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루요가를 수행할 때 관상을 잘 하는 사람도 있고, 관상을 잘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수승한 스승과 선한 인연을 맺는 것은 우리 일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수업 전에 외우는 <구루요가속사가지>는 오늘 강의할 구루요가와 기본적으로 같다. 네 개 부분으로 나뉜다. 첫번째 단계는 복전을 관상하는 것이다. 여러 불보살의 본체와 스승이 하나다. 이 의궤의 특징은 스승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바로 직메푼촉 법왕이나 자기가 신심을 갖고 있는 스승을 관상한다. 두번째 단계는 진실하고 맹렬히 기도한다. 세번째 단계는 스승께서 빛이 되어 나의 가슴으로 들어오시고, 가슴에서 무연 중에 안주하신다. 마지막은 회향과 발원이다.
<개현해탈도>의 구루요가 내용도 기본적으로 같다.
먼저 왜 구루요가를 수행해야 하는지와 구루요가의 공덕을 설명하겠다.
현교와 밀교에 모두 구루요가가 있다.
구루요가는 밀교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수행법이다. 그러면 현교에는 구루요가가 없는가? 있다. 현교에도 ‘모든 공덕이 선지식에 의해 생긴다’’는 말이 있다. <화엄경> 등 현교 대승경전에 모두 이런 내용이 있다.
성문승의 제자에게도 붓다께서 이런 가르침을 주셨다. <대고경>에 이런 기록이 있다. 붓다께서 열반에 가까워졌을 때, 아난이 매우 슬퍼했다. 붓다께서 그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슬퍼하지 말라. 아난아 울지 말라. 나는 미래에 선지식이 되어 너희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붓다께서 문수보살, 보현보살, 금강수보살 등 대승보살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성문승의 권속 아난 존자 앞에서 하셨다. 붓다께서 그에게 너희들은 상심하지 말라, 내가 다음에 선지식의 모습을 와서 너희를 제도할 것이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구루요가를 수행하려면 신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수행을 할 때 스승이 매우 중요하다. 스승에게 신심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현교 경전과 논전에서 구루요가 수행하는 방법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간단한 방식으로 스승을 부처님으로 보라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스승님을 부처님의 화신으로 보거나 스승님과 부처님이 하나라는 방식으로 구루요가를 수행한다.
스승에 의지하기 전에 관찰한다
그러면 모든 스승이 부처님과 같을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스승들은 분명히 보현왕여래,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어떤 스승은 보살의 과위가 있다. 그러나 아직 등지에 오르지 못한 스승도 있다. 그래도 보리심은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스승도 있다. 세상의 공덕도 갖추지 못한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아주 바르지 않은 행위를 하는 이들도 있다. 사정이 이러니 누구든지 스승에 의지하기 전에 반드시 두번 세번 관찰해야 한다. 나는 대원만이나 전행 법문을 강의하기 전에 수차례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떤 선지식이나 출가자를 판별하고 관찰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사람들은 재가자는 관찰하지 않으면서 출가자를 보면 습관적으로 경찰관의 눈으로 잘못을 관찰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경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또 나와 같은 사람만이 보특가라를 판별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판별하지 못한다. 어떤 선지식은 거지, 기녀, 백정의 모습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평소 수행하면서 모든 출자가, 수행자를 청정심으로 관찰해야 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선지식에 의지하려 한다면 미리 관찰해야 한다. 관찰하지 않으면 지비광 존자가 말씀한 것처럼 매우 위험해진다. 그래서 많은 경전과 논전에서 스승을 6년, 10년, 12년 동안 관찰하라고 했다. 전통문화에서도 한 사람을 관찰하는 데 6년이 걸린다고 했다.
관찰하고 나서 의지하기로 결정했다면 이 선지식이 어떤 모습이든지 청정심을 가져야 한다. 요새 사람들은 관찰해야 할 때는 관찰하지 않고 배고픈 개가 고기를 본 것처럼 바로 받아들여버린다. 반면 관찰하지 않아야 할 때는 또 관찰한다. 어떤 스승에게 법을 얻고 관정을 받고 나서도 이것이 잘못되었네, 저것이 잘못되었네 하고 말하는데, 이것은 순서가 틀렸고 잘못된 행위다.
어떻게 스승을 의지할까?
스승은 누구인가? 스승은 관정이나 법을 전함으로써 여러분과 법인연을 맺은 선지식이다. 요새 어떤 사람들은 ‘나의 스승은 저 분이고, 나에게 법을 전한 분은 나의 스승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불교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언제부터 생길까? 스승이 ‘너는 내 제자이고 나는 너의 스승이다’라고 인가하면 여러분이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말로 하는 것일 뿐, 정말로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4구로 된 게송 이상의 불법을 들을 때부터 여러분이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그가 스승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인연을 맺기 전에 잘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인연을 맺으면 스승하고 갈등을 빚으면 안 된다. 스승에게 이러저런 분별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 먼저 전승을 얻고 관정을 받는 등 현교와 밀교의 법요를 얻고 나서 나중에 눈에 차지 않는다고 스승에 사견을 갖고 비방하고 심지어 버리면 스승이 손해볼 일은 없지만 여러분 상속 중의 본래부터 있던 지혜에 장애가 생긴다. 이것은 불공의 연기이고 거짓없는 인과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절대 맹목적으로 스승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찰하고 나서 의지하라.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서든 스승에게 신심을 가져야 한다.
물론 스승에 대한 신심이 말처럼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에게 신심이 있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신심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어떤 스승에게 신심이 없었는데 1~20년 지나고 난 후에 그 스승을 점차 알아가면서 굳은 신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사실, 스승의 공덕을 모르면 물러서지 않는 신심을 갖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심을 갖기 위해서는 의지하려는 스승의 공덕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