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바다의 유목민 - 백제인 이야기 (70)

작성자잉걸|작성시간12.01.12|조회수154 목록 댓글 2

* 인용한 글 : 붉은색

 

▶ 백제 궁월군(弓月君)의 도래

 

다시『일본서기』「응신천황」기(紀)로 돌아가자. 나는 지난 연재분에서 서기 397년에 백제 진왕의 삼한백제 재(再)건국 소식을 들은 한성백제가 사신을 보냈다고 말했다(「백제인 이야기」68회 참고). 그런데 이 소식에 반응한 사람은 아신왕(아화왕)만이 아니다. 백제의 다른 왕족도 기내로 건너와 진왕(응신)을 만난 것이다.

 

“14년 … 이해, 궁월군(弓月君)이 백제(百濟)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글을 올려 아뢰기를, ‘신이 우리 나라 120현(縣)의 인민을 거느리고 귀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新羅)사람이 방해하여, 다 가라국(加羅國)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보내 궁월(弓月)의 인민을 가라로부터 불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서기』「응신천황」기

 

동아시아 사회에서 “군(君)은 왕자를 비롯한 왕족(부마 - 임금의 사위 - , 왕의 삼촌, 왕의 사촌, 왕의 동생 …)들을 일컫는 말이었다(서기 2008년 3월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시는 이영춘 교수님에게서 들은 사실).” 한 예로, 세종대왕은 왕자였던 시절 ‘충녕대군’으로 불렸는데 이는 존칭이었고 그의 성(姓)은 ‘이’요, 이름은 ‘도’였다. 그렇다면 ‘궁월군’도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존칭이나 별명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궁월’은 “활(弓) 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 마치 月자처럼 느껴지는데(김상. 그러나 이 가설은 내가 김상에게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 모습에서 비롯된 별명이라는 것이다. 활은 화살을 재고 시위를 당기면 C자 형이나 역(逆) C자 형이 되는데, 그 모습이 꼭 초승달이나 그믐달 같기 때문에 ‘활을 달처럼 당기는 왕족’이라는 뜻으로 ‘궁월군’이라는 존칭을 얻은 것이다. 궁월군을 궁월이라고 부른 것은 충녕대군을 충녕이라고 줄여서 부른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봐야 한다. 그는 활을 즐겨 쏘는 군인이자 왕족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기 몇 년에 기내로 건너와 진왕을 만났을까?『일본서기』「응신기」를 보면 응신천황 14년, 그러니까 서기 403년에 궁월군이 응신을 만났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①서기 403년에 궁월군이 기내 지방으로 건너오고

 

②곧 응신이 갈성습진언을 보내 백제 인민들을 옛 가야 땅인 경상남도에서 불러들이려고 했으나

 

③3년이 지난 서기 406년에도 습진언과 백제 인민들이 경상남도를 떠나지 못했다

 

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위 구절은 “제가 인솔해 오던 백제 120현민이 신라인 때문에 길이 막혀 가라국에 발이 묶였습니다. 이들을 데리러 습진언을 가라에 보냈으나 3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풀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경우 궁월군이 건너온 시기와 습진언이 억류된 시기가 달라진다. 궁월군이 서기 403년 이전에 건너와 3년 동안 기다리다가 상황이 안 풀리자 응신에게 상소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하자면

 

․ 弓月君이 應神에 보고한 것은 AD 403(應神 14年)이므로,

 

․ 弓月君이 任那加羅에 襲津彦을 파견한 것은 應神에 보고하기 3년 전인 AD400이었을 것이고,

 

․ 弓月君에 인솔되던 百濟 120 縣民이 任那加羅에 도착한 시기는 AD400 이전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궁월군은 서기 403년에 기내로 와서 백제 진왕에게 백제 백성들이 억류된 사실을 알린 게 아니라, 서기 400년에 기내로 와서 먼저 습진언을 경상남도(임나가라)에 보낸 뒤 3년 동안 기다리다가 서기 403년에 백제 진왕(응신)에게 백제 인민들의 억류와 습진언이 돌아오지 않는 사실을 말했다는 이야기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 알려면 피난민이 생긴 해가 언제인지를 살펴보면 된다.

 

고구려의 기록인 비문을 보고, 어느 해에 고구려가 군사를 움직여서 백제인들이 달아났는지를 살펴보자. 광개토왕 비문을 보면 영락(永樂) 9년(서기 399년) 계림국(신라)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왜인(倭人)이 국경에 가득 찼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이를 몰아내 달라고 부탁한다(장수왕대의 고구려인은 왜 땅으로 쫓겨난 백제인들을 ‘왜인’이라고 부르고,『일본서기』편찬자들은 그들을 그냥 ‘백제인’이라고 부른다. 비문은 장수왕대에 선왕인 광개토왕의 활동을 찬양하기 위해 새겨졌다). 광개토왕(고담덕)은 그 부탁을 받아들여 영락 10년(서기 400년)에 “보기(步騎. 보병과 기병) 5만을 이끌고 임나가라에 이르렀다.” 바로 이 때 겨우 탈출하는 데 성공한 몇몇 사람들(궁월군 포함)을 뺀 나머지 백제인들이 억류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서기 396년의 전쟁으로 생긴 피난민들이 서기 397년 진왕의 나라가 일본열도의 기내지역에 들어섰다는 것을 전해들은 뒤 일본열도와 가까운 계림국과 경상남도(임나가라)로 몰려들었고, 2년 동안 이들을 처리하지 못해 쩔쩔매던 계림국이 고구려에 빌붙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며, 결국 서기 400년에 백제 120현민의 지도자였던 궁월군이 가까스로 빠져나와 기내로 달아났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는 문제를 풀기 위해 갈성습진언을 보냈으나, 3년이 지나도 그가 돌아오지 않고 백제 현민들도 오지 않자 최후의 수단으로 백제 진왕에게 이 일을 보고한 것이다. 결국 삼한백제의 망명정부는 최후 수단으로 무력으로 신라를 압박하게 된다.

 

“8월, 평군목토숙녜(平群木菟宿禰), 적호전숙녜(的戶田宿禰)에게 정병을 주어 가라(加羅)로 보냈다. (그들에게) 조(詔)하여, ‘습진언이 오래 돌아오지 않는다. 반드시 신라가 방해하여 체류하고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치고, 그 길을 열어라.’고 하였다. 목토숙녜 들은 정병을 보내 신라의 경계에 이르렀다. 신라왕이 겁이 나서 엎드려 죄를 빌었다. 그래서 궁월의 인민들을 거느리고, 습진언과 같이 돌아왔다.”

 

―『일본서기』「응신천황」16년 조

 

이는 서기 402년에 일어난 일이고, 이 때 건너온 백제인들이 일본의 고분시대를 여는 주인공으로서 오늘날의 일본인이 된다. 민족 교체는 이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무덤에서 나온 고분인의 이가 오늘날의 일본인보다 오늘날의 한국인과 더 비슷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것은 야요이인이 야요이 시대를 연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궁월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백제 피난민 도해작전을 총 지휘한 인물(김상)”이자 “수십만 명, 아니 어쩌면 수백만 명 이상의 민족이동에 해당하는 대규모의 백성들을 이끌고 일본에 도착(김상)”한 사람이기도 하다. 당연히 백제의 피난민들은 궁월군을 지지했을 것이다. 응신은 몇몇 왕족만 데리고 달아났지만, 궁월군은 기내지역으로 온 뒤에도 꾸준히 백제 피난민들을 안전한 일본열도로 데려오려고 했으며, 결국 이를 이루어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그는 이 공로로 새 진왕이 되어 백제의 망명정부를 다스리게 된다.

 

※참고자료

 

―『삼한사의 재조명 2』(김상, 북스힐, 서기 2011년)

 

―『일본서기』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 지문사, 서기 1982년)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김 상 편저, 도서출판 주류성, 서기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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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쉐이 | 작성시간 12.01.27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전 양산에 사는 데 이근처 웅촌이란 동네가 있는데 그기에 피라미드 형태을 띤 석축식 무덤이 있는데 그게 신라 적석식과는 구분이되고 가야의 무덤 형태도 아니고 임나가라와 연관이 있는건 아닌지???? 궁금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잉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1.31 제가 무덤을 직접 보지 못한 상황에서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말씀대로라면 그 무덤은 임나가라식일 가능성이 크네요. 부족한 점이 많은 글을 좋게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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