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초, 소련군이 베를린 동쪽의 오데르 강까지 접근해 오자 독일군은 오데르 강과 베를린을 요새화 하는 작업을 급히 했다. 하지만, 독일군 병력은 베를린의 경우 10만도 못 넘는 병력이었고, 상대인 소련군은 400만 명이 넘고 있었다. 더욱이 소총과 탄약, 식량 등은 부족했고, 전차는 10여 대 가량 밖에 안 남았으며, 화포는 아예 없었다고 봐야 했다. 그나마 일회용 휴대 대전차포 ‘팬저파우스트’는 많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베를린을 사수하긴 힘들었다.

↑진격하는 소련 전차.
브란덴부르크 문 앞은 참호를 쌓기 위한 공사가 열렸고, 임시 장애물이 베를린 시내에 만들어졌다. 나치 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이 장면을 보고 베를린을 방어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을 나타냈지만 그것이 거짓이란건 누구나 알았다. 오히려 이 한 마디가 베를린의 상황을 제대로 나타냈다. “신이시여, 베를린의 시민들을 지켜주시옵소서.”
http://blog.naver.com/yoonjy2k
4월 16일, 새벽 5시, 아직 오데르 강을 건너지 못했던 소련군은 1700여 문의 각종 화포를 동원해 오데르 강 서안에 집중 포격을 감행한다. 30분 간의 준비 포격이 끝난 후, 소련군 전차 1800여 대가 강을 건너 베를린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도중에 최후의 정예부대인 팔슈름야거 제 9공수여단의 필사적인 저항에 의해 진격이 잠시 중단된다. 이틀 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독일 공수부대는 큼 피해를 입고 베를린으로 후퇴한다.

↑소련군 포병들이 베를린을 향해 야포를 장전하고 있다.
4월 20일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소련군 제 5야전군 예하 제 266사단의 포병대가 베를린을 향한 최초의 포격을 개시한다.마침내 베를린에서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 4월 25일까지 베를린에 발사된 포탄은 180만 발이 넘었고, 그 중량은 약 3만 6천 톤 가량이 되었다. 히틀러는 그 때까지도 존재하지 않는 부대를 지휘하며 다시 전세를 역전할 수 있을거라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혼란에 빠져 도시 서쪽으로 도망쳤고, 그런 도망자들을 친위대원들은 미친 듯이 패배주의자란 명목으로 처형하고 다녔다. 4월 27일, 소련군은 독일의 제국 의사당 ‘라이스탁’을 노동 혁명 기념일인 5월 1일까지 점령하기로 결정한다. 같은 날, 소련군 전차가 쏜 포탄이 티어르가르덴 구역의 동물원에 명중해, 그 안에 있던 동물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4월 28일, 소련 제 3군 예하 15사단은 슈프레 운하를 건너 라이스탁 바로 앞까지 전진하는데 성공한다. 같은날, 독일 친위대는 소련군이 베를린의 지하철 터널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터널과 운하가 가까운 지점에서 폭탄을 터트려 터널 안으로 물이 들어가게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지하철 역으로 피신한 많은 시민들이 도망치지 못하고 익사하고 말았다.

↑복수의 순간이 왔다. 하수도에 숨은 독일군을 끌어올리는 소련군.
그날 오후, 히틀러의 지하 방공호에서는 두가지 사건이 있었다. 히틀러는 팬저파우스트로 두 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운 16세의 히틀러 유겐트의 단원인 ‘빌헬름 휴프너’라는 소년에게 손수 철십자 훈장을 달아주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집권 초부터 숨겨 왔던 자신의 애인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했다. 결혼의 주례는 ‘발터 바그너’라는 베를린의 하급 공무원이 하게 되었고, 결혼식이 끝난 후, 다시 전선에 복귀한 바그너는 전사했다.
http://blog.naver.com/yoonjy2k
4월 29일, 함부르크로 옮겨간 베를린 방송은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바그너의 오페라 ‘신들의 황혼’을 반복해서 방송했다. 베를린의 상황은 지옥이었다. 소련군은 마치 산적떼처럼 온갖 물품을 약탈했고, 곳곳에서 학살도 자행되었다.
4월 30일 오후 3시 30분, 히틀러는 자신의 침실에서 자살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갖고 있던 ‘발터 PP’권총으로 자살했고, 에바 브라운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그들의 시체는 친위대 대원들에 의해 밖으로 옮겨 졌고, 그들의 시체에는 휘발유가 뿌려졌고, 이어 불이 붙으면서 시신들은 불태워졌다. 불타는 시신을 보며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 당원들은 나치식 경례를 했었고, 이로써 전 유럽을 석권했었던 독재자 히틀러는 자기에게 알맞은 최후를 맞이한다. 그가 했던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나의 개인 재산은 모두 나치당에 헌납한다. 나치당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독일 정부에 바친다. 만일 독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그 이 상 할 말이 없다.”(히틀러의 재산은 현재 독일 정부가 보유하고 있으며, 히틀러의 가족에게 이 재산을 가져가라고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히틀러의 가족이라하는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일회용 대전차포 '팬저파우스트'의 사용법을 배우는 독일 여성.
같은 날, 소련군은 라이스탁 내부로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건물 내부에서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다. 어두운 방에서 기관총 속사음과 백병전이 벌어졌고, 그것은 공방전이 아닌, 치열한 ‘잔적 소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4월 30일, 밤 10시 30분 경, 미하일 예고로프라는 병사가 라이스탁 옥상의 추녀 끝에 있는 틈새에 붉은 깃발을 계양했다. 마침내 베를린 함락이 기정사실화 된 것이었다.
이튿날인 5월 1일 오전 6시를 기해 라이스탁을 수비하던 독일군 전원이 항복했다.(정확히 말하자면 생존자들이 제발로 걸어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전 7시, 베를린 수비의 총 책임을 맡고 있던 바이틀링 중장이 추이코프의 사령부로 출두해 베를린의 항복을 인정했다. 이로써 소련군은 베를린을 완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파괴된 하노마그 장갑차와 친위대원들.
한편 4월 30일, 베를린이 아닌 다른 곳에 있던 독일 해군 총사령관 칼 되니츠 제독은 아직까지 살아있던 히틀러로부터 후계자로 임명 받는다는 전문을 받는다. 이에 따라 독일 북부의 플린츠부르크가 임시 수도로 정해지게 되고, 되니츠 제독은 독일군의 총 사령관이 된다.
아직까진 많은 독일 병사들이(동부전선과 베를린에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한 병사들까지 포함한 약 180만 명) 서방 연합군에게 항복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과 교섭하기 위해 자신의 해군 총사령관 후임인 프리데부르크 제독일 5월 3일, 항복 교섭을 위해 몽고메리의 제 21집단군 사령부로 떠났다. 상대적으로 연합군은 독일 해군에 대한 적개심이 적다는데 따른 생각이었다.
교섭자리에서 몽고메리는 서부전선의 모든 독일군이 항복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5월 4일 오후 2시, 독일군은 영긱이 요구하는 모든 지역의 독일군에 대해 항복할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아직 전체 독일군에 대한 항복 여부는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은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의 승낙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말메디 학살의 충격으로 ‘독일군복을 입은 자는 누구도 보지 않겠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아이젠하워를 만날 수 없었다. 오직, 연합군은 독일의 전면적인 항복을 요구했고, 되니츠는 또다시 프리데부르크와 함께 이번엔 요들 상급 대장을 연합군 사령부로 보냈다.
http://blog.naver.com/yoonjy2k
5월 6일, 저녁부터 회담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연합군이 오랫동안 고심 끝에 만든 항복 문서에 대해 여러가지를 따졌지만, 연합군 사령부는 강경한 태도였다. 요들은 되니츠에게 상황을 보고했고, 마침내 되니츠도 항복을 승인했다. 5월 8일, 02시, 독일 대표인 요들을 비롯해 전승국 4개국-미,영,불,소-의 12명의 대표 등이 참석한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요들은 부관이 가지고 있던 만년필로 항복문서에 자신의 서명을 했다.

↑항복 조인문에 서명하는 요들 상급대장.
마침내 1945년 5월 8일 02시 41분, 독일이 전면적인 항복을 선언했다. 요들은 서명을 마치고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좋든 싫든 우리 독일의 운명은 승리자들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나와 우리 독일 국민 전체는 이제 단지 전승국의 관용과 아량을 기대할 뿐입니다.” 아이젠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5년 5월 8일 02시 41분. 우리 연합군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노발대발 대는 목소리가 모스크바에서 날아왔다. 소련군은 이미 렝에서의 항복식 때 소련군 대표가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점령된 베를린에서 자신들이 주연을 맡은 항복조인식을 요구했고, 결국 5월 8일 오후에 베를린에서 한 번 더 조인식이 열렸다. 베를린 항복 조인식은 육군 원수 카이텔 원수가 조인식에 서명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후 서방 국가는 5월 8일이, 소련 쪽은 5월 9일을 각각 VE-데이(유럽 전승기념일)로 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가졌다.

↑소련의 T-34전차가 전진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전선에서는 아직도 소련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소규모의 독일 병사들이 저항을 펼쳤고, 그때까지도 많은 병사들이 영미 연합군 주둔지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5월 23일, 되니츠 정부의 각료가 전부 체포되면서 이제 독일은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 서독과 동독의 분할 통치 시대가 막을 연다.

↑히틀러의 마지막 사진 중의 하나, 율리우스 샤우프가 옆에서 히틀러와 함께 파괴된 총통 관저를 둘러보고 있다.

↑1945년 5월 3일, 소련군이 파괴된 라이스탁으로 진격하는 선전사진.

↑전쟁 후, 베를린은 서방연합군과 소련에 의해 분할 통치된다. 1990년대까지 파괴된 건물의 복구가 이루어졌다.

↑미군 병사가 총통관저의 히틀러 침실을 둘러보고 있다.

↑붉은 군대 62군 사령관(스탈린그라드에서)이었던 바실리 I. 추이코프 사령관.

↑히틀러가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을 귀여워(?)해주고 있다.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차이는 매우 컸다.(해석 자체가 너무 어려워서;;;)

↑얄타 회담에서, 미,소,영 3국의 지도자들은 세계를 나눠먹자는 계획을 세웠다.

↑1945년 6월, 제국 헌법 재판소에서 만난 소련병사와 미군 병사

↑라이스탁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

↑1945년 5월 3일, 소련의 베를린 점령 재현 연출 사진.

↑라이스탁을 둘러보고 있는 주코프 원수.

↑1945년 4월 13일.

↑독일의 항복 소식 직후, 런던에서 촬영된 사진.

↑1945년 5월 8일, 항복식에서 서명하는 요들 상급대장.

↑소련군의 진출 기념비. 현재까지 베를린에 세워져 있다.

↑라이스탁의 점령을 기념하는 기록화

↑베를린에 진입한 소련군 전차대.

↑유럽 전선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태평양 전선의 미군 병사들.

↑전쟁이 끝나고,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처칠을 런던 시민들이 둘러싸고 있다. 전쟁이 끝난다고 했을 때, 처칠은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고 한다. "모든 런던 시민들이 마실 술을 준비해라."

↑1945년 4월 25일에 촬영된 히틀러의 마지막 사진 중의 하나.

↑알프레드 요들의 서명이 적힌 항복 조인문의 사본.

↑파괴된 라이스탁을 바라보는 소련 전차병들.

↑항복하는 독일군 병사들.

↑엘베강에서 축배를 드는 소련군과 미군 병사들.

↑'카츄사'로켓포를 장전하는 소련 포병들.

↑1945년 4월 28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베를린 전투도.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의 베를린 전투도.

↑베를린을 향해!

↑베를린에 진입한 소련 전차대.

↑소련군이 이기고 있었지만, 음주교전(?)을 하는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공격당하기 쉬웠다.

↑국민 돌격대의 소년 병사.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전사한 독일군 시신. 선전사진이다.

↑독일의 항복 직후, 미군 병사들.

↑요들의 항복 서명

↑독일의 프리덴부르크 제독(가운데)과 몽고메리(오른쪽).

↑소련과 미국의 선전사진. 그러나 10년도 채 안되어 이들은 등 뒤에 총을 숨기고 상대를 노려보는 상태가 되고 만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뉴욕 시민들-1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뉴욕 시민들-2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뉴욕 시민들-3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뉴욕 시민들-4

↑엘베강에서 만난 소련군과 미군 병사.

↑베를린 점령 후, 브란덴부르크 문 앞을 행진하는 소련군.

↑진격하는 소련 전차.
브란덴부르크 문 앞은 참호를 쌓기 위한 공사가 열렸고, 임시 장애물이 베를린 시내에 만들어졌다. 나치 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이 장면을 보고 베를린을 방어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을 나타냈지만 그것이 거짓이란건 누구나 알았다. 오히려 이 한 마디가 베를린의 상황을 제대로 나타냈다. “신이시여, 베를린의 시민들을 지켜주시옵소서.”
http://blog.naver.com/yoonjy2k
4월 16일, 새벽 5시, 아직 오데르 강을 건너지 못했던 소련군은 1700여 문의 각종 화포를 동원해 오데르 강 서안에 집중 포격을 감행한다. 30분 간의 준비 포격이 끝난 후, 소련군 전차 1800여 대가 강을 건너 베를린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도중에 최후의 정예부대인 팔슈름야거 제 9공수여단의 필사적인 저항에 의해 진격이 잠시 중단된다. 이틀 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독일 공수부대는 큼 피해를 입고 베를린으로 후퇴한다.

↑소련군 포병들이 베를린을 향해 야포를 장전하고 있다.
4월 20일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소련군 제 5야전군 예하 제 266사단의 포병대가 베를린을 향한 최초의 포격을 개시한다.마침내 베를린에서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 4월 25일까지 베를린에 발사된 포탄은 180만 발이 넘었고, 그 중량은 약 3만 6천 톤 가량이 되었다. 히틀러는 그 때까지도 존재하지 않는 부대를 지휘하며 다시 전세를 역전할 수 있을거라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혼란에 빠져 도시 서쪽으로 도망쳤고, 그런 도망자들을 친위대원들은 미친 듯이 패배주의자란 명목으로 처형하고 다녔다. 4월 27일, 소련군은 독일의 제국 의사당 ‘라이스탁’을 노동 혁명 기념일인 5월 1일까지 점령하기로 결정한다. 같은 날, 소련군 전차가 쏜 포탄이 티어르가르덴 구역의 동물원에 명중해, 그 안에 있던 동물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4월 28일, 소련 제 3군 예하 15사단은 슈프레 운하를 건너 라이스탁 바로 앞까지 전진하는데 성공한다. 같은날, 독일 친위대는 소련군이 베를린의 지하철 터널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터널과 운하가 가까운 지점에서 폭탄을 터트려 터널 안으로 물이 들어가게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지하철 역으로 피신한 많은 시민들이 도망치지 못하고 익사하고 말았다.

↑복수의 순간이 왔다. 하수도에 숨은 독일군을 끌어올리는 소련군.
그날 오후, 히틀러의 지하 방공호에서는 두가지 사건이 있었다. 히틀러는 팬저파우스트로 두 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운 16세의 히틀러 유겐트의 단원인 ‘빌헬름 휴프너’라는 소년에게 손수 철십자 훈장을 달아주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집권 초부터 숨겨 왔던 자신의 애인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했다. 결혼의 주례는 ‘발터 바그너’라는 베를린의 하급 공무원이 하게 되었고, 결혼식이 끝난 후, 다시 전선에 복귀한 바그너는 전사했다.
http://blog.naver.com/yoonjy2k
4월 29일, 함부르크로 옮겨간 베를린 방송은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바그너의 오페라 ‘신들의 황혼’을 반복해서 방송했다. 베를린의 상황은 지옥이었다. 소련군은 마치 산적떼처럼 온갖 물품을 약탈했고, 곳곳에서 학살도 자행되었다.
4월 30일 오후 3시 30분, 히틀러는 자신의 침실에서 자살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갖고 있던 ‘발터 PP’권총으로 자살했고, 에바 브라운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그들의 시체는 친위대 대원들에 의해 밖으로 옮겨 졌고, 그들의 시체에는 휘발유가 뿌려졌고, 이어 불이 붙으면서 시신들은 불태워졌다. 불타는 시신을 보며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 당원들은 나치식 경례를 했었고, 이로써 전 유럽을 석권했었던 독재자 히틀러는 자기에게 알맞은 최후를 맞이한다. 그가 했던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나의 개인 재산은 모두 나치당에 헌납한다. 나치당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독일 정부에 바친다. 만일 독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그 이 상 할 말이 없다.”(히틀러의 재산은 현재 독일 정부가 보유하고 있으며, 히틀러의 가족에게 이 재산을 가져가라고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히틀러의 가족이라하는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일회용 대전차포 '팬저파우스트'의 사용법을 배우는 독일 여성.
같은 날, 소련군은 라이스탁 내부로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건물 내부에서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다. 어두운 방에서 기관총 속사음과 백병전이 벌어졌고, 그것은 공방전이 아닌, 치열한 ‘잔적 소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4월 30일, 밤 10시 30분 경, 미하일 예고로프라는 병사가 라이스탁 옥상의 추녀 끝에 있는 틈새에 붉은 깃발을 계양했다. 마침내 베를린 함락이 기정사실화 된 것이었다.
이튿날인 5월 1일 오전 6시를 기해 라이스탁을 수비하던 독일군 전원이 항복했다.(정확히 말하자면 생존자들이 제발로 걸어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전 7시, 베를린 수비의 총 책임을 맡고 있던 바이틀링 중장이 추이코프의 사령부로 출두해 베를린의 항복을 인정했다. 이로써 소련군은 베를린을 완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파괴된 하노마그 장갑차와 친위대원들.
한편 4월 30일, 베를린이 아닌 다른 곳에 있던 독일 해군 총사령관 칼 되니츠 제독은 아직까지 살아있던 히틀러로부터 후계자로 임명 받는다는 전문을 받는다. 이에 따라 독일 북부의 플린츠부르크가 임시 수도로 정해지게 되고, 되니츠 제독은 독일군의 총 사령관이 된다.
아직까진 많은 독일 병사들이(동부전선과 베를린에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한 병사들까지 포함한 약 180만 명) 서방 연합군에게 항복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과 교섭하기 위해 자신의 해군 총사령관 후임인 프리데부르크 제독일 5월 3일, 항복 교섭을 위해 몽고메리의 제 21집단군 사령부로 떠났다. 상대적으로 연합군은 독일 해군에 대한 적개심이 적다는데 따른 생각이었다.
교섭자리에서 몽고메리는 서부전선의 모든 독일군이 항복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5월 4일 오후 2시, 독일군은 영긱이 요구하는 모든 지역의 독일군에 대해 항복할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아직 전체 독일군에 대한 항복 여부는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은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의 승낙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말메디 학살의 충격으로 ‘독일군복을 입은 자는 누구도 보지 않겠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아이젠하워를 만날 수 없었다. 오직, 연합군은 독일의 전면적인 항복을 요구했고, 되니츠는 또다시 프리데부르크와 함께 이번엔 요들 상급 대장을 연합군 사령부로 보냈다.
http://blog.naver.com/yoonjy2k
5월 6일, 저녁부터 회담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연합군이 오랫동안 고심 끝에 만든 항복 문서에 대해 여러가지를 따졌지만, 연합군 사령부는 강경한 태도였다. 요들은 되니츠에게 상황을 보고했고, 마침내 되니츠도 항복을 승인했다. 5월 8일, 02시, 독일 대표인 요들을 비롯해 전승국 4개국-미,영,불,소-의 12명의 대표 등이 참석한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요들은 부관이 가지고 있던 만년필로 항복문서에 자신의 서명을 했다.

↑항복 조인문에 서명하는 요들 상급대장.
마침내 1945년 5월 8일 02시 41분, 독일이 전면적인 항복을 선언했다. 요들은 서명을 마치고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좋든 싫든 우리 독일의 운명은 승리자들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나와 우리 독일 국민 전체는 이제 단지 전승국의 관용과 아량을 기대할 뿐입니다.” 아이젠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5년 5월 8일 02시 41분. 우리 연합군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노발대발 대는 목소리가 모스크바에서 날아왔다. 소련군은 이미 렝에서의 항복식 때 소련군 대표가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점령된 베를린에서 자신들이 주연을 맡은 항복조인식을 요구했고, 결국 5월 8일 오후에 베를린에서 한 번 더 조인식이 열렸다. 베를린 항복 조인식은 육군 원수 카이텔 원수가 조인식에 서명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후 서방 국가는 5월 8일이, 소련 쪽은 5월 9일을 각각 VE-데이(유럽 전승기념일)로 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가졌다.

↑소련의 T-34전차가 전진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전선에서는 아직도 소련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소규모의 독일 병사들이 저항을 펼쳤고, 그때까지도 많은 병사들이 영미 연합군 주둔지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5월 23일, 되니츠 정부의 각료가 전부 체포되면서 이제 독일은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 서독과 동독의 분할 통치 시대가 막을 연다.

↑히틀러의 마지막 사진 중의 하나, 율리우스 샤우프가 옆에서 히틀러와 함께 파괴된 총통 관저를 둘러보고 있다.

↑1945년 5월 3일, 소련군이 파괴된 라이스탁으로 진격하는 선전사진.

↑전쟁 후, 베를린은 서방연합군과 소련에 의해 분할 통치된다. 1990년대까지 파괴된 건물의 복구가 이루어졌다.

↑미군 병사가 총통관저의 히틀러 침실을 둘러보고 있다.

↑붉은 군대 62군 사령관(스탈린그라드에서)이었던 바실리 I. 추이코프 사령관.

↑히틀러가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을 귀여워(?)해주고 있다.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차이는 매우 컸다.(해석 자체가 너무 어려워서;;;)

↑얄타 회담에서, 미,소,영 3국의 지도자들은 세계를 나눠먹자는 계획을 세웠다.

↑1945년 6월, 제국 헌법 재판소에서 만난 소련병사와 미군 병사

↑라이스탁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

↑1945년 5월 3일, 소련의 베를린 점령 재현 연출 사진.

↑라이스탁을 둘러보고 있는 주코프 원수.

↑1945년 4월 13일.

↑독일의 항복 소식 직후, 런던에서 촬영된 사진.

↑1945년 5월 8일, 항복식에서 서명하는 요들 상급대장.

↑소련군의 진출 기념비. 현재까지 베를린에 세워져 있다.

↑라이스탁의 점령을 기념하는 기록화

↑베를린에 진입한 소련군 전차대.

↑유럽 전선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태평양 전선의 미군 병사들.

↑전쟁이 끝나고,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처칠을 런던 시민들이 둘러싸고 있다. 전쟁이 끝난다고 했을 때, 처칠은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고 한다. "모든 런던 시민들이 마실 술을 준비해라."

↑1945년 4월 25일에 촬영된 히틀러의 마지막 사진 중의 하나.

↑알프레드 요들의 서명이 적힌 항복 조인문의 사본.

↑파괴된 라이스탁을 바라보는 소련 전차병들.

↑항복하는 독일군 병사들.

↑엘베강에서 축배를 드는 소련군과 미군 병사들.

↑'카츄사'로켓포를 장전하는 소련 포병들.

↑1945년 4월 28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베를린 전투도.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의 베를린 전투도.

↑베를린을 향해!

↑베를린에 진입한 소련 전차대.

↑소련군이 이기고 있었지만, 음주교전(?)을 하는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공격당하기 쉬웠다.

↑국민 돌격대의 소년 병사.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전사한 독일군 시신. 선전사진이다.

↑독일의 항복 직후, 미군 병사들.

↑요들의 항복 서명

↑독일의 프리덴부르크 제독(가운데)과 몽고메리(오른쪽).

↑소련과 미국의 선전사진. 그러나 10년도 채 안되어 이들은 등 뒤에 총을 숨기고 상대를 노려보는 상태가 되고 만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뉴욕 시민들-1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뉴욕 시민들-2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뉴욕 시민들-3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뉴욕 시민들-4

↑엘베강에서 만난 소련군과 미군 병사.

↑베를린 점령 후, 브란덴부르크 문 앞을 행진하는 소련군.
다음검색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윤준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6.03.09 여기서 끝이냐고요? 노노, 아직 남은 부분이 있습니다.
-
작성자새로미 작성시간 06.03.09 궁금한게 있는데, 히틀러가 여자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여?
-
작성자윤준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6.03.10 -_-;;;; 혹 괴물딴지 일보인가 그거 보셨습니까? 그거 절~대!!! 믿으면 안되는 겁니다. 히틀러는 1차대전 때 군대에서 하사관으로 훈장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그 정신나간 어린이 현혹 신문에서 무솔리니도 여자라고 한 것 같았는데 그거 보고 사람들과 함께 신문사 폭파시킬 모의도 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
작성자초보 작성시간 06.03.11 하여튼 음모론자(?)들의 말은 가관입니다. 더 찾아보면 웃긴 말이 있지요.ㅡ,ㅡ;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