 인한 동로마 제국과의 재결연과, 스키타이 출신 무장 아이티우스 장군, 갈리아 출신 무장 보니파키우스 장군의 활약으로 일시 제국은 그 형체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요충지 아프리카를 반달 족에게 빼앗기고, 다시 동서 로마 두 제국을 모두 위협하던 '신의 채찍' 아틸라 대왕을 막아낸 아이티우스 장군이 황제와의 불화 때문에 호노리우스 시대의 스틸리코 대군과 마찬가지로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됩니다.
2. 이미 로마 약탈 직후 호노리우스 황제의 그 유명한 칙령이 내려지면서,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아프리카 일대의 속주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통제력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만, 아이티우스 장군 시대에 이르르면서 갈리아는 그래도 어느 정도 제국의 지배권에 다시 편입되게 됩니다. 물론 툴루즈를 중심으로 버티고 있던 비시고트를 비롯, 로마 제국 영내에 이미 깊숙히 침투해있던 프랑크, 부르군트 등의 만족들을 훈족이라는 팩트를 이용해 이리저리 견제하면서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던 지배권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남아 있던 갈리아 내의 로마 세력은 이를 계기로 부족하게나마 자립을 위한 여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갈리아를 유지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갈리아 현지민들을 조직하여 지배권을 유지하려 했고, 그래서 발탁된 사람이 바로 갈리아 출신의 무장 아에기디우스였지요.
아프리카에 보니파키우스 장군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아이티우스 장군이 갈리아 담당 마기스테르 밀리툼이었습니다만, 보니파키우스 장군이 죽은 후, 아이티우스가 사실상 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이 되면서부터 갈리아 군사령관 직책은 이 아에기디우스에게 넘어갑니다. 이 양반의 군사적 재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랜 세월 갈리아에서의 로마 세력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볼 인물은 아니라 하겠지요.
3. 아이티우스가 살해당한 후, 아에기디우스는 갈리아 일대의 사실상 준독립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아틸라와의 전투로 저 유명한 알라리크 대왕의 사생아 테오도리크 왕(이탈리아의 테오도리크 대왕과는 다른 인물입니다.)이 전사하면서 툴루즈 왕국은 내분을 일으킨 상태였고, 아틸라의 죽음으로 훈족의 위세가 꺾이면서 프랑크 족을 비롯한 다른 이민족들도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죠. 아에기디우스는 이 무렵, 동료 장군 리키메르와 협력하여,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마요리아누스 황제를 옹립하면서, 더욱 광범위한 권력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군사령관들의 지지를 얻어 황제가 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려 했습니다만 아프리카 원정이 실패하면서 결국 리키메르에게 암살되고 맙니다.
마요리아누스가 사망한 순간, 아에기디우스 또한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동료였던 리키메르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가 옹립한 황제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허울뿐인 로마 제국을 버리고 갈리아 속주를 차지하여 할거할 것인가. 스틸리코 장군을 끝으로, 자신보다 로마를 선택할 무장은 이미 사라진 시대였기에, 아에기디우스는 두번째 길을 택하게 됩니다. 이 무렵, 이민족들의 세력은 여전히 사분오열된 상태였고, 아이티우스의 죽음과 함께 그가 거느리고 있던 얼마 안되던 군사력 또한 거의 대부분 아에기디우스의 갈리아 군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아에기디우스의 실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고, 그의 선택은 그래서 전혀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었죠.
할거를 결심한 그는, 갈리아 속주들에 남아 있던 로마식 행정체계와 관료집단, 그리고 군대와 민중을 로마식으로 재조직하여, 여타 이민족 국가들과는 차별화되는 독립국가 수립을 추진합니다. 또한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해, 비시고트의 발티 왕가가 아닌 프랑크의 새로 등장한 메로빙거 왕가를 지지함으로서 동맹군까지 확보하게 되지요. 짧은 시간이나마 수아송 왕국으로 불리게 되는 갈리아 마지막 로마 세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4. 일시적으로 그의 선택은 훌륭해 보였습니다. 프랑크의 메로빙거 왕이었던 실데리크 1세는 아직 자신의 왕권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였고, 이를 적절히 이용한 아에기디우스의 책략으로 수아송 왕국은 일시 프랑크 왕국을 겸병하기 직전까지 세력을 확대합니다. 툴루즈의 발티 왕가는 이 무렵, 여전히 집안싸움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었기에 이들에겐 방해가 되지 않았지요.
5. 하지만 그의 천하는 채 1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실데리크 1세가 곧 프랑크 대왕으로 다시 권좌에 복귀했고, 툴루즈의 비시고트 왕국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으며, 로마에 도사리고 있던 게르만 장군들이 한때 동료였던 그의 성공을 시기했지요. 결국 464년, 그는 내분의 와중에, '우발적인 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우발적인 사고가 무엇인지는 신이나 아시려나요. 아틸라의 형 블레다도 벼락을 맞고 죽었다지 않습니까.
어쨌든 그렇게 죽은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코메스 파울루스 장군입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인물인지, 아니면 아에기디우스의 휘하 장령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기억할 가치도 없는 것이, 몇달 되지도 않아 실데리크 왕에게 살해당합니다(......). 다시 그의 뒤를 이은 것은 다름아닌 아에기디우스의 아들 아프라니우스 시아그리우스였지요.
6. 시아그리우스의 방식은 제 아비와 조금 달랐습니다. 반란을 일으켜 수아송 왕국을 건설했던 아에기디우스와는 달리, 시아그리우스는 후에 이탈리아를 영유하게 되는 테오도리크 대왕이 동로마 조정에 그리했듯이, 공식적으로는 서로마 제국의 장군,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갈리아스'를 자처하며 서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합니다. 서로마 제국은 이에 그를 갈리아 전역의 둑스Dux로 임명함으로서 형식적으로나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지요.
두 진영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어차피 힘이 없는 것은 둘다 마찬가지, 서로 싸워서 좋을 건 없었지요. 시아그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이름으로 다른 이민족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고, 서로마 제국은 시아그리우스를 이용해서 이탈리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니 상부상조라 할 것입니다.
7. 적절한 외교 정책을 비롯한 시아그리우스 자신의 기량 덕분에 수아송 왕국은 개창자 아에기디우스의 사후에도 20년 이상 버티는 데 성공합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것이 476년, 수아송 왕국은 그 이후에도 10년을 더 버텼으니 대단한 일이지요. 하물며, 그 상대가 다름아닌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전신이 되는 프랑크 왕국, 그것도 프랑크 왕국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두 왕인 실데리크-클로도베크 부자가 이끄는 대군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대단하다 하겠습니다.
실데리크 왕이 파울루스를 살해하면서, 수아송 왕국은 이미 464년 당시부터 계속 대對프랑크 항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시아그리우스는 실데리크 왕이 죽는 그 순간(481년)까지 그에게 맞서 한치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툴루즈의 비시고트 왕국이 수아송 왕국에게 어떠한 원조도 하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이 22년 동안의 항전은 사실상 수아송 왕국, 즉 갈리아에 잔존해 있던 로마 세력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물론 적들의 미숙함도 크게 한몫하긴 했습니다만.
8. 하지만 이러한 시아그리우스의 분투도, 481년 실데리크 왕이 사망하고 그 아들인 15세의 클로도베크가 즉위하면서 조금씩 종말의 시간에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클로도베크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실데리크 왕의 후광은 그의 왕권을 비교적 강고하게 받쳐주고 있었고, 또한 클로도베크 자신의 기량도 나이에 비하면 뛰어난 편이었죠.
실데리크 사후 약 4년 정도는 어찌어찌 시아그리우스가 우세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만, 클로도베크가 성년이 되면서, 수아송 왕국은 프랑크에게 결정적으로 패하고 맙니다. 486년의 수아송 전투가 바로 그것이었죠. 왕국의 심장부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니 이미 전세가 불리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만, 직접 진두에 나선 클로도베크의 맹진으로 시아그리우스와 그의 마지막 로마 왕국은 괴멸당하고 맙니다.
9. 수아송 전투에서 패한 시아그리우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만, 재기의 희망은 이미 전무했습니다. 배경이 되어줄 수 있었던 서로마 제국은 이미 10년 전에 멸망하여 지금은 오도아케르가 다스리는 이탈리아 왕국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는데, 오도아케르의 성격상 그를 받아줄 리가 없었죠. 동로마 제국으로 가려 한들 길도 끊겼을 뿐더러, 동로마 제국이라고 오도아케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 또한 사실, 남은 길은 믿을 수는 없어도, 그나마 한때는 함께 서로마 제국의 맹방이었던 툴루즈 왕국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 선택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만.
이무렵 툴루즈의 비시고트 왕국을 통치하는 사람은 알라리크 2세였습니다. 알라리크 1세 대왕의 서자 테오도리크 1세의 둘째 아들 테오도리크 2세의 손자였죠(테오도리크 2세는 형 토리스문드 왕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했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비시고트 왕국을 갈리아 일부와 히스파니아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국으로 성장시키는 영걸이기도 합니다만, 후에 결국 푸아티에 전투에서 클로도베크에게 패하고 전사하게 되는 인물입니다(507년의 일, 클로도베크 41세).
이 무렵에는 툴루즈의 세력이 프랑크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을 시기였던데다, 프랑크는 수아송 외에도 다른 왕국들과의 싸움으로 지쳐있었던 때였으니 군인으로서의 기량이 뛰어난 시아그리우스와 그의 잔당들을 영입해서, 아직 미숙한 상태였던 클로도베크를 제거하는데 이용했어도 좋았을 테지만, 알라리크 2세는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잘만 했으면 일거에 갈리아 전역에 세력을 넓힐 수도 있었을 터인데 말이죠(물론 당시 정세를 생각해보면 알라리크 2세의 선택이 현실적이기는 했습니다만 클로도베크가 후에 어떤 일을 저지르는가 생각하면 얘기가 다르죠.).
아무튼, 알라리크 2세는 시아그리우스를 환대하는 척 하면서 그를 생포하여 프랑크로 압송했고, 클로도베크는 아버지 실데리크와 자신의 20년 가까운 숙적이었던 그를 참수하여 2대에 걸친 원한을 풀게 됩니다.
10. 시아그리우스의 죽음은, 갈리아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로마 직계 세력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후 서유럽에서 로마 제국의 전통은 이탈리아의 오도아케르-테오도리크 왕국과 프랑크 왕국, 비시고트 왕국, 이 세 왕국에 의해 계승되고 변질된 형태로나마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 마그누스 - 샤를마뉴에 의해 이 세 왕국이 통합되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게르만에 의한 로마 제국의 부활이 이루어지게 되지요.
한마디로, 시아그리우스의 실패는 비게르만족에 의한 로마의 부활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볼때, 이는 될 일이 아니었겠지만, 만약 시아그리우스가 프랑크 왕국의 공세를 막아내고 갈리아의 실력자로 존속했다면, 어쩌면 후세의 신성로마제국은 프랑크가 아닌 갈로-로만 왕국에 의해 탄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갈리아-골이라는 이름은 계속 존속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프랑스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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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디씨인사이드 역사갤러리 .........의 글 2007/05/07
머 한달이나 지났지만 아래에 궁금해하는 분이 계셔서 음..
(툴루즈 왕 알라리크 2세에게 사로잡힌 시아그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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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 양분된 로마 제국은 시대의 주도권을 잃고 북방 게르만족과 훈족의 움직임에 의해 농락당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면서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두 로마 제국 중, 동로마 제국은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강했던 오리엔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페르시아를 비롯한 동방 제국들과의 관계도 비교적 양호했으며, 서로마 제국과의 단절을 통해 북방 만족의 압력을 서부로 상당 부분 분산시키는데 성공했던 덕택에 후에 비잔티움 제국으로 불리게 되는 동지중해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은 마그넨티우스 - 실바누스 - 마그누스 막시무스 - 아르보가스트의 반란을 거치면서 율리아누스 황제와 발렌티니아누스 황제, 그라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일시 회복했던 국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에서, 그나마 여력이 남아있었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절연당하고, 또한 간신히 그런 제국을 지켜내면서 비시고트 족과의 결연을 통해 동서 로마의 재통합을 구상하던 대제의 고명대신 스틸리코 대군이 어이없이 모살당하면서 자생력을 잃고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비시고트 족 알라리크 대왕의 로마 약탈과 반달 왕 가이세리크의 히스파니아 침공은 그 시작에 불과했지요.
1. 다행히 암군 호노리우스 황제의 사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내세운 갈라 플라키디아 여제의 등장으로 인한 동로마 제국과의 재결연과, 스키타이 출신 무장 아이티우스 장군, 갈리아 출신 무장 보니파키우스 장군의 활약으로 일시 제국은 그 형체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요충지 아프리카를 반달 족에게 빼앗기고, 다시 동서 로마 두 제국을 모두 위협하던 '신의 채찍' 아틸라 대왕을 막아낸 아이티우스 장군이 황제와의 불화 때문에 호노리우스 시대의 스틸리코 대군과 마찬가지로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됩니다.
2. 이미 로마 약탈 직후 호노리우스 황제의 그 유명한 칙령이 내려지면서,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아프리카 일대의 속주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통제력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만, 아이티우스 장군 시대에 이르르면서 갈리아는 그래도 어느 정도 제국의 지배권에 다시 편입되게 됩니다. 물론 툴루즈를 중심으로 버티고 있던 비시고트를 비롯, 로마 제국 영내에 이미 깊숙히 침투해있던 프랑크, 부르군트 등의 만족들을 훈족이라는 팩트를 이용해 이리저리 견제하면서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던 지배권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남아 있던 갈리아 내의 로마 세력은 이를 계기로 부족하게나마 자립을 위한 여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갈리아를 유지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갈리아 현지민들을 조직하여 지배권을 유지하려 했고, 그래서 발탁된 사람이 바로 갈리아 출신의 무장 아에기디우스였지요.
아프리카에 보니파키우스 장군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아이티우스 장군이 갈리아 담당 마기스테르 밀리툼이었습니다만, 보니파키우스 장군이 죽은 후, 아이티우스가 사실상 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이 되면서부터 갈리아 군사령관 직책은 이 아에기디우스에게 넘어갑니다. 이 양반의 군사적 재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랜 세월 갈리아에서의 로마 세력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볼 인물은 아니라 하겠지요.
3. 아이티우스가 살해당한 후, 아에기디우스는 갈리아 일대의 사실상 준독립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아틸라와의 전투로 저 유명한 알라리크 대왕의 사생아 테오도리크 왕(이탈리아의 테오도리크 대왕과는 다른 인물입니다.)이 전사하면서 툴루즈 왕국은 내분을 일으킨 상태였고, 아틸라의 죽음으로 훈족의 위세가 꺾이면서 프랑크 족을 비롯한 다른 이민족들도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죠. 아에기디우스는 이 무렵, 동료 장군 리키메르와 협력하여,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마요리아누스 황제를 옹립하면서, 더욱 광범위한 권력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군사령관들의 지지를 얻어 황제가 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려 했습니다만 아프리카 원정이 실패하면서 결국 리키메르에게 암살되고 맙니다.
마요리아누스가 사망한 순간, 아에기디우스 또한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동료였던 리키메르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가 옹립한 황제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허울뿐인 로마 제국을 버리고 갈리아 속주를 차지하여 할거할 것인가. 스틸리코 장군을 끝으로, 자신보다 로마를 선택할 무장은 이미 사라진 시대였기에, 아에기디우스는 두번째 길을 택하게 됩니다. 이 무렵, 이민족들의 세력은 여전히 사분오열된 상태였고, 아이티우스의 죽음과 함께 그가 거느리고 있던 얼마 안되던 군사력 또한 거의 대부분 아에기디우스의 갈리아 군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아에기디우스의 실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고, 그의 선택은 그래서 전혀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었죠.
할거를 결심한 그는, 갈리아 속주들에 남아 있던 로마식 행정체계와 관료집단, 그리고 군대와 민중을 로마식으로 재조직하여, 여타 이민족 국가들과는 차별화되는 독립국가 수립을 추진합니다. 또한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해, 비시고트의 발티 왕가가 아닌 프랑크의 새로 등장한 메로빙거 왕가를 지지함으로서 동맹군까지 확보하게 되지요. 짧은 시간이나마 수아송 왕국으로 불리게 되는 갈리아 마지막 로마 세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4. 일시적으로 그의 선택은 훌륭해 보였습니다. 프랑크의 메로빙거 왕이었던 실데리크 1세는 아직 자신의 왕권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였고, 이를 적절히 이용한 아에기디우스의 책략으로 수아송 왕국은 일시 프랑크 왕국을 겸병하기 직전까지 세력을 확대합니다. 툴루즈의 발티 왕가는 이 무렵, 여전히 집안싸움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었기에 이들에겐 방해가 되지 않았지요.
5. 하지만 그의 천하는 채 1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실데리크 1세가 곧 프랑크 대왕으로 다시 권좌에 복귀했고, 툴루즈의 비시고트 왕국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으며, 로마에 도사리고 있던 게르만 장군들이 한때 동료였던 그의 성공을 시기했지요. 결국 464년, 그는 내분의 와중에, '우발적인 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우발적인 사고가 무엇인지는 신이나 아시려나요. 아틸라의 형 블레다도 벼락을 맞고 죽었다지 않습니까.
어쨌든 그렇게 죽은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코메스 파울루스 장군입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인물인지, 아니면 아에기디우스의 휘하 장령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기억할 가치도 없는 것이, 몇달 되지도 않아 실데리크 왕에게 살해당합니다(......). 다시 그의 뒤를 이은 것은 다름아닌 아에기디우스의 아들 아프라니우스 시아그리우스였지요.
6. 시아그리우스의 방식은 제 아비와 조금 달랐습니다. 반란을 일으켜 수아송 왕국을 건설했던 아에기디우스와는 달리, 시아그리우스는 후에 이탈리아를 영유하게 되는 테오도리크 대왕이 동로마 조정에 그리했듯이, 공식적으로는 서로마 제국의 장군,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갈리아스'를 자처하며 서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합니다. 서로마 제국은 이에 그를 갈리아 전역의 둑스Dux로 임명함으로서 형식적으로나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지요.
두 진영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어차피 힘이 없는 것은 둘다 마찬가지, 서로 싸워서 좋을 건 없었지요. 시아그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이름으로 다른 이민족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고, 서로마 제국은 시아그리우스를 이용해서 이탈리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니 상부상조라 할 것입니다.
7. 적절한 외교 정책을 비롯한 시아그리우스 자신의 기량 덕분에 수아송 왕국은 개창자 아에기디우스의 사후에도 20년 이상 버티는 데 성공합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것이 476년, 수아송 왕국은 그 이후에도 10년을 더 버텼으니 대단한 일이지요. 하물며, 그 상대가 다름아닌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전신이 되는 프랑크 왕국, 그것도 프랑크 왕국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두 왕인 실데리크-클로도베크 부자가 이끄는 대군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대단하다 하겠습니다.
실데리크 왕이 파울루스를 살해하면서, 수아송 왕국은 이미 464년 당시부터 계속 대對프랑크 항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시아그리우스는 실데리크 왕이 죽는 그 순간(481년)까지 그에게 맞서 한치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툴루즈의 비시고트 왕국이 수아송 왕국에게 어떠한 원조도 하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이 22년 동안의 항전은 사실상 수아송 왕국, 즉 갈리아에 잔존해 있던 로마 세력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물론 적들의 미숙함도 크게 한몫하긴 했습니다만.
8. 하지만 이러한 시아그리우스의 분투도, 481년 실데리크 왕이 사망하고 그 아들인 15세의 클로도베크가 즉위하면서 조금씩 종말의 시간에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클로도베크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실데리크 왕의 후광은 그의 왕권을 비교적 강고하게 받쳐주고 있었고, 또한 클로도베크 자신의 기량도 나이에 비하면 뛰어난 편이었죠.
실데리크 사후 약 4년 정도는 어찌어찌 시아그리우스가 우세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만, 클로도베크가 성년이 되면서, 수아송 왕국은 프랑크에게 결정적으로 패하고 맙니다. 486년의 수아송 전투가 바로 그것이었죠. 왕국의 심장부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니 이미 전세가 불리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만, 직접 진두에 나선 클로도베크의 맹진으로 시아그리우스와 그의 마지막 로마 왕국은 괴멸당하고 맙니다.
9. 수아송 전투에서 패한 시아그리우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만, 재기의 희망은 이미 전무했습니다. 배경이 되어줄 수 있었던 서로마 제국은 이미 10년 전에 멸망하여 지금은 오도아케르가 다스리는 이탈리아 왕국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는데, 오도아케르의 성격상 그를 받아줄 리가 없었죠. 동로마 제국으로 가려 한들 길도 끊겼을 뿐더러, 동로마 제국이라고 오도아케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 또한 사실, 남은 길은 믿을 수는 없어도, 그나마 한때는 함께 서로마 제국의 맹방이었던 툴루즈 왕국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 선택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만.
이무렵 툴루즈의 비시고트 왕국을 통치하는 사람은 알라리크 2세였습니다. 알라리크 1세 대왕의 서자 테오도리크 1세의 둘째 아들 테오도리크 2세의 손자였죠(테오도리크 2세는 형 토리스문드 왕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했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비시고트 왕국을 갈리아 일부와 히스파니아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국으로 성장시키는 영걸이기도 합니다만, 후에 결국 푸아티에 전투에서 클로도베크에게 패하고 전사하게 되는 인물입니다(507년의 일, 클로도베크 41세).
이 무렵에는 툴루즈의 세력이 프랑크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을 시기였던데다, 프랑크는 수아송 외에도 다른 왕국들과의 싸움으로 지쳐있었던 때였으니 군인으로서의 기량이 뛰어난 시아그리우스와 그의 잔당들을 영입해서, 아직 미숙한 상태였던 클로도베크를 제거하는데 이용했어도 좋았을 테지만, 알라리크 2세는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잘만 했으면 일거에 갈리아 전역에 세력을 넓힐 수도 있었을 터인데 말이죠(물론 당시 정세를 생각해보면 알라리크 2세의 선택이 현실적이기는 했습니다만 클로도베크가 후에 어떤 일을 저지르는가 생각하면 얘기가 다르죠.).
아무튼, 알라리크 2세는 시아그리우스를 환대하는 척 하면서 그를 생포하여 프랑크로 압송했고, 클로도베크는 아버지 실데리크와 자신의 20년 가까운 숙적이었던 그를 참수하여 2대에 걸친 원한을 풀게 됩니다.
10. 시아그리우스의 죽음은, 갈리아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로마 직계 세력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후 서유럽에서 로마 제국의 전통은 이탈리아의 오도아케르-테오도리크 왕국과 프랑크 왕국, 비시고트 왕국, 이 세 왕국에 의해 계승되고 변질된 형태로나마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 마그누스 - 샤를마뉴에 의해 이 세 왕국이 통합되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게르만에 의한 로마 제국의 부활이 이루어지게 되지요.
한마디로, 시아그리우스의 실패는 비게르만족에 의한 로마의 부활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볼때, 이는 될 일이 아니었겠지만, 만약 시아그리우스가 프랑크 왕국의 공세를 막아내고 갈리아의 실력자로 존속했다면, 어쩌면 후세의 신성로마제국은 프랑크가 아닌 갈로-로만 왕국에 의해 탄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갈리아-골이라는 이름은 계속 존속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프랑스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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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디씨인사이드 역사갤러리 .........의 글 2007/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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