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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와 선(禪)

작성자Minnie|작성시간16.02.14|조회수232 목록 댓글 5

"공장을 지나치는 트럭과
음악학교를 지나치는 트럭 중 어느 쪽이 더 음악적인가?
음악학교 안에 있는 사람은 음악적이고
밖에 있는 사람은 비음악적인가?
...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음악이다” 케이지의 이 말은 '깨달음'으로써

"도시 시멘트와 건물 사이에서 태어난 제게, 골목안 사람들 소리,
사람과 물체 부딪치는 소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장사꾼 외치는 소리...익숙한 그 소리...또 다른 하나의 자연"이라고
하신 회원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케이지는 과거에 사람들이 음악으로 간주하지 않던
소리들을 과감하게 재료로 사용했다.
즉 우리 주변의 일상이 얼마든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의 귀에 들리는 대부분은 소음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주의 깊게 들으려 한다면
소음이 얼마나 환상적인 것인지를 알게 된다고 하였으며
가장 자연적인 소음이야말로 경이로운 음악이라고 한
케이지의 음악사상은 동양철학에서 비롯된 비움과 물아일체
어울림의 미학이다!

(여기에서 또, 윤대녕의 산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어느 날 식탁에서 아내가 나의 소음 노이로제를 거론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주 작정을 한 듯했다.
우리가 귀로 듣는 모든 소리는 결국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겠냐고 그녀는 말했다.
물론 그럴 터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소리가 그토록 귀에
거슬린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또 사람에 대한 애정 없이 소설을 쓰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사람들 얘기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됐으면 해요.
그럼 지금과는 세상이 달라 보일지도 모르잖아요.
그것은 곧 마음을 다시 여는 일이었다. 더불어 마음이 열려야만
귀가 열리는 법이었다...나는 음악보다 더 많은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뜨였다.
이를테면 주방에서 아내가 설거지하는 소리,
물기가 마른 그릇을 찬장 속에 하나씩 쌓아놓는 소리, 베란다에서
빨래의 주름을 펴기 위해 옷을 터는 소리, 그때 그녀의 입에서 나직이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누군가 전화 통화를 하며 조용히 웃는 소리,
밤이면 아이에게 다분다분 동화책을 읽어주는 소리를 들을 때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가
온몸에 따뜻하게 깃들곤 한다.
그것은 혼자 어두운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막연히 자아도취적 감정에 빠져 있을 때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보다 구체적인 삶의 평화이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나는 눈을 감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그리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많은 일들을 낯선 그들의 입을 통해 엿듣게 된다.
그러면서 가끔은 속으로 안타까워하고 빙그레 웃기도 하고
혹은 부러워한다. 또 어떤 때는 슬그머니 놀라기도 한다.
내가 사는 것과 남들이 사는 것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부모 자식 걱정, 집 걱정, 돈 걱정, 아내와 남편의 건강 걱정
이를테면 누구나 똑같은 걱정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모든 얘기들이 우리가 날마다 공유하고 사는
인생의 거룩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케이지는 저명한 인도 철학자 사라브하이(Gita Sarabhai, 1922-2011)에게
인도음악과 철학을 배운다.
사라브하이는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신성한 경지에 도달하게
해 주는 것이 음악의 목적이라는 가르침을 케이지에게 전수한다.

케이지의 음악과 철학에 대한 권위자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는
“케이지의 음악은 어디에 도달하는
진보를 달성하는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 대한 노스텔지어도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다.
묵종(acquiescence말없이 그대로 따름)을 통해
듣는자는 지금(now) 속에 산다”고 했다.

케이지는 온갖 갈등과 번뇌를 소멸시키고 고통이 극복되는 깨달음의 상태
즉, 무기적이고 비활동적인 열반涅槃 상태를
위해 소리를 만들었다.

케이지는 [침묵]을 주위 환경을 [인식]하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합일]하여
[편안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음악요소,자연의 소리]로 사용했다

20세기의 실험주의자이며 소리 발명가 케이지는 귀에 익은 기존의
피아노 소리를 다양한 색깔을 가진 음향으로 전환시키는 실험을 했다.
건반을 누를 때 해머(hammer)가 때리는 현과 현 사이에
다양한 나사, 볼트, 벨트, 털실, 포크, 나무빗장, 콩, 고무조각, 플라스틱 등을
끼워 넣어 소리를 내 본 것이다.
케이지가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발명품이었다.
케이지의 전위음악은 불확정성, 우연성의 음악이었다.
케이지는 주사위나 동전을 던지지거나 주역을 이용해 점괘를
통해 결정하도록 chance operation에 의해 작곡을 했다.
우연적인 요소나 불확정 요소를 연주자가 마음대로 결정하도록 하는
우연성 음악을 창안해 내기도 한다.
음악적 절차에 있어서 어떤 법칙이나 한계가 없는 우연성 음악은 그래서
자연 발생적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작곡이나 연주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예기치 않는 상당한 자유가 주어지는
관객과 연주자 모두에게 흥미와 긴장감을 부여하는 음악이 우연성 음악이다.
작곡가는 자신이 사용할 음이나 그 음을 사용하는 방법을 미리 정해 놓지 않고
동전 던지기와 같은 우연의 결정에 따르는 고정되지 않은 방법을 쓴다.
연주자는 자신이 연주할 음과 음악의 부분 또는 연주 순서 등을
자의적으로 임의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연주자가 작곡가가 되는 것이다.

케이지는 예술은 자아의 표현이 아니라 '기존의 정신을 바꾸는 것',
또한 '자아로부터 해방'시켜 감각을 통해 밖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전위 음악이란 인간의 마음을 '평화롭고 평온하고 청정하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고,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영혼을 열어 줌'으로써
일상생활을 맑게 '정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선(禪) 사상이
음악 세계 바탕에 깔려있다.

[우연]을 [자연의 근원적인 원리]로 인식한 그는 예술과 인생 사이의
간격을 없애버리기 위해 예술가 자신을 배제하여
자아와 타아의 구별을 흐리게 하는 선사상이 적절하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소리를 창출하기 위해
작곡가, 연주자, 청취자에 대한 [정체성], 악보에 대한 [고정관념],
[악음과 소음]에 대한 개념과 집착을 없애고
자유로운 소리를 자연이라는 '우연성'에 의해 발명해냈다

정형화된 소리를 해방시키고 관람자를 참여시켜
관람자가 기존의 입장과 개념에서 벗어나
보다 친밀하게 상호대화적인interactive 차원에서 참여하게 된다.

ex, 환락의 도시로 흔히 떠올리는 불야성의 라스베가스에서 많은
문화공연과 컨벤션센터의 첨단 물류쇼 등의 경제 문화적 측면 가운데
'블루맨쇼'를 보면 관객이 무대만을 바라보게 놔두질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해방하여 앞자리 옆자리의 생전 처음 만난 관객과
퍼포먼스를 '함께' 만들어 가령, 끝없이 이어지는 색종이 테이프를
맨 뒷좌석에서부터 앞좌석으로 패스하게 해서 마구 눈덩이처럼
부풀어진 종이테이프 뭉치를 서로에게 전달하느라 상호 가벼운 터치를
유발하고, 신나는 뜻밖의 놀이에 애들처럼 웃음이 터져 상기된 뺨으로
낯선 사람끼리의 긴장과 경직성을 날려보낼 뿐더러,
방관자에서 가담자(창조자)로 자연스러운 전이가 일어난다
한국의 '난타' 공연이나 케이지의 우연성 음악처럼 또 백남준의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기존의 음악 범주를 벗어나 소통과 열림과 참여의 퍼포먼스를 하는그룹.
물장구치는 자연발생적 놀이를 블루 페인트를 뒤집어 쓰고
블루페인트로 물장구치듯 물감 흥건한 드럼통을 두드리며
음악을 파란페인트의 흩날림으로 시각이미지화하여
종합예술이라는 퍼포먼스의 절정을 연출한다.
파란페이트 탕속에서 날라드는 물감세례로부터 앞자석관객은
비닐막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하나됨에 더욱 몰입하여
우연성이란 자연을 끌어들인 무대예술에 흠뻑취한다.
블루맨쇼를 보고나면 모든 감각이 활짝 열려
처음엔 타인이던 관객끼리 공연이 끝나서도 줄서서 출구로 나가며
또 화장실에서 다시 봐도 경계심이 사라진 이웃을 대하듯
자연스런 소통과 해방감을 체험한 이전과 다른 자신의 심경에 경이로와 한다
공연자와 관객, 무대와 관객석,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어 물아일체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에 오랜동안 명성을 유지한 장기공연이 가능했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예고한 대로 과학문명의 발달은
서양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을 불러오게 했고,
그런 공황으로부터의 탈출을, 그들은 동양의 선(禪)과 명상을 통해 시도했고
1960년대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화해하고 조화를 모색한 시기였고
이는 동서,음양, 귀천,정동,의식과 무의식, 남녀...등 모든 대치구조를
근원적 합일로 되돌리는...시대를 앞서 누구보다 빨리 본질을 간파한
전위 예술가의 마땅한 사조思潮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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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은시 | 작성시간 16.02.14 글이 감동적이네요.^^
    존 케이지의 음악사상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Cage Ten Oxen..이란 선사상을 묘사한 드로우잉이 있습니다,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 답댓글 작성자Minni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2.14 또!^^ 늘...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면의일상 | 작성시간 16.03.15 어제 죤 케이지의 선화를 선생 께서 보여 주셨답니다. (중국미술사)
    다시 살펴보고 " 예술은 자아가 아니라 기존 정신을 바꾸는 것.
    자아로부터 해방시켜 감각을 통해 밖으로 흐르게 하는 것"
    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추종자가 되려나?
  • 답댓글 작성자Minni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3.16 안녕하세요? 나의 글쓰기 뮤즈님! 면의일상님과 만나는 지점에서 쓰게되고 써야만 하는 욕망으로 내닫습니다. 오늘은 제 얘기보다도.. 좋은 소식이 있어서요^^
    루이즈 부르주아에게서 면의일상님과의 접촉지점을 발견했습니다. 엊그제 선생님의 창작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신 글과 마주치는 부분요! 같은 길을 가시는 동료애가 깃든 글같아 포스트에 넣었습니다. 수일 내로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케이지 그림 혹시 이 연작도 보셨습니까?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면의일상 | 작성시간 16.03.17 Minnie 너무나 기다려 지네요. 어느덧 미네님은 나의 그리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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