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활한 사람이 얻는 것, 미덕이 있는 사람이 얻는 것들
교활한 사람들이 총리가 되고 악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 그대는 왜 질투심을 느껴야 하는가?
돈, 권력, 명예, 존경을 위한 경쟁이라면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늘 이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경쟁이 내면의 침묵, 평화, 고요, 냉정함, 명상, 신성을 위한 것이라면 악한 사람들은 그 어디에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대가 이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면,
그 사람은 과거의 생을 통해서 그것을 설명해주었을 것이다.
논리가와 신학자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지 않아야 하고 악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그대에게 말해왔다.
그러나 그대는 인생에서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악한 사람들이 정상을 차지하며 즐기고 있다.
당연히 신학자는 과거의 삶, 신념, 업보라는 허구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가짜이며 허구이다.
현실은 매우 단순하다.
선함은 돈을 버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선함은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을 얻는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이다.
미덕이 있는 사람은 세속적인 일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 천국은 없을지 몰라도, 그는 왕의 궁전보다 자신의 허름한 오두막에서 더 큰 지복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미덕이 있는 사람은 궁전을 얻지는 못하겠지만, 지복을 거느릴 수 있을 것이다.
교활한 사람은 궁전에 들어가 살 수는 있겠지만,
마음의 평화, 자기 자신과의 모든 접촉은 잃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나에게 매우 간단한 일이다.
그대가 내면의 세계, 내면의 풍요로움을 원한다면 선량하고 미덕이 있고 착한 사람이 되고,
교활하고 돈만 아는 빈궁한 사람들,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높은 지위에 올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질투하지 말라.
그대는 둘 다를 원하는가?
그대는 돈도 원하고 명상도 원하는가?
그대는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다.
교활한 사람에게도 뭔가는 남겨줘야 한다!
그는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내면에서 너무 큰 고통을 겪고 있다.
그대는 외적으로 고통스러울지는 몰라도 그는 내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통은 그대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따라서 나는 삶이 허구들로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삶은 아주 간단한 수학이다.
그대는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받게 되어 있다.
그대의 특질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요구하지 말라.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면 그대는 예전에 그것을 바라보던 방식으로 그것을 바라보지 않게 될 것이다.
미덕이 있는 사람이 고통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미덕이 있는 사람은 고통스럽게 살아가지 않는다.
미덕이 있는 사람은 매순간 지복을 누리며 살아간다.
그가 고통에 빠진다면, 그는 미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겁쟁이에 불과하다.
기본적으로 그는 교활하고 용기가 없다.
그는 교활한 사람이 가진 것을 똑같이 원하지만, 교활해질 만큼 용기가 없거나 교활할 정도로 영리하지도 못하다.
교활함은 고도의 기술이다.
교활한 사람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가져야만 한다.
악한 사람은 자신이 누릴 만한 것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질투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야말로 내적인 존재라는 진정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그런 궁핍하고 교활한 정치인과 부유한 사람들을 바라봐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내적인 궁핍함과 어두움과 지옥을 바라봐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경쟁심이 아니라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
- 오쇼라즈니쉬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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