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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이야기

▩중세에 나라를 세우려고 한 필리핀 원주민

작성자잉걸|작성시간12.04.01|조회수267 목록 댓글 4

지금은 누구나 ‘필리핀’이라는 나라 이름을 자연스럽게 꺼내지만, 사실 이 이름은 필리핀 사람들이 정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쓰였던 이름도 아니다. 서기 1527년 빌랄로보스(Villalobos)가 레이테(Leyte)를 정복했는데, 그는 당시 에스파냐의 임금인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이 땅을 ‘필리피나스(Las Islas Filipinas)'로 이름지었고 이 말이 ’필리핀(Philippines)‘이 되었다. 그러니까 서기 1527년 이전에는 필리핀이라는 이름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자 문화권(조선/류큐/베트남/일본/명明)에서는 필리핀을 ‘여송(呂宋)’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필리핀에서 가장 큰 섬인 루손 섬을 가리킨다. 여송을 북경어(北京語. 흔히 보통화普通話라고 부른다. 현대 중국의 표준어)로 읽으면 ‘루쑹’인데, 이는 루손과 발음이 비슷한 한자들을 모아서 만든 말인 것이다(콜라를 가락可樂이라 쓰고 ‘컬러’로 읽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역사를 들춰보면 필리핀(여송) 제도의 원주민들이 인도네시아나 중국이나 참파, 에스파냐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독자적인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순간이 나온다. 이 일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자.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우선 필리핀 원주민의 사회조직을 설명해야겠다. “필리핀 고대사회의 기본적인 통치형태는 고대 헤브루(히브리 민족. 오늘날의 유태인 - 옮긴이)인들의 통치형태와 유사한(비슷한 - 옮긴이) 점이 많은 족장 지배체제였다. 당시 필리핀인들은 그들의 통치조직 단위를 ‘바랑가이(barangay)'라고 명명했다. 바랑가이는 보통 30내지 100가구 정도가 정착한 지역을 일컫는다(권오신 필리핀 국립대학교 역사학박사/강원대학교 교수. 이하 존칭 생략).” 그러니까 바랑가이는 우리말로 ‘마을’인 셈이다. “그러나 당시 필리핀에는 세부(Cebu), 마닐라(Manila), 비간(Vigan)지역에서의 경우처럼 2,000명 이상의 구성원을 가질 정도로 규모가 큰 바랑가이들도 있었다(권오신).”

 

“초기 바랑가이들은 고대 그리스(정식 국호 ‘헬라스’ - 옮긴이)의 도시국가(폴리스polis - 옮긴이)들과 같이 상호 독립적인 존재들이었다. 각각의 바랑가이는 그 집단의 지배자인 다투(datu)가 통치하였다(권오신).” 다투는 우리말로 바꾸면 ‘족장(族長)’이다. “다투는 다투의 자손 중 지혜가 뛰어나고, 신체가 강건하며, 충분한 재산을 보유해야 했다. 다투는 최고의 행정권자/입법가/재판관이며 군사적 지배자였다. 즉, 다투는 바랑가이에 대해 완전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투는 법을 제정하거나, 사형선고를 내리거나, 전쟁을 선포하거나, 혹은 다른 바랑가이와 조약을 체결하는 등과 같은 중대사를 결정할 때 마을내의 원로들로부터 조언을 듣기도 하였다(권오신).”

 

(권오신은 바랑가이를 다스리던 다투가 히브리인들의 지도자인 사사士師와 비슷하다고 주장하나, 이는 정확하지 않다. 다투는 옛 다투의 핏줄로서 그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사사는 - 『구약성서』[히브리어로는『토라』라고 한다]에 나오는 대로라면 - 그때그때 뽑혔지 세습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히브리인은 사사의 시대가 지나간 뒤에야 왕을 세우게 된다)

 

“평화시의 경우 바랑가이들끼리는 서로 상업과 의견교환을 하기도 하였고, 전통적인 방식인 혈맹(血盟) 형태의 상호 우호동맹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변 바랑가이의 다투 자손끼리 통혼(通婚. 서로 혼인함 - 옮긴이)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시가 되면 상황은 일변하였다. 고대 필리핀인들의 경우도 종종 주변 바랑가이와 전쟁을 치렀는데, 그 경우 살벌한 학살과 약탈이 자행되었고 여자들을 강탈하였으며, 한 바랑가이가 다른 바랑가이와 연합하려는 시도가 보이면 더욱 철저하게 보복하였다(권오신).”

 

이런 식으로 통일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마을끼리 나뉘어 싸우던 필리핀 원주민들은 중세시대가 되자 나라를 세우려고 한다. “파나이(Panay)의 옛 기록에 의하면 1250년경에 보르네이 계열의 다투들이 마닐라를 수도로 삼아 수마크웰(Sumakwel) 다투가 전국 지배권을 갖는 마드야스 연합(Confederation of Madyaas)을 체결하고자 하였으나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후 세부 지역과 마닐라 지역에서도 통합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권오신).” 권오신은 “그것은 곧 국가통합이라는 이념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사실에서 중요성을 찾아야 하겠다.”고 평가했으나, 나는 그것 말고도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선 마드야스 연합을 세우려고 한 해를 살펴보자. 서기 1250년이다. 마젤란이 필리핀 제도에 오기 272년 전에 - 그러니까 유럽인이 필리핀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 필리핀 원주민이 나라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이 무렵 중국은 남송(南宋)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남송은 금(金)과 대립하느라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군사력도 약해 다른 나라를 위협하거나 간섭할 수 없었다. 참파는 50년 전(서기 1200년)에야 무역을 다시 시작했는데 그들은 무역에만 관심을 두었지 식민지를 세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자세한 것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이 게시판의 글인「▩유럽인이 침략하기 전 존재했던 필리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찰」을 참고하라). 베트남 북부에 있던 다이비엣(한자로는 대월大越. 흔히 진조陳朝로 불림)은 남송/참파와 대립하느라 다른 일에 신경쓸 수가 없었다. 필리핀 제도에 가까운 나라로는 스리비자야 제국(오늘날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브루나이를 다스린 나라)이 있었으나, 이 나라는 서기 11세기에 촐라(바라트[인도] 남부에 있던 왕조)의 공격을 받고 큰 타격을 입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크메르 제국(오늘날의 태국/캄보디아/라오스 남부/베트남 남부를 다스리던 나라)은 번성했으나, 이들이 특별히 해외 식민지 건설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증거는 없다. 한마디로 이 사건은 외부인의 개입이나 간섭 없이, 원주민이 자신의 힘만으로 나라를 세우려고 시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해하는 바와는 달리, 필리핀 원주민은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정하고 임금을 뽑으려고 했다. 그리고 마닐라는 서기 1571년 에스파냐가 그곳에 총독부를 두었기 때문에 도시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부터 “요새화된 도시(권오신)”였고(서기 1570년 이곳에 도착한 에스파냐인 ‘미구엘 로페즈 데 레가즈피’는 이곳의 무슬림 지배자인 술라이만과 혈맹조약을 맺었다), 필리핀 원주민은 레가즈피가 오기 321년 전에 이곳을 수도로 삼으려고 했다. 다만 그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이 시도가 성공했다면(그리고 에스파냐가 침략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필리핀을 ‘필리핀’이나 ‘여송’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마드야스’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나아가 필리핀 제도의 남쪽 끝에 있는 섬인 민다나오는 모로족의 독립왕국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그럼 필리핀 원주민들은 왜 하필 이 때 나라를 세우려고 했을까? (원 사료를 접하지 못해 조심스럽게 추측해야 하지만) 내가 볼 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다투들이 부(富)를 쌓아 보다 복잡한 사회를 만들 만한 힘을 키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투들이 보다 안정된 사회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기 10세기부터 시작된 송나라와의 무역은 다투들에게 부를 가져다주었고, 이들은 이 부를 계속 누리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전쟁이 아니라 안정과 평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대처럼 다투들끼리 싸우고 죽이고 약탈하는 일이 계속되면 부를 누리긴커녕 전쟁에 대비하느라 날을 보낼 것이 뻔했고 이는 무역이나 일상생활에도 방해가 되었다. 이는 서기 1090년(또는 서기 1150년) 북미 원주민의 나라인 ‘호데노쇼니’ 연맹(유럽인은 이를 ‘이로쿼이 연맹’이라고 부름)이 민족간의 전쟁을 끝내고 평화와 협력을 불러오기 위해 만들어진 것과 비슷하다(호데노쇼니 연맹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써서 설명할 것임).

 

다만 왜 이 시도가 실패했는지는 알 수 없다. 권오신은 “연합의 경우에도 각 지역 바랑가이들은 해당 지역에서 지배권을 인정받도록 되어 있었기에 통합의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보다 강력한 세력이 구심점 역할을 하지 못해 통일국가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하나, 호데노쇼니 연맹도 서로 힘과 규모가 비슷한 다섯 개 민족(세네카 족, 카유가 족, 오논다가 족, 오네이다 족, 모호크 족)이 평등하게 연합해서 이루어진 나라였고 통치기구는 강제가 아닌 합의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 그리고 그렇게 ‘느슨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유지되었기 때문에 - 이 설명은 합리적이지 않다. 마드야스 연합 수립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두 번이나 통합을 시도했다는 것으로 추측하자면 필리핀 원주민은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듯한데, 이후 이슬람교가 필리핀 제도에 널리 퍼지면서 다시 통일국가가 세워질 뻔 했으나(모로족의 역사를 다룰 때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에스파냐가 도착해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 글에서 다투가 법을 만든다고 설명했는데, ‘필리핀에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에도 법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실까봐, 필리핀 원주민의 관습법을 소개한다. 안타깝게도 인용자가 어느 민족의 법인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필리핀 원주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필리핀의 관습법

 

1. 양친(부모 - 옮긴이)과 형제를 공경할 것. 특히 양친에 대한 존경은 신(神)에 대한 존경과 같이 할 것.

 

2. 결혼은 서로가 승낙하는 것에 의거할 것.

 

3. 남편과 아내는 사회적으로도, 재산권에서도 평등할 것.

 

4. 유언은 엄수되어야 하며 계약은 엄중하게 이행할 것.)

 

* 참고 자료

 

- 네이버 백과사전

 

-『필리핀』(양승윤 외 지음,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펴냄, 서기 2007년 제 2 개정판 발행)

 

-『세계사 큰 줄기 작은 줄기』(와타히끼 히로시 지음, 이희건/이선아 옮김, 가서원 펴냄, 서기 1994년)

 

-『인디언』(찰스 만 지음, 전지나 옮김, 오래된미래 펴냄, 서기 2005년)

 

-『지리 부도』(이기석/오홍석/황만익/반용부/허행구 지음, 보진재 펴냄, 서기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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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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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road | 작성시간 12.04.08 우리 역사의 수준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호데노쇼니 연맹에 대한 글도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잉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4.09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호데노쇼니 연맹을 다룬 글은 빠른 시일 안에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13.12.11 필리핀에 대한 역사에 대해 몰랐는데 새로운 사실을 알고 갑니다...글 스크랩해 갈께요...*.*
  • 답댓글 작성자잉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2.11 그렇게 하세요. 제 글이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단, 글의 출처는 꼭 밝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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