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蔚山) 엄씨들의 호적대장(帳籍), 묘지명에 기록된 조상의 이름
시랑(侍郞) 엄기(嚴耆)가 《원강사기(圓岡祠記)》를 지으면서 다섯 가지 증거(五證)를 제시하다.
조선 후기 학자 입헌(立軒) 한운성(韓運聖, 1787~1864)의 문집인 《입헌문집(立軒文集)》 제15권에 수록된
〈증공조판서행영월호장엄공시상(贈工曹判書行寧越戶長嚴公諡狀)〉입니다.
이 글은 단종(端宗)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한 충신 엄흥도(嚴興道)의 시호(諡號)를 청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지은 시장(諡狀, 시호를 요청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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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軒文集卷之十五 / 謚狀
贈工曹判書行寧越戶長嚴公諡狀 代人起草
公諱興道姓嚴氏貫寧越。越之嚴。在高麗有員外郞諱林義。佚籍不能世。公卽我端廟朝寧越戶長也。粤昔景泰丙子。端廟以上王遜于越。明年丁丑。忽一夕昇遐。嗚呼。當時事尙忍言哉。三相六臣死矣不可作。外而邑宰。內而暬御。皆睨而過之。莫能嚮邇。衮體露地。廞衛無日。公以眇爾孔目。獨慷慨奮身。妻孥宗黨。怵之以赤族。而揮手不聞。且號且哭。往來街市。屬裨庀襚。視斂惟謹。又能炳幾深慮於倉皇震盪之中。卽夜竊負而往。因其土封焉。實惟郡之北五里冬乙旨。今之莊陵是已。嗚呼。天之生公必於此時。而又必於此地者。殆若安排準擬。使之結局乎君臣大義。烏乎異哉。盖公之心。只見有吾君。不見有吾身。其精忠卓節之可以撑宇宙貫日星者。固已丹靑於國乘野史。口碑於輿儓婦孺。則靡所事乎架疊讚述。第以事功言之。向使微公。蒼梧一抔土。其將蕪沒於九疑聯緜之間。後雖有列聖朝修墓封陵之典。象設崇嚴。安所施哉。以故尙論者曰。以節義包事功。萃當世三十二人之忠於公之一身。或曰六臣可七而其功過之。或曰自有君臣以來。草莾中辦得此事者。惟有唐珏之於宋氏諸陵。孫繁祉白紳之於皇明毅皇帝。而苟論其世。刀鉅湯鑊之面前立至。猶不若公之時。然則其忠等耳。其事尤難。雖謂之窮天地亘萬古。惟公一人可也。
肆我英宗大王於筵中特敎曰。興道之前。未有興道。興道之後。豈有興道。大哉衮褒。無以加矣。若夫旌贈尸祝則肅廟乙丑。建六臣祠。以公腏享。戊寅追封莊陵。而贈公工曹佐郞。英廟丙午命旌閭。癸亥贈工曹參議。給春秋墓祭需。戊寅贈工曹參判。親製文賜侑。
正廟乙巳。命道臣修墳墓。戊申 致祭于㫌閭。辛亥命享于忠臣配食壇。己未公之後孫。依醉琴朴公河濱祠例。建祠于其所居蔚山之圓岡。純廟某年。贈工曹判書。國家之褒忠奬節。於是乎終始無憾。而公固無所爲而爲之。則此何足輕重哉。
其子孫顯晦則自尤庵宋先生筵請錄後。列朝承傳。不止一再。然氏嚴者各言派系。未有的據。獨蔚山之嚴。以帳籍之改貫復貫。墓誌之累世先諱。最後自言。蓋以淪落遐陬。積久畏約也。嚴侍郞耆撰圓岡祠記。指明其五證。以嚴氏而證嚴氏。尤可徵信。
由是世皆知公之有後曰好贒。曰和。曰希雲。曰善。曰立實。其子孫曾玄而立之後。居於蔚。類能讀書爲士。間有以文行稱而尙未蒙錄。公十四世孫星茂。以公易名之狀屬不佞。不佞竊有感焉。謹稽英廟之於六臣。特命不待狀賜謚。公與六臣。卽二而一者也。亦或有以此謦欬於黈纊之下。贊成 繼述之美耶。星茂卽其有文行者。敢撰次如右。諗于太常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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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軒文集卷之十五 / 謚狀
贈工曹判書行寧越戶長嚴公諡狀 代人起草
公諱興道姓嚴氏貫寧越。越之嚴。在高麗有員外郞諱林義。佚籍不能世。公卽我端廟朝寧越戶長也。粤昔景泰丙子。端廟以上王遜于越。明年丁丑。忽一夕昇遐。
贈工曹判書行寧越戶長嚴公諡狀 代人起草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월호장을 지내신 엄 공(嚴公, 엄흥도)의 시장.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초안을 잡다.
公諱興道姓嚴氏貫寧越。越之嚴。在高麗有員外郞諱林義。佚籍不能世。공의 휘(이름)는 흥도(興道)이고 성은 엄씨(嚴氏)이며 본관은 영월(寧越)이다. 영월 엄씨는 고려 시대에 '임의'라는 휘를 가진 원외랑 관직의 조상이 있었으나, 기록이 유실되어 대대로 계통을 다 잇지는 못했다.
卽我端廟朝寧越戶長也。공은 바로 우리 단종 대왕 시절의 영월 호장이었다.
粤昔景泰丙子。端廟以上王遜于越。明年丁丑。忽一夕昇遐。아, 지난 경태 병자년(1456년)에 단종께서 상왕의 신분으로 영월로 유배를 가셨는데, 이듬해 정축년(1457년)에 어느 날 저녁 갑자기 승하(서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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嗚呼。當時事尙忍言哉。三相六臣死矣不可作。外而邑宰。內而暬御。皆睨而過之。莫能嚮邇。衮體露地。廞衛無日。公以眇爾孔目。獨慷慨奮身。妻孥宗黨。怵之以赤族。而揮手不聞。且號且哭。往來街市。屬裨庀襚。視斂惟謹。又能炳幾深慮於倉皇震盪之中。卽夜竊負而往。因其土封焉。實惟郡之北五里冬乙旨。今之莊陵是已。
嗚呼。當時事尙忍言哉。슬프다! 당시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三相六臣死矣不可作。外而邑宰。內而暬御。皆睨而過之。莫能嚮邇。세 정승(황보인, 김종서 등)과 사육신은 죽어서 다시 일어날 수 없었고, 밖으로는 고을의 수령들로부터 안으로는 대궐의 시종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곁눈질하며 지나칠 뿐 감히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다.
衮體露地。廞衛無日。곤룡포를 입으신 임금의 옥체(단종의 시신)가 맨땅에 버려졌으나, 장례를 치를 기약이 없었다.
公以眇爾孔目。獨慷慨奮身。공(엄흥도)은 보잘것없는 말단 고을 아전(孔目)의 신분으로, 홀로 강개하여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妻孥宗黨。怵之以赤族。而揮手不聞。처 자식과 일가친척들이 멸족(赤族)의 화를 당할까 봐 두려워하며 말렸으나, 손을 저으며 듣지 않았다.
且號且哭。往來街市。屬裨庀襚。視斂惟謹。울부짖고 통곡하며 거리를 오가면서, 아랫사람들을 모아 수의와 장구(襚)를 갖추고 염습하는 일을 오직 정성스럽고 삼가게 해냈다.
又能炳幾深慮於倉皇震盪之中。卽夜竊負而往。因其土封焉。또한 창황하고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기틀을 밝혀 깊이 생각하여, 그날 밤에 몰래 (시신을) 등에 지고 가서 그 땅(산봉우리)에 묻고 봉분을 만들었다.
實惟郡之北五里冬乙旨。今之莊陵是已。그곳이 바로 고을 북쪽 5리에 있는 '동을지(冬乙旨)'이니, 지금의 장릉(莊陵)이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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嗚呼。天之生公必於此時。而又必於此地者。殆若安排準擬。使之結局乎君臣大義。烏乎異哉。盖公之心。只見有吾君。不見有吾身。其精忠卓節之可以撑宇宙貫日星者。固已丹靑於國乘野史。口碑於輿儓婦孺。則靡所事乎架疊讚述。第以事功言之。向使微公。蒼梧一抔土。其將蕪沒於九疑聯緜之間。
嗚呼。天之生公必於此時。而又必於此地者。슬프다! 하늘이 공(엄흥도)을 태어나게 하실 때 반드시 이 시기(단종 수난기)에 하시고, 또 반드시 이 땅(영월)에 하신 것은,
殆若安排準擬(安排准拟)。使之結局乎君臣大義。烏乎異哉。마치 미리 안배하고 계획하여, 그로 하여금 군신 간의 큰 의리(君臣大義)를 매듭짓게 하신 것만 같으니, 아! 기이한 일이로다.
盖公之心。只見有吾君。不見有吾身。대개 공의 마음은 오직 나의 임금(단종)이 계심만 보았고, 나의 몸(자신의 안위)이 있음은 보지 않았다.
其精忠卓節之可以撑宇宙貫日星者。우주를 떠받치고 해와 별을 뚫을 만한 그 지극한 충성과 탁월한 절개는,
固已丹靑於國乘野史。口碑於輿儓婦孺。則靡所事乎架疊讚述(赞述)。이미 나라의 역사(국승)와 야사에 뚜렷이 기록(단청)되어 있고, 가마꾼(輿儓)과 아녀자(婦孺)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있으니(구비), 말과 글을 겹겹이 얹어 찬양하고 서술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第以事功言之。向使微公。蒼梧一抔土。其將蕪沒於九疑聯緜(联绵)之間。다만 그가 이룬 공적(事功)으로만 말하더라도, 만약 공이 없었더라면 저 창오산(蒼梧山)의 한 줌 흙(단종의 묘소)은 구이산(九疑山)이 끝없이 이어진 사이에서 황폐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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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雖有列聖朝修墓封陵之典。象設崇嚴。安所施哉。以故尙論者曰。以節義包事功。萃當世三十二人之忠於公之一身。或曰六臣可七而其功過之。或曰自有君臣以來。草莾中辦得此事者。惟有唐珏之於宋氏諸陵。孫繁祉白紳之於皇明毅皇帝。而苟論其世。刀鉅湯鑊之面前立至。猶不若公之時。然則其忠等耳。其事尤難。雖謂之窮天地亘萬古。惟公一人可也。
後雖有列聖朝修墓封陵之典。象設崇嚴。安所施哉。후대에 비록 역대 임금들(숙종·영조 등)이 무덤을 보수하고 능으로 봉하는 법전(庄陵 승격)을 거행하여 석물(象設)을 높이고 엄숙하게 꾸몄으나, (공이 묘소를 보존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어디에다 시행할 수 있었겠는가.
以故尙論者曰。以節義包事功。萃當世三十二人之忠於公之一身。이런 까닭에 인물을 숭상하여 논하는 이들은 "절개와 의리로써 역사의 공적을 다 포괄하였으니, 당세(단종 수난기)의 충신 32인의 충절이 모두 공(엄흥도)의 한 몸에 모여 있다"라고 말한다.
或曰六臣可七而其功過之。혹은 말하기를 "사육신(六臣)에 더해 '사칠신(七臣)'이라 부를 만하며, 그 공로는 오히려 사육신을 능가한다"라고 한다.
或曰自有君臣以來。草莾中辦得此事者。惟有唐珏之於宋氏諸陵。孫繁祉白紳之於皇明毅皇帝。혹은 말하기를 "군신의 대의가 생긴 이래로, 벼슬 없는 민간(草莾)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해낸 자는 오직 남송(南宋) 왕조의 여러 능을 지켜낸 당각(唐珏)과, 명나라 의황제(숭정제)의 시신을 거둔 손번지(孫繁祉)와 백신(白紳)뿐이다"라고 한다.
而苟論其世。刀鉅湯鑊之面前立至。猶不若公之時。然則其忠等耳。其事尤難。그러나 진실로 그 시대적 상황을 논해보자면, (중국의 당각 등은 왕조가 멸망한 뒤의 일이라) 칼과 톱, 끓는 솥(刀鉅湯鑊)의 군형이 눈앞에 즉시 들이닥치던 공(엄흥도)의 때만큼 위태롭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 충성은 대등할지라도, (엄흥도가 치러낸) 그 일은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雖謂之窮天地亘萬古。惟公一人可也。그러므로 천지가 다하고 만고를 통틀어, 오직 공 한 사람뿐이라고 말하더라도 참으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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肆我英宗大王於筵中特敎曰。興道之前。未有興道。興道之後。豈有興道。大哉衮褒。無以加矣。若夫旌贈尸祝則肅廟乙丑。建六臣祠。以公腏享。戊寅追封莊陵。而贈公工曹佐郞。英廟丙午命旌閭。癸亥贈工曹參議。給春秋墓祭需。戊寅贈工曹參判。親製文賜侑。
肆我英宗大王於筵中特敎曰。이에 우리 영조 대왕(英宗大王)께서 어전회의(筵中)에서 특별히 하교하시기를,
興道之前。未有興道。興道之後。豈有興道。大哉衮褒。無以加矣。"엄흥도 이전에도 엄흥도 같은 사람이 없었고, 엄흥도 이후에 어찌 또 엄흥도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하셨으니, 위대하도다! 임금의 극찬(衮褒)이여, 이보다 더 높은 찬사는 없을 것이다.
若夫旌贈尸祝則肅廟乙丑。建六臣祠。以公腏享。그를 표창하고 관직을 추증하며 제사를 지내준(시축) 내력을 살펴보면,
숙종 11년(1685년, 乙丑)에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육신사, 현 창절사)을 세울 때 공(엄흥도)을 함께 배향(腏享)하였다.
戊寅追封莊陵。而贈公工曹佐郞。
숙종 24년(1698년, 買寅)에 단종의 묘를 장릉(莊陵)으로 추봉하면서,
공에게 공조좌랑(工曹佐郞) 관직을 추증하였다.
英廟丙午命旌閭。癸亥贈工曹參議。給春秋墓祭需。
영조 2년(1726년, 丙午)에 정문(旌閭)을 세우도록 명하셨고,
영조 19년(1743년, 癸亥)에는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추증하셨으며, 봄가을로 묘사에 쓸 제수(祭需)를 나라에서 지급하도록 하셨다.
戊寅贈工曹參判。親製文賜侑(赐侑)。
영조 34년(1758년, 戊寅)에는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추증하시고, 임금이 친히 제문(親製文)을 지어 내리시어 영혼을 위로(賜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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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廟乙巳。命道臣修墳墓。戊申 致祭于㫌閭。辛亥命享于忠臣配食壇。己未公之後孫。依醉琴朴公河濱祠例。建祠于其所居蔚山之圓岡。純廟某年。贈工曹判書。國家之褒忠奬節。於是乎終始無憾。而公固無所爲而爲之。則此何足輕重哉。
正廟乙巳。命道臣修墳墓。
정조 9년(1785년, 乙巳)에 도신(道臣, 관찰사)에게 명하여 (엄흥도) 분묘를 보수하게 하셨다.
戊申 致祭于㫌閭。
정조 12년(1788년, 戊申)에는 정려(旌閭)에 제사를 지내도록(致祭) 하셨다.
辛亥命享于忠臣配食壇。
정조 15년(1791년, 辛亥)에는 (영월 장릉의) 충신배식단(忠臣配食壇)에 함께 모셔 제사 지내도록(配享) 명하셨다.
己未公之後孫。依醉琴朴公河濱祠例。建祠于其所居蔚山之圓岡(圆冈)。
정조 23년(1799년, 己未)에 공의 후손들이 취금헌 박팽년(朴彭年)을 모신 대구 하빈의 낙빈서원(河濱祠) 선례에 따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울산의 원강(圓岡)에 사당(현 울산 충의사)을 건립하였다.
純廟某年(纯庙某年)。贈工曹判書。
순조(純廟) 대의 모 정미년(1807년 또는 1831년 등)에 마침내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추증하셨다.
國家之褒忠奬節(褒忠奖节)。於是乎終始無憾。이로써 국가가 충신을 기리고 절개를 권장하는 예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의 유감도 없게 되었다.
而公固無所爲而爲之。則此何足輕重哉。그러나 공(엄흥도)은 본래 (이러한 포상이나 대가를) 바라거나 의도해서 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후대의 이러한 관직과 명예가 어찌 공의 위대함을 더 무겁게 하거나 가볍게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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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子孫顯晦則自尤庵宋先生筵請錄後。列朝承傳。不止一再。然氏嚴者各言派系。未有的據。獨蔚山之嚴。以帳籍之改貫復貫。墓誌之累世先諱。最後自言。蓋以淪落遐陬。積久畏約也。嚴侍郞耆撰圓岡祠記。指明其五證。以嚴氏而證嚴氏。尤可徵信。
其子孫顯晦則自尤庵宋先生筵請錄後。列朝承傳。不止一再。
그 후손들이 세상에 드러나거나 묻힌(顯晦) 내력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어전회의에서 청하여 기록(筵請錄)한 이후로, 역대 조정에서 전해 내려온 명령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다.
然氏嚴者各言派系。未有的據。그러나 엄씨 성을 가진 자들이 저마다 자기 계파가 적통이라고 말하여, 확실한 증거(的據)가 없었다.
獨蔚山之嚴(独蔚山之严)。以帳籍之改貫復貫。墓誌之累世先諱。最後自言。
유독 울산(蔚山)의 엄씨들만이 호적대장(帳籍)에 본관을 고쳤다가 다시 되돌린 기록(改貫復貫)과, 묘지명에 대대로 기록된 조상의 이름(累世先諱)을 가지고 가장 나중에 스스로 실상을 말하였다.
蓋以淪落遐陬。積久畏約也。
이는 대개 그들이 멀리 떨어진 시골 구석(울산)에 떨어져 살면서, 오랫동안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몸을 움츠려 왔기 때문이다.
嚴侍郞耆(严侍郎耆)撰圓岡祠記。指明其五證。
시랑(侍郞) 엄기(嚴耆)가 《원강사기(圓岡祠記)》를 지으면서 그 확실한 다섯 가지 증거(五證)를 명백히 지적해 냈다.
以嚴氏而證嚴氏。尤可徵信。
같은 엄씨 종중의 문헌으로써 엄씨의 적통을 증명하였으니, 더욱 신뢰할 수 있다(徵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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由是世皆知公之有後曰好贒。曰和。曰希雲。曰善。曰立實。其子孫曾玄而立之後。居於蔚。類能讀書爲士。間有以文行稱而尙未蒙錄。公十四世孫星茂。以公易名之狀屬不佞。不佞竊有感焉。謹稽英廟之於六臣。特命不待狀賜謚。公與六臣。卽二而一者也。亦或有以此謦欬於黈纊之下。贊成 繼述之美耶。星茂卽其有文行者。敢撰次如右。諗于太常氏。
由是世皆知公之有後曰好贒(好賢)。曰和(和)。曰希雲。曰善。曰立實。
이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은 공(엄흥도)의 대를 이은 후손들의 이름이 (아들) 호현(好賢), (손자) 화(和), (증손) 희운(希雲), (고손) 선(善), (현손) 입실(立實)임을 모두 알게 되었다.
其子孫曾玄而立之後。居於蔚。類能讀書爲士。間有以文行稱而尙未蒙錄。그 자손들과 증손, 현손 및 입실(立實) 이후의 후손들이 울산(蔚山)에 살고 있는데, 대체로 능히 글을 읽는 선비(士)들이 되었다. 간혹 문장과 행실(文行)로 칭송받는 이가 있었으나 아직 나라의 포상(錄)을 입지는 못했다.
公十四世孫星茂。以公易名之狀屬不佞。不佞竊有感焉。
공의 14세손인 엄성무(嚴星茂)가 공의 이름을 바꾸어 부를(즉, 시호를 청할) 글인 시상(易名之狀)을 못난 나(不佞, 저자의 겸칭)에게 부탁하기에, 내가 마음속으로 깊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謹稽英廟之於六臣。特命不待狀賜謚。公與六臣。卽二而一者也。
삼가 살펴보건대, 영조(英廟) 대왕께서는 사육신에 대하여 특별히 명령을 내리시어 (번거롭게) 시상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시호(賜謚)를 내리셨다. 공(엄흥도)과 사육신은 육체는 비록 둘이나 충절은 곧 하나(二而一)인 지간이다.
亦或有以此謦欬於黈纊之下。贊成 繼述之美耶。
그러니 또한 혹시라도 이 글로써 임금의 귀(黈纊之下)에 조용히 아뢰어(謦欬), 선왕(영조·정조)의 뜻을 이어받아 찬란하게 완수하는(繼述) 아름다운 정치를 찬성(도울 수)할 수 있지 않겠는가.
星茂卽其有文行者。敢撰次如右。諗于太常氏。
(글을 청한) 엄성무(嚴星茂)는 바로 그 후손들 중 문장과 행실이 뛰어난 자이다.
이에 감히 위와 같이 차례대로 글을 찬술하여 태상씨(太常氏, 시호를 관장하는 봉상시)에 고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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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嚴耆)
1762년(영조 38)~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백영(伯英)이다. 본관은 영월(寧越)이다.
증조부는 엄경하(嚴慶遐)이고, 조부는 엄구(嚴球)이다. 부친 진사(進士) 엄사건(嚴思健)과 모친 유형(柳炯)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생은 엄시(嚴蓍)이다. 부인은 송영(宋鍈)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식년시에서 진사 3등 13위로 합격하였다.
1790년(정조 14) 증광시에서 병과 25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또한, 활을 잘 쏘아서 품계가 6품에 올랐다. 1792년(정조 16)에 정언(正言)으로 재직하였다. 1793년(정조 17)에는 임금이 일차유생(日次儒生)들에게 내렸던 제목으로 문신들에게 율시(律詩)를 지어내라고 명령하였는데, 그가 지은 글이 뽑혀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이후 부교리(副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1799년(정조 23)에 초계문신들의 시사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1801년(순조 1)에는 승지(承旨)로 재직하였다. 1812년(순조 12)에 아경(亞卿)으로 발탁되었다. 1819년(순조 19)에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다. <한국역대인물DB>
엄석정 嚴錫鼎 1801년(순조 1)~1875년(고종 12)
조선 후기에, 이조판서, 홍문관제학,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대우(大友), 호는 가당(稼堂). 참판 엄기(嚴耆)의 아들이다.
1828년에 진사가 되었고, 헌종 때 당진현감을 거쳐 1844년에는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철종 때 김해부사를 거쳐 1864년 예방승지, 1865년 이조참판을 지냈다. 1869년에는 한성부판윤과 형조판서·의정부좌참찬을 지냈으며, 1872년 이조판서와 홍문관제학, 1874년 사헌부대사헌 등을 지내고, 뒤에 대호군이 되었다.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최진식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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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집(立軒集)
간행 연도 미상(1880년 이후 간행)
저자 한운성(韓運聖)
생년 1802년(순조 2)~ 몰년 1863년(철종 14)
자 문오(文五), 호 입헌(立軒), 본관 청주(淸州)
특기사항
홍직필(洪直弼)의 문인. 임헌회(任憲晦), 조병덕(趙秉悳), 이종상(李鍾祥), 홍일순(洪一純), 소휘면(蘇輝冕) 등과 교유
편찬및간행
저자는 洛論 계열인 梅山 洪直弼의 高弟로서, 부친 任所를 찾아 慶州에 와 있던 홍직필에게 12세 때 찾아가 입문한 뒤로 일생 세거지인 慶州에서 스승이 머물던 한양을 수시로 오가며 洛中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스승의 사후에 任憲晦(1811~1876), 趙秉悳(1800~1870) 등과 함께 「梅山集」을 교정하는 일에 깊이 관여한 것을 통해 스승 홍직필과의 깊은 교분과 문인들 사이에서의 선도적인 입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또 臺山 金邁淳은 저자를 영남의 제일가는 인물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저자의 유적과 유문은 아들 韓錫瓚과 韓錫瓘에 의해 수습 정리되었다.
우선 1865년 저자의 동문인 임헌회에게는 묘갈명을,
1869년 조병덕에게는 행장을 부탁하여 받는 등 행적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家藏되어 있던 시문 또한 수습하여 저자 사후 10여 년이 흐른 뒤인 1880년에 저자의 동문 후배인 李應辰에게 보여주고 跋文을 부탁하여 받는 등 간행을 위한 준비를 하였는데, 발문이 작성된 시기에 문집의 실제 간행이 이루어졌는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발문의 작성 연도가 본집에 나타난 가장 후대의 기록이므로 1880년 이후 두 아들의 주도하에 활자로 문집이 인행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규장각(奎15633),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811.98/한운성/입)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저자의 아들 韓錫瓚과 韓錫瓘의 주도 하에 1880년 이후 목활자로 인행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본 영인저본 중 권8의 제4판은 板次가 누락되어 있고, 권3의 제3ㆍ6ㆍ9판은 卷次가 ‘二’로, 제19판은 판차가 ‘十’으로, 제32판은 판차가 ‘二十二’로, 권6의 제3ㆍ6ㆍ9ㆍ12ㆍ15ㆍ18ㆍ21ㆍ23ㆍ26ㆍ29ㆍ32ㆍ35ㆍ38ㆍ41ㆍ44판은 권차가 ‘五’로, 권7의 제2ㆍ5ㆍ9ㆍ12판은 권차가 ‘六’으로, 권8의 제21판은 판차가 ‘二十’으로, 권14의 제32판은 판차가 ‘二十二’로, 권16의 제34판은 판차가 ‘一’로 誤記되어 있다.
行狀(趙秉悳 撰), 墓碣銘(任憲晦 撰), 跋(李應辰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