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허준의 출생
우리가 허준의 출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허준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매우 적기 때문에 그래도 조금 형편이 나은 출생.가계에 관한 정보로부터 그의 이후 행적에 관한 실마리를 얻으려는 데 있다. 나는 조선 사회가 신분과 가계가 생활과 학문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사회였다고 가정한다. 좀더 솔직히 말한다면, 허준이 의학 분야를 선택하게 된 동기나 이후 훌륭한 의학 서적을 펴낼 능력을 갖게 교육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전무하기 때문에 신분이나 가계에 관한 정보를 통해 그 동기와 교육을 추론해보고 싶은 것이다.
최근 몇 해 사이에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면서 허준의 출생이 새롭게 재정립되었다. 먼저 허준의 출생 연도가 1547년에서 1539년으로 7년 앞당겨졌다. 서지학자 이양재가 찾아낸 두 기록, 즉 임진왜란 공신의 모임을 그린 [태평회맹도](1604)의 기록과 최립(1539-1612)의 문집인 {간이집}의 '내 동갑내기 태의 허양평군이 의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데 부쳐(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라는 시가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허준의 출생 연도가 달라졌다는 것은 단순히 수치가 변동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출생 연도가 7년 빨라짐으로써, 알려진 그의 행적의 연도가 다 바뀌는 것이다. 이를테면 벼슬길에 나가게 된 것(1569년)이 24세에서 31세로, {동의보감}을 완성한 나이도 64세에서 71세로, 그가 살았던 나이도 70세에서 77세로 늦추어진다. 이 중 벼슬에 든 나이가 늦춰진 것은 두 가지 측면을 더 생각케 한다.
첫째는 허준의 의학 수업 시기가 7년 더 길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 나이가 그가 벼슬길에 들자마자 내의원에서 의원이 얻을 수 있는 거의 최고 품계인 종4품 내의원 첨정(僉正)을 받을만한 충분한 나이라는 점이다. 의학 같은 전문 분야에서 20대 중반에 갓 들어서자마자 내의원의 종4품 첨정 벼슬을 얻는다는 것은 다소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허준은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양천 허씨 세보를 보면 그의 할아버지 허곤(1468-1523)은 무과출신으로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까지 지낸 인물이며, 그의 아버지 허론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낸 인물로 나와 있다. 허준의 의학적 배경과 관련해서 볼 때 이런 집안 배경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비록 직접 의학과 관련되지는 않은 듯 보이게는 하지만, 허준이 제법 권세가 있는 집안에서 컸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준이 맘놓고 공부하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양예수의 후학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13권본 {의림촬요} [역대의학성씨]의 허준 항목을 보면 "성(性)이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두루 밝았다."는 구절이 보인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책에 두루 밝기 위해서는" 허준이 자신의 지적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그런 경제적, 지적 배경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관직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허준이 의학에 몸을 담게 된 까닭은 흔히 그가 서자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양반 집 서자라고 해서 모두 의학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다. 허준의 동생인 허징이 서자이면서도 문과(1586년)를 거쳐 벼슬로 나아간 것이 좋은 예이다. 나는 허준이 의학을 택하게 된 것은 신분상의 부득이함보다는 그의 호학(好學)에서 찾고 싶다. 앞의 든 인용문의 뒷부분을 더 인용하면, "경전과 역사에 두루 밝았다. 더욱이 의학에 정통해서 그 오묘한 이치를 깊이 깨우쳐서 살린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 문장은 좀더 보편적인 학문인 경전과 역사에서 비롯한 학문이 좀더 특수한 학문인 의학에 가서 결실을 맺었다는 서술 구조를 보이고 있다.
문장을 짓는 것이나 인간의 본성을 깨치는 것과 다른 차원이지만 의학은 분명히 오랜 전통을 가진 학문이다. 또 우주와 생명에 관한 심오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 분야이다. 대유학자 주자도 {소문}과 {영추}를 깊이 연구했으며 연단술 책인 {주역참동계}에 주석을 달았으며, 당시 조선의 유학자들도 흔히 이런 책들을 읽었다. 그 중에는 정렴, 김안국, 유성룡 같이 의학에 정통한 인물도 있었다. 비록 모든 학문의 으뜸인 유학만큼은 못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의학은 허준 같이 지적 욕구가 강한 사람에게 매우 매혹적인 분야로 작용했을 것이다.
허준의 의학적 배경과 관련해서 그의 어머니 집안이 주목되고 있다. 유희(1513-1577)의 {미암일기}에 나오는 "봉사 김시흡은 효자 부정(副正) 김유성의 손자이며 허준의 적삼촌(嫡三寸) 숙부"라는 구절은 학자들에게 매우 소중한 힌트를 주었다. 여기서 "적삼촌 숙부"란 허준 생모의 이복 형제를 뜻하는데, 허준의 생모가 서출이기 때문에 정실 태생의 김시흡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김시흡(원문은 김시습으로 되어잇으나 문맥상으로 김시흡이 맞을 것이다.-인용자 주)의 행적을 그들의 족보에서 찾아보면, 놀랍게도 김안국(1478-1543)과 김정국(1485-1541)이 연결된다. 이들은 허준의 외5촌 당숙이 된다. 김안국과 김정국 형제는 둘다 뛰어난 문신.유학자이면서도 의학에도 밝아 김안국은 {언해창진방}을 엮었으며, 김정국은 {촌가구급방}을 지었다. 이런 사실은 비록 허준이 그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고 해도, 넓은 의미에서 허준의 집안이 의학적 분위기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우리가 허준의 출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허준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매우 적기 때문에 그래도 조금 형편이 나은 출생.가계에 관한 정보로부터 그의 이후 행적에 관한 실마리를 얻으려는 데 있다. 나는 조선 사회가 신분과 가계가 생활과 학문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사회였다고 가정한다. 좀더 솔직히 말한다면, 허준이 의학 분야를 선택하게 된 동기나 이후 훌륭한 의학 서적을 펴낼 능력을 갖게 교육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전무하기 때문에 신분이나 가계에 관한 정보를 통해 그 동기와 교육을 추론해보고 싶은 것이다.
최근 몇 해 사이에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면서 허준의 출생이 새롭게 재정립되었다. 먼저 허준의 출생 연도가 1547년에서 1539년으로 7년 앞당겨졌다. 서지학자 이양재가 찾아낸 두 기록, 즉 임진왜란 공신의 모임을 그린 [태평회맹도](1604)의 기록과 최립(1539-1612)의 문집인 {간이집}의 '내 동갑내기 태의 허양평군이 의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데 부쳐(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라는 시가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허준의 출생 연도가 달라졌다는 것은 단순히 수치가 변동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출생 연도가 7년 빨라짐으로써, 알려진 그의 행적의 연도가 다 바뀌는 것이다. 이를테면 벼슬길에 나가게 된 것(1569년)이 24세에서 31세로, {동의보감}을 완성한 나이도 64세에서 71세로, 그가 살았던 나이도 70세에서 77세로 늦추어진다. 이 중 벼슬에 든 나이가 늦춰진 것은 두 가지 측면을 더 생각케 한다.
첫째는 허준의 의학 수업 시기가 7년 더 길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 나이가 그가 벼슬길에 들자마자 내의원에서 의원이 얻을 수 있는 거의 최고 품계인 종4품 내의원 첨정(僉正)을 받을만한 충분한 나이라는 점이다. 의학 같은 전문 분야에서 20대 중반에 갓 들어서자마자 내의원의 종4품 첨정 벼슬을 얻는다는 것은 다소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허준은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양천 허씨 세보를 보면 그의 할아버지 허곤(1468-1523)은 무과출신으로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까지 지낸 인물이며, 그의 아버지 허론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낸 인물로 나와 있다. 허준의 의학적 배경과 관련해서 볼 때 이런 집안 배경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비록 직접 의학과 관련되지는 않은 듯 보이게는 하지만, 허준이 제법 권세가 있는 집안에서 컸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준이 맘놓고 공부하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양예수의 후학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13권본 {의림촬요} [역대의학성씨]의 허준 항목을 보면 "성(性)이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두루 밝았다."는 구절이 보인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책에 두루 밝기 위해서는" 허준이 자신의 지적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그런 경제적, 지적 배경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관직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허준이 의학에 몸을 담게 된 까닭은 흔히 그가 서자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양반 집 서자라고 해서 모두 의학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다. 허준의 동생인 허징이 서자이면서도 문과(1586년)를 거쳐 벼슬로 나아간 것이 좋은 예이다. 나는 허준이 의학을 택하게 된 것은 신분상의 부득이함보다는 그의 호학(好學)에서 찾고 싶다. 앞의 든 인용문의 뒷부분을 더 인용하면, "경전과 역사에 두루 밝았다. 더욱이 의학에 정통해서 그 오묘한 이치를 깊이 깨우쳐서 살린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 문장은 좀더 보편적인 학문인 경전과 역사에서 비롯한 학문이 좀더 특수한 학문인 의학에 가서 결실을 맺었다는 서술 구조를 보이고 있다.
문장을 짓는 것이나 인간의 본성을 깨치는 것과 다른 차원이지만 의학은 분명히 오랜 전통을 가진 학문이다. 또 우주와 생명에 관한 심오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 분야이다. 대유학자 주자도 {소문}과 {영추}를 깊이 연구했으며 연단술 책인 {주역참동계}에 주석을 달았으며, 당시 조선의 유학자들도 흔히 이런 책들을 읽었다. 그 중에는 정렴, 김안국, 유성룡 같이 의학에 정통한 인물도 있었다. 비록 모든 학문의 으뜸인 유학만큼은 못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의학은 허준 같이 지적 욕구가 강한 사람에게 매우 매혹적인 분야로 작용했을 것이다.
허준의 의학적 배경과 관련해서 그의 어머니 집안이 주목되고 있다. 유희(1513-1577)의 {미암일기}에 나오는 "봉사 김시흡은 효자 부정(副正) 김유성의 손자이며 허준의 적삼촌(嫡三寸) 숙부"라는 구절은 학자들에게 매우 소중한 힌트를 주었다. 여기서 "적삼촌 숙부"란 허준 생모의 이복 형제를 뜻하는데, 허준의 생모가 서출이기 때문에 정실 태생의 김시흡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김시흡(원문은 김시습으로 되어잇으나 문맥상으로 김시흡이 맞을 것이다.-인용자 주)의 행적을 그들의 족보에서 찾아보면, 놀랍게도 김안국(1478-1543)과 김정국(1485-1541)이 연결된다. 이들은 허준의 외5촌 당숙이 된다. 김안국과 김정국 형제는 둘다 뛰어난 문신.유학자이면서도 의학에도 밝아 김안국은 {언해창진방}을 엮었으며, 김정국은 {촌가구급방}을 지었다. 이런 사실은 비록 허준이 그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고 해도, 넓은 의미에서 허준의 집안이 의학적 분위기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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