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하망(曺夏望)묘갈명 병서 [대제학 홍양호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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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州集卷之十一 / 附錄
墓碣銘 幷序 [大提學洪良浩撰]
我王考芸窩府君。以文章名世。晩節與趙后溪,李槎川諸公結詩社。良辰淑景。選日迭會。文采風流。照映一代。人比之香山東洛之勝。而維時西州曺公。以詞林後進。援司馬公故事。昂然登席。唱酬聯翩。往往發驚人句。當世傳爲美談。良浩幼時。隅坐奉杖几。至今歷歷在眼。
西州孫侍郞君。䟽公遺事。來屬麗牲之辭。撫念疇昔。爲之愴然。謹按狀而叙之。公諱夏望字雅仲。昌寧人。新羅駙馬繼龍之後。歷高麗有八世平章。逮我朝節義勳伐。奕世相望。曾祖諱文秀。詞翰有盛名。號雪汀。官工曹參判夏寧君。祖諱漢英。以持平抗義斥和。被拘燕獄三年。不屈而還。名聞夷夏。卒官禮曹參判。襲爵夏興君贈諡文忠。考諱憲周金溝縣令。妣贈貞夫人延安李氏。大提學一相之女。月沙文忠公之曾孫。縣令公疾劇。服毒藥先卒。以烈女㫌閭。以肅廟壬戌生公。英秀出凡。眉眼如畵。嘗從塾師受曾氏史略。自戰國以後。不煩指授。人稱神童。甫踰十歲。連喪考妣。哭泣哀慕之中。猶日夜劬書。一覽成誦。稍長以氣自豪。慕古人奇節。視世俗亡如也。乃載書入山寺。數年而歸。勉就泮庠。每試居前。至於二十餘魁。名聲大振。辛卯登進士試第一。生員試二等。國俗以進士魁元爲峻選。非文學地望服一世者。莫能擬議。旣坼名。李公宗城居二人。或惜之。金尙書鎭圭主試。笑曰彼不幸而逢此人。誰敢爭先。其負士望如此。壬寅除章陵參奉不肯就。癸卯拜童蒙敎官。不得已應命。移禁府都事。因事遆。丙午拜司宰監奉事。棄歸驪江別墅。優遊林泉。歲餘復拜禁府。換掌苑奉事。陞長興直長。嶺賊平。以盟府奉血。官陞主簿。遷工曹佐郞。
己酉出宰宜寧縣。當辛壬大㑴。辦穀數千斛。計口分賑。一境無瘠。癸丑與新按使不相能。投紱而歸。民鑱石頌之。丙辰擢庭試第一甲。用蔭路資竆。直陞通政付西樞。卽拜判决事。移兵曹參知。遷承政院同副承旨。上御晝講。命公陳經旨。公引物比類。剖析精微。因文生義。兼進規戒。上嘉納之。後日臨講。特召公曰夙聞文學。曩知其深於易也。冬乞暇省墓于驪湖。上促令還朝。時値親臨議囚。文案煩氄。上顧謂公曰非爾莫可。特命換刑房稱旨。上亟嘉賞焉。丁巳除茂朱府使。己未遆拜禮曹參議。東遊金剛未還。除承旨尋遆。庚申庭請徽號。五啓不允。將進六啓。館閣諸公。辭竭莫能秉筆。日已晏矣。公以軍銜在班。大臣屬公製進。卽席揮毫展紙鳴颯颯。頃刻而就。滿座環視稱善。啓卽蒙允。咸嘖嘖曰此令之尙遅文任。朝廷之過也。辛酉拜大司諫。夏薦爲廣州府尹。尋罷去。壬戌知江陵府。重建鏡浦臺。暇日嘯詠。所製上樑文膾炙一時。甲子病遆。乙丑廟堂啓差承文院副提調。因辭職極陳時弊曰。科制也官方也良役也戎政也。革舊改制。條列中窽。上優批褒之。因除兵曹參議。公少因夜讀患眼眚。晩年益劇。求淸凉地。丙寅爲寧越府使。覽古興感。發於吟詠。有一聯曰從古越中三讓地。秪今江上九疑山。一時傳誦。以爲越中前無此作。又於錦江亭步板上韻。其兩聯曰錦水亭空明月在。碧桃花落故人來。紗籠古壁蛛絲老。霞珮朝元鶴羽催。流傳都下。兪侍郞健基擊節朗誦曰俱是仙語。此老殆不久於世耶。居歲餘。棄歸楊湖庄。感疾就醫于京。竟以七月初四日不起。享年六十六。九月葬于楊根水南。後十年移卜于驪州檟山里負午之原。
夫人德水李氏。縣監泰鎭之女。吏曹判書大提學澤堂諱植之玄孫。聰慧通敏。孝弟睦婣。有女士範。生於癸亥。卒於辛亥。始葬於檟山南。及公歿移祔焉。竊覸公脩幹鶴立。有出塵之表。性度亢爽。高視獨行。於人少許可。
記性超羣。博通古今。文場酒席。談論焱發。常傾一座。文辭浩瀚。各體徧長。尤善於詩。雖一韻百篇。淊淊若宿搆。高華警絶。詞苑老匠。皆斂袵推讓。然亦不自貴重。常曰文不過稱其意氣而已。刻畫藻餙。蘄以傳後者。亦俗爾。揮灑淋漓。牋墨錯落。而輒棄不顧。以故篇什多散佚。只餘若干卷藏于家。始公自韋布負重名。
一世期之以潤色鴻猷。高步館閣。及夫遲晩通籍。後生少年。布列公卿。不肯低徊下僚。每求外補。自放於山水。當路者或惜其沉屈。公笑應曰此君輩事。於老夫何與。以是人多目之以倨傲。官遂不顯。然心輕爵祿。不求合於時。識者以是益高之。
後賜祭文。有曰陳同吐氣。蒼髮差池。退之得謗。名亦相隨。於此可見公之本末矣。逮夫暮年。公議難遏。朝廷將以淸要處之。槐院副提。盖是極選。而爲文苑主盟階也。未久而公遽逝。人莫不咨嗟歎惜。平生以早失怙恃。祿不逮養爲至痛。其典郡邑。必權奉祠版。每値喪餘。
前一朔居宿於外。齋沐行祀。親檢饍羞。誠敬哀慕。有足感動人者。友同氣甚篤。事仲兄如嚴父。保妹弟如嬰兒。撫視遺孤如己出。此其內行之懿也。
凡擧五男。長命九有文行。纔冠而夭。次命五有三男一女。男允世,允厚,允恒。女歸洪樂恒。文科今參議。允世子曰學振。有孫錫路。實尸公祀。次命百有一男三女。男允美。女歸吳琬,成觀柱,趙絅采。允美子曰玄振。次命億縣監有三男二女。男允遇,允邁縣監,允遂今校理。女歸尹光心今郡守。尹亨植。允遇子曰始振,好振。允邁子曰鴻振進士。次命峻郡守。出爲季父后。有一男允大文科今參判。允大子曰鳳振。餘皆幼。銘曰。
士以志操爲重。文以氣韻爲宗。志高則無所充詘。氣昌則發之舂容。自古攸難。今見于公。廿魁多士。不自爲工。再冠大庭。冀北遂空。丹桂孤挺。秀出灌叢。瓦缶亂鳴。獨戛球鍾。簪組土芥。山水朋從。驪湖淸駛。越峀巃嵸。豪吟大唱。光恠干虹。霞珮飄然。四尺遺封。
大提學洪良浩撰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8
원문은 조선 후기의 대문장가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서주(西州) 조하망(曺夏望, 1682~1747)의 문집인 《서주집(西州集)》에 지어 보낸 부록의 묘갈명(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의 글) 머리말(序)입니다.이 글은 홍양호가 어린 시절, 자신의 할아버지인 운와(芸窩) 홍중성(洪重聖)을 비롯한 당대의 원로 문인들이 결성한 시사(詩社, 시인들의 모임)에 당시 후배 문인이었던 서주 조하망이 참석하여 당당하게 시를 주고받으며 선배들을 놀라게 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西州集卷之十一 / 附錄 墓碣銘 幷序 [大提學洪良浩撰] 我王考芸窩府君。以文章名世。晩節與趙后溪,李槎川諸公結詩社。良辰淑景。選日迭會。文采風流。照映一代。人比之香山東洛之勝。而維時西州曺公。以詞林後進。援司馬公故事。昂然登席。唱酬聯翩。往往發驚人句。當世傳爲美談。良浩幼時。隅坐奉杖几。至今歷歷在眼。
《서주집》 권11 / 부록 묘갈명 병서 [대제학 홍양호 지음]
나의 돌아가신 할아버지이신 운와(芸窩) 부군(府君, 홍중성)께서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으셨다.
만년에는 후계(后溪) 조공(조정만), 차천(槎川) 이공(이명항)을 비롯한 여러 어른과 함께 시사(詩社)를 결성하셨다.
좋은 날과 아름다운 경치를 맞이할 때마다 날짜를 골라 번갈아 모임을 가지셨는데, 그 문채와 풍류가 한 시대를 환하게 비추어 사람들이 당나라 백거이의 '향산 시사'나 송나라 사마광의 '동락회' 같은 성대한 모임에 비유하였다.
이때 서주(西州) 조공(조하망)께서는 문단(詞林)의 후배로서, 송나라 사마광이 젊은 시절 선배들의 모임에 당당히 참여했던 옛 일(故事)을 이끌어내며 당당하게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선배들과 번갈아 가며 시를 주고받았는데(唱酬), 대단히 놀라운 시구들을 자주 지어내어 당시에 아름다운 이야기(美談)로 전해졌다.
나(홍양호)는 어린 시절에 방구석 자리에 앉아 할아버지의 지팡이와 안석(기대어 앉는 방석)을 받들고 있었는데, 그때의 일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또렷이 기억난다.
2. 핵심 고사 및 용어 풀이왕고 운와부군(王考芸窩府君): 글쓴이 홍양호의 할아버지인 홍중성(洪重聖)을 뜻합니다 (운와는 그의 호).
조후계(趙后溪)·이槎川(이차천): 당대의 유명한 문인인 후계 조정만(趙正萬)과 차천 이명항(李明恒)을 가리킵니다. 홍중성과 함께 나이 들어 시를 짓는 모임을 주도했습니다.
향산동락의 승(香山東洛之勝):향산(香山):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낙양의 향산사에서 노인들과 결성한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뜻합니다.
동락(東洛): 송나라의 명신 사마광이 낙양에서 원로 정승·학자들과 결성한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 일명 동락회)'를 뜻합니다. 즉, 최고 원로 문인들의 가장 품격 높고 영예로운 시 모임을 비유한 표현입니다.
원사마공고사(援司馬公故事) 앙연등석(昂然登席): 송나라 사마광이 젊은 시절, 나이 제한이 엄격했던 원로들의 고관 모임(낙양기영회)에 그의 학문과 명망 덕분에 특별히 젊은 나이로 당당하게 참석했던 고사를 말합니다. 후배였던 조하망이 이 고사를 대며 선배들의 모임에 당당히 합류했음을 나타냅니다.
우좌봉장궤(隅坐奉杖几):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모임 구석에 앉아 지팡이(杖)와 안석(几, 기대는 가구)을 챙기며 시중을 들던 모습을 뜻합니다. 홍양호 자신이 어릴 때 할아버지를 따라가 이 대단한 문인들의 모임을 직접 목격했음을 증언하는 대목입니다.
3. 문학적 가치
이 글은 18세기 조선 문단에서 선후배 문인들이 붕당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오직 '문학(시)'만으로 깊게 교류하고 존중했던 풍류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입니다. 어린 시절 이를 직접 목격한 홍양호의 따뜻하고 생동감 넘치는 시선이 돋보이는 명문장입니다.
西州孫侍郞君。䟽公遺事。來屬麗牲之辭。撫念疇昔。爲之愴然。謹按狀而叙之。公諱夏望字雅仲。
원문은 앞서 보신 묘갈명 서론(할아버지 시사의 추억)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서주 조하망의 손자인 조진관(曺鎭寬)이 홍양호에게 할아버지의 일대기(행장)를 들고 와 비석에 새길 글을 부탁하자, 홍양호가 과거를 회상하며 슬퍼하고 격식에 맞춰 비문을 쓰기 시작하는 도입부입니다.
서주(西州, 조하망)의 손자인 시랑(侍郞) 군(君, 조진관)이 공(조하망)의 유서(遺事, 행장)를 대략 정리하여 찾아와, 비석에 새길 글(麗牲之辭)을 부탁하였다.
이에 옛날(어린 시절 조하망 공을 뵈었던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슬프고 아련한 마음(愴然)이 든다. 이에 삼가 행장(行狀)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公)의 이름(諱)은 하망(夏望)이고, 자(字)는 아중(雅仲)이다.
2. 핵심 용어 및 표현 풀이
서주손시랑군(西州孫侍郞君): 서주 조하망의 손자인 조진관(曺鎭寬, 1739~1808)을 가리킵니다. '시랑(侍郞)'은 참판(參判, 지금의 차관) 직급을 고풍스럽게 부르는 말입니다. 조진관은 이조참판, 호조참판 등을 지냈기 때문에 홍양호가 그를 높여 '시랑 군'이라 부른 것입니다.
소공유사(䟽公遺事): 할아버지(조하망)가 남긴 평생의 업적과 일화(유사)를 소략하게 정리하거나 소통(안내)하여 가져왔다는 뜻입니다. 대개 비문을 부탁할 때는 가문에서 작성한 '행장(行狀)'을 함께 지참합니다.
여생지사(麗牲之辭): 비석에 새기는 글(비문)을 뜻하는 매우 격조 높은 고전적 표현입니다.고사 성어 풀이: '여생(麗牲)'은 고대 중국에서 제사를 지낼 때 희생양을 묶어두던 궁궐이나 사당 앞의 돌기둥을 말합니다. 훗날 이 돌기둥에 고인의 공덕을 새기기 시작하면서 비석을 뜻하게 되었고, '여생지사'는 곧 묘비명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속(屬): 글을 부탁하다, 위촉하다(託)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무념주석 위지창연(撫念疇昔 爲之愴然): '주석(疇昔)'은 지나간 옛날을 뜻합니다. 앞 문단에서 언급했듯, 홍양호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다가 조하망 공을 직접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어루만지듯 떠올리니 세월의 무상함과 고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서글퍼진다(愴然)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안상(按狀): 가져온 '행장(行狀, 고인의 일대기 기록)'을 격식에 맞춰 꼼꼼히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비문을 지을 때는 유족이 가져온 행장의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공휘하망 자아중(公諱夏望字雅仲): 전형적인 비문의 시작 방식입니다. 돌아가신 어른의 이름 앞에는 '숨길 휘(諱)' 자를 써서 예의를 표하고, 평소 부르던 자(字)를 연이어 밝힙니다.
3. 구조적 이해
이 문장을 기점으로 홍양호는 개인적인 추억담과 감상(서론)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조하망의 출생, 가계 기록, 관직 이력 등을 기록하는 공적인 비문 본론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세대의 인연이 손자 세대(홍양호와 조진관)로 이어져 명문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昌寧人。新羅駙馬繼龍之後。歷高麗有八世平章。逮我朝節義勳伐。奕世相望。曾祖諱文秀。詞翰有盛名。號雪汀。官工曹參判夏寧君。祖諱漢英。以持平抗義斥和。被拘燕獄三年。不屈而還。名聞夷夏。卒官禮曹參判。襲爵夏興君贈諡文忠。考諱憲周金溝縣令。
원문은 서주 조하망의 가문 배경과 조상들의 훌륭한 업적(가계, 家系)을 서술한 부분입니다.조선 시대 비문에서는 고인 개인의 훌륭함뿐만 아니라, 그가 얼마나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필수적인 격식이었습니다. 홍양호는 조하망의 가문인 창녕 조씨(昌寧 曺氏)가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충절과 문학으로 이름을 떨친 명문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공은) 창녕(昌寧) 사람이다. 신라의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인 조계룡(曺繼龍)의 후손이다.고려 시대를 거치며 8대(代)에 걸쳐 평장사(平章事, 정2품 정승)를 배출하였고, 우리 조선 제국(我朝)에 이르러서도 절의(節義)를 지킨 인물과 공훈을 세운 가문(勳伐)이 대대로 이어져 서로 바라볼 정도(매우 성함)였다.증조부의 이름(諱)은 문수(文秀)이니, 문장과 글씨(詞翰)로 높은 명성이 있었고 호는 설정(雪汀)이며 관직은 공조참판을 지내고 하녕군(夏寧君)에 봉해졌다.조부의 이름은 한영(漢英)이다.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의로움을 내세워 청나라와의 화친을 강력히 반대하다가(斥和), 청나라 심양의 감옥(燕獄)에 3년 동안 갇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돌아왔다. 그 명성이 조선(夷)과 청나라(夏)에 널리 알려졌으며, 최종 관직은 예조참판에 이르렀고 하흥군(夏興君)의 작위를 이어받았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아버지의 이름은 헌주(憲周)이니 금구현령(金溝縣令)을 지냈다.
2. 가문 인물 및 핵심 용어 풀이창녕인 신라부마계룡지후(昌寧人 新羅駙馬繼龍之後): 창녕 조씨의 시조인 조계룡(曺繼龍)을 말합니다. 설화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의 사위(부마)가 되어 창녕군에 봉해졌으며, 이로부터 창녕 조씨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팔세평장(八世平章): 고려 시대에 시조의 후손 중 8세대에 걸쳐 정2품 재상직인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인물이 연속해서 나왔음을 뜻하며, 가문의 엄청난 명망을 자랑하는 표현입니다.
절의훈벌 혁세상망(節義勳伐 奕世相望): '절의(지조와 의리)'와 '훈벌(공훈이 있는 가문)'이 '혁세(대대로)' '상망(끊이지 않고 이어짐)' 했다는 뜻입니다.
증조 문수(文秀) - 설정(雪汀): 조하망의 증조부인 조문수(1587~1652)를 가리킵니다. 문장과 서예로 이름을 날렸으며 공조참판을 지냈습니다.
조 한영(漢英) - 척화, 연옥삼년(燕獄三年), 이하(夷夏): 조하망의 할아버지인 조한영(1608~1670)에 대한 서술로, 이 가문의 가장 큰 자부심입니다.
척화(斥和):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 화친을 맺는 것에 목숨을 걸고 반대한 척화신(斥和臣)이었습니다.
연옥삼년(燕獄三年):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와 함께 청나라 심양(燕)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혀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척화의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이하(夷夏): '夷'는 조선을, '夏'는 중화(청나라)를 뜻하므로 적국과 조국 모두에 그 기개와 이름이 드높았음을 의미합니다. 사후에 나라에서 '문충(文忠)'이라는 최고의 시호를 내렸습니다.
고 헌주(憲周): 조하망의 아버지 조헌주를 뜻하며, 전라북도 김제의 옛 지명인 금구(金溝)의 현령을 지냈습니다.
3. 문맥적 의미
홍양호는 이 대목을 통해 "서주 조하망이 당당하게 대선배들 사이에서 문학을 논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신라·고려 때부터 이어진 명문가의 기상과 특히 할아버지 조한영이 청나라 감옥에서도 굽히지 않았던 위대한 충절과 학문의 가풍(家風)이 서려 있었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문의 뼈대가 이토록 훌륭했기에 조하망이라는 인물이 나올 수 있었다는 논리적인 연결을 보여줍니다.
妣贈貞夫人延安李氏。大提學一相之女。月沙文忠公之曾孫。縣令公疾劇。服毒藥先卒。以烈女㫌閭。以肅廟壬戌生公。英秀出凡。眉眼如畵。
서주 조하망의 어머니(延安 李氏)의 숭고한 절개(열녀 행적)와 조하망의 탄생 및 총명한 외모를 묘사한 부분입니다.조선 시대 사대부 가문에서 '열녀(烈女)'의 배출은 가문 전체의 도덕성과 명예를 극치로 높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홍양호는 조하망이 명신 가문 출신의 훌륭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으며, 그 어머니가 남편을 향한 지극한 정절로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받은 열녀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조하망이 태어날 때부터 비범한 풍모를 가졌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어머니(妣)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연안 이씨(延安 李氏)이니,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일상(李一相)의 딸이자 월사(月沙)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의 증손녀이다.
현령 공(아버지 조헌주)의 병환이 극도로 위독해지자, (어머니 이씨는 남편보다) 먼저 목숨을 끊으려고 독약을 마시고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이 일로 나라에서 열녀(烈女)로 인정하여 정려(旌閭, 정문)를 내렸다.
숙종(肅宗) 임술년(1682년)에 공(조하망)을 낳으셨는데, 영특하고 빼어남이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으며 눈썹과 눈(용모)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2. 가문 인물 및 핵심 용어 풀이
비증정부인 연안이씨(妣贈貞夫人延安李氏): '비(妣)'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뜻합니다. 조하망의 어머니는 사후에 남편의 품계나 본인의 절개 덕분에 정3품 이상 사대부 처에게 내리는 최고 등급의 명호인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나라에서 사후에 관직이나 품계를 높여줌)되었습니다.
대제학 일상지녀(大提學一相之女) - 월사문충공지증손(月沙文忠公之曾孫): 어머니 연안 이씨 가문의 화려한 내력을 밝힌 것입니다.
월사 이정귀(李廷龜, 1564~1635): 조선 중기 한문학의 4대가(신흠, 장유, 이식, 이정귀)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대문장가이자 영의정을 지낸 인물입니다. '문충(文忠)'은 그의 시호입니다.
이일상(李一相, 1612~1666): 이정귀의 손자이자 당대 문형(文衡, 대제학)을 지낸 명신입니다.
맥락: 조하망은 친가(창녕 조씨)뿐만 아니라 외가(연안 이씨) 역시 조선 최고의 문장가와 재상을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이었습니다.
복독약선졸(服毒藥先卒) - 이열녀정려(以烈女㫌閭): 남편이 위독하자 남편을 따라 죽기 위해 독약을 마시고 먼저 숨진 가슴 아프고도 강렬한 정절의 행적입니다. 조선 사회는 이러한 지조를 유교적 최고의 가치로 여겨, 나라에서 고향 집 앞에 붉은 문(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정려(旌閭)'를 내렸습니다.
숙묘임술생공(以肅廟壬戌生公): 숙종(肅宗, 숙묘는 숙종의 묘호) 8년인 1682년에 조하망이 태어났음을 뜻합니다.
영수출범 미안여화(英秀出凡 眉眼如畵): 어린 시절 조하망의 인물됨을 묘사한 표현입니다. 영리함이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외모(눈과 눈썹)가 그림처럼 수려하여 첫눈에 비범한 인재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찬사입니다.
3. 문맥적 의미
이 대목은 조하망이라는 인물이 지닌 학문적 유전자와 도덕적 가풍의 원천이 외가와 어머니에게서도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향해 목숨을 바친 열녀 어머니의 기상과 월사 이정귀로 대표되는 최고 문장가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조하망이 훗날 뛰어난 문장과 당당한 기개를 떨칠 수 있었음을 문학적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嘗從塾師受曾氏史略。自戰國以後。不煩指授。人稱神童。甫踰十歲。連喪考妣。哭泣哀慕之中。猶日夜劬書。一覽成誦。稍長以氣自豪。慕古人奇節。視世俗亡如也。乃載書入山寺。數年而歸。勉就泮庠。每試居前。至於二十餘魁。名聲大振。
서주 조하망이 어린 시절 '신동(神童)'으로 불렸던 일화와 부모님을 일찍 여읜 슬픔 속에서도 학문에 정진한 과정, 그리고 청년 시절 기개를 기르며 과거 시험(반상 시험)에서 독보적인 성적을 거두어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는 전성기의 서막을 다루고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일찍이 글방 스승(塾師)을 따라 증씨(曾氏)의 《십팔사략(史略)》을 배우는데,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의 내용부터는 번거롭게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치니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겨우 열 살을 넘겼을 때 잇달아 부모상을 당하였는데(連喪考妣), 곡을 하고 슬퍼하며 그리워하는 가운뎃날에도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으며(劬書)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워버렸다(一覽成誦).
조금 더 자라서는 기개(氣)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며 옛사람들의 기이하고 높은 절개(奇節)를 사모하였고, 세속의 자잘한 일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視世俗亡如也).
이에 책을 가득 싣고 산사(山寺)로 들어가 수년 동안 공부하다가 돌아왔다. 힘써 반상(泮庠, 성균관)에 들어가 시험을 치를 때마다 늘 수석(居前)을 차지하였고, 장원(魁)을 한 횟수가 스무여 번에 이르니 명성이 크게 떨쳤다.
2. 핵심 용어 및 배경 풀이
증씨사략(曾氏史略): 원나라 학자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역사서인 《십팔사략(十八史略)》을 말합니다. 초학자들이 중국 역사를 배울 때 필수적으로 읽던 입문서입니다.
연상고비(連喪考妣): '고(考)'는 돌아가신 아버지, '비(妣)'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뜻합니다. 앞 문단에서 어머니가 남편의 병환 중에 독약을 마시고 먼저 돌아가셨다고 했으므로, 조하망은 열 살 무렵에 부모님을 거의 동시에 모두 잃는 큰 비극을 겪은 것입니다.
구서(劬書): '구(劬)'는 노고스럽다, 부지런히 일하다는 뜻으로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느라 몹시 애를 씀을 의미합니다.
일람성송(一覽成誦): 한 번 보면(一覽) 바로 외워 읊조린다(成誦)는 뜻으로, 조하망이 가진 천재적인 기억력을 극찬한 표현입니다.
시세속망여야(視世俗亡如也): 세상의 유행이나 출세, 재물 같은 세속적인 것들을 마치 없는 것(亡)처럼 여겼다는 뜻입니다. 대장부로서 자잘한 이해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호방한 성품을 묘사합니다.
반상(泮庠): 조선 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을 고풍스럽게 이르는 말입니다. '반궁(泮宮)' 또는 '반학(泮學)'이라고도 합니다.
이십여괴(二十餘魁): '괴(魁)'는 시험에서 1등(장원)을 차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정기·비정기적으로 열리는 수많은 학업 시험(일강, 순제, 관시 등)에서 무려 20여 번이나 1등을 거머쥐었다는 뜻으로,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학문적 명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줍니다.
3. 문맥적 의미
이 부분은 조하망이 가문의 비극(부모의 요절)이라는 크나큰 시련을 학문에 대한 집념과 타고난 천재성으로 극복해 냈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산사에서 홀로 호연지기를 기르며 고대 현인들의 지조를 사모했던 청년기의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성균관 진학 후 치르는 시험마다 장원을 휩쓰는 독보적인 인재로 성장했음을 드라마틱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辛卯登進士試第一。生員試二等。國俗以進士魁元爲峻選。非文學地望服一世者。莫能擬議。旣坼名。李公宗城居二人。或惜之。金尙書鎭圭主試。笑曰彼不幸而逢此人。誰敢爭先。其負士望如此。
서주 조하망이 신묘년(1711년, 숙종 37년) 소과(사마시)에 응시하여 진士(진사시) 수석(장원)을 차지했던 영광스러운 순간과 당대 조정의 거물들이 그 천재성에 감탄했던 일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명문가 출신의 천재로 꼽히던 이종성(훗날 영의정)을 제치고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여, 선비들 사이에서 그의 명망이 독보적이었음을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1. 현대어 번역
신묘년(1711년)에 진사 시험(進士試)에 1등(장원)으로 합격하고, 생원 시험(生員試)에는 2등으로 합격하였다.
나라의 관습(國俗)에 진사 시험의 장원(魁元)은 매우 격이 높고 엄격한 선택(峻選)으로 여겼으니, 학문적 능력(文學)과 가문의 명망(地望)으로 한 시대를 복종시킬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논의조차 할 수 없는 자리였다.
합격자 명단을 발표(坼名)하고 나니, (명문가 천재였던) 이종성(李宗城) 공이 2등(二人)에 머물렀다. 이에 어떤 이들은 (이종성이 장원을 놓친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자 시험을 주관했던 상서(尙書, 판서) 김진규(金鎭圭)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저 사람(이종성)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사람(조하망)을 만난 것이니, 그 누가 감히 (조하망보다) 앞서기를 다투겠는가!"라고 하였다.
그가 선비들의 명망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2. 핵심 인물 및 용어 풀이
진사시 제이 생원시 이등(登進士試第一 生員試二等): 조선 시대 사마시(소과)는 생원과와 진사과 두 분야로 나뉩니다. 조하망은 이 두 시험을 동시에 합격한 것도 모자라, 문장력을 보는 진사과에서는 전체 수석(1등, 장원)을 차지하고, 경전 이해를 보는 생원과에서도 2등(상위권)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거둔 것입니다.
괴원 준선(魁元爲峻選) - 문학지망(文學地望): '괴원'은 시험의 1등을 뜻하며, '준선'은 매우 엄격하고 대단한 자리라는 뜻입니다. 문학적 재능('문학')은 물론이고, 가문의 격식과 명성('지망')까지 온 세상이 인정하는 최고의 인재만이 진사과 장원을 차지할 자격이 주어졌다는 조선 시대 지식인 사회의 인식을 보여줍니다.
탁명(坼名): 과거 시험 답안지에 붙여두었던 수험생의 이름 봉인을 뜯어 합격자를 대조하고 발표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공종성(李公宗城): 조선 후기의 명상(名相)이자 소론의 영수였던 이종성(李宗城, 1692~1759)을 가리킵니다. 훗날 영의정에 오르는 인물로, 그 역시 대단한 천재이자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이 시험에서는 조하망에게 밀려 2등을 기록했습니다.
김상서진규(金尙書鎭圭): 당시 시험을 총괄 감독한 시관(試官)이었던 예조판서 김진규(金鎭圭, 1658~1716)를 말합니다. 숙종 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로, '상서(尙書)'는 판서(판서, 판서급 관직)를 고풍스럽게 부르는 말입니다.
사망(士望): 선비들 사이에서 받는 존경과 두터운 명망을 뜻합니다. 시험관이었던 김진규마저도 "조하망의 답안이 너무 압도적이라 이종성이 불행하게 2등으로 밀린 것일 뿐, 조하망 앞에는 그 누구도 명함을 내밀 수 없다"고 선언할 만큼 조하망의 학문적 지위는 선비들 사이에서 절대적이었습니다.
3. 문맥적 의미
이 부분은 조하망이 청년 시절 문단과 조정의 원로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를 증명하는 일화입니다. 훗날 일국의 영의정이 되는 이종성 같은 거물급 인재조차 조하망이라는 천재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음을 당시 시험관의 생생한 찬사를 통해 전달함으로써, 비문의 주인공인 조하망의 위상을 극치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壬寅除章陵參奉不肯就。癸卯拜童蒙敎官。不得已應命。移禁府都事。因事遆。丙午拜司宰監奉事。棄歸驪江別墅。優遊林泉。歲餘復拜禁府。換掌苑奉事。陞長興直長。嶺賊平。以盟府奉血。官陞主簿。遷工曹佐郞。
서주 조하망이 소과 합격 이후 본격적으로 관직(음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의 당쟁과 혼란을 피해 자연으로 물러나기를 반복하다가 이인좌의 난(정희량의 난) 평정에 기여하여 품계가 오르고 중앙 관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임인년(1722년, 경종 2년)에 장릉 참봉(章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기꺼이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기묘년(1723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자 어쩔 수 없이 명을 따랐으며, 이어서 의금부 도사(禁府都事)로 자리를 옮겼다가 어떤 일로 인해 면직(遆)되었다.
병오년(1726년, 영조 2년)에 사재감 봉사(司宰監奉事)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여강(驪江, 여주 여주강)의 별장으로 돌아가 수풀과 샘물(자연)에서 여유롭게 노닐었다.
1여 년 뒤에 다시 의금부(禁府)에 임명되었다가 장원서 봉사(掌苑奉事)로 자리를 바꾸었고, 장흥고 직장(長興直長)으로 승진하였다.
영남의 도적(이인좌·정희량의 난)이 평정되자, 맹부(盟府)에서 피를 나누어 맹세한 서약서를 받드는 관리(奉血官)가 되었기에 관직이 주부(主簿)로 승진하였고, 이어서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자리를 옮겼다.
2. 역사적 배경 및 핵심 용어 풀이
임인제장릉참봉 불긍취(壬寅除章陵參奉不肯就): 1722년(경종 2년)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등으로 조정이 몹시 피비린내 나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입니다. 조하망은 인조의 부모를 모신 장릉(章陵)의 종9품 참봉 관직을 받았으나, 정치적 격랑을 피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동몽교관(童蒙敎官) - 금부도사(禁府都事) 체(遆): '동몽교관'은 어린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종9품 관직입니다. 사리에 밝은 조하망은 이 자리는 사양하지 못하고 응했으나, 사법 기구인 의금부의 '도사'(종6품)로 옮긴 뒤 얼마 안 가 '체(遞/遆, 교체되거나 면직됨)' 되었습니다.
사재감봉사(司宰監奉事) - 여강별서(驪江別墅) 우유임천(優遊林泉): '사재감'은 궐내의 고기나 소금, 땔나무 등을 관리하는 관청(종8품 봉사)입니다. 조하망은 1726년 이 자리를 버리고 경기 여주(驪江)의 별장으로 내려가 은거하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세속의 자잘한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 그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장원奉事(掌苑奉事) - 장흥직장(長興直長): '장원서'는 궁궐의 정원과 과일을 관리하는 관청이며, '장흥고'는 궐내의 돗자리나 종이 등을 관리하는 관청(종7품 직장)입니다. 순조롭게 관직을 거쳐 가며 품계가 올라갔음을 보여줍니다.
영적평(嶺賊平) - 맹부봉혈관(盟府奉血官): 1728년(영조 4년) 영남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인 '이인좌의 난(정희량의 난)'이 평정된 사건을 뜻합니다. 반란이 진압된 후 영조는 공신들을 모아놓고 동맹(공신 녹훈)을 맺었는데, 조하망은 이때 공신들이 마시던 희생양의 피와 서약서를 관리하는 '봉혈관'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난을 진압하는 과정이나 전후 수습에 기여했음을 증명합니다.주
부(主簿) - 공조좌랑(工曹佐郞): 맹부에서의 공로로 종6품 '주부'를 거쳐, 마침내 정6품 판임관이자 요직인 '공조 좌랑'으로 승진하며 조정 중앙 무대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3. 문맥적 의미
이 부분은 조하망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조건 출세하려 들지 않고, 물러날 때(여강 은거)와 나아갈 때(국가적 변란 수습)를 명확히 구분할 줄 아는 대장부의 지조와 지혜를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처신 덕분에 그는 격동기 속에서도 화를 입지 않고 영조의 신임을 얻어 중앙 관직(공조 좌랑)에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己酉出宰宜寧縣。當辛壬大㑴。辦穀數千斛。計口分賑。一境無瘠。癸丑與新按使不相能。投紱而歸。民鑱石頌之。丙辰擢庭試第一甲。用蔭路資竆。直陞通政付西樞。卽拜判决事。移兵曹參知。遷承政院同副承旨。上御晝講。命公陳經旨。公引物比類。剖析精微。因文生義。兼進規戒。上嘉納之。後日臨講。特召公曰夙聞文學。曩知其深於易也。冬乞暇省墓于驪湖。上促令還朝。時値親臨議囚。文案煩氄。上顧謂公曰非爾莫可。特命換刑房稱旨。上亟嘉賞焉。
서주 조하망의 공직 생활 중 가장 눈부신 전성기였던 지방관으로서의 뛰어난 구휼 치적, 대과(문과) 장원 급제, 그리고 영조(英祖)의 두터운 총애를 받으며 승지(承旨) 등 요직에서 활약한 일화를 다루고 있습니다.능력 있는 관료이자 깊이 있는 학자로서 왕에게 직접 실력을 인정받았던 조하망의 면모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기유년(1729년, 영조 5년)에 나가서 의령현령(宜寧縣)의 수령이 되었다. 마침 신축년·임인년(1721~1722년)의 대기근(大㑴)을 당하자, 수천 섬(斛)의 곡식을 마련하여 식구 수를 헤아려 가며 진휼(나누어 구제함)하니 고을 전체에 굶주려 파리해진 자가 없었다.
계축년(1733년)에 새로 부임한 관찰사(按使)와 뜻이 맞지 않자, 인끈을 던져버리고(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에 고을 백성들이 돌에 이름을 새겨 그의 공덕을 칭송(송덕비)하였다.
병진년(1736년, 영조 12년)에 정시(庭試, 대궐 마당에서 치른 과거 시험)에서 제1갑(第一甲,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음관(蔭路, 과거 없이 출세함)의 경력으로는 이미 진급할 자리가 끝났었기에, (장원 급제 덕분에) 곧바로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로 승진하여 첨지중추부사(西樞)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한성부 판결사(判决事)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자리를 옮겼다가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임금(영조)이 주강(晝講, 낮에 여는 학술 토론)에 임하여 공에게 경전의 깊은 뜻을 진술하게 하니, 공은 사물을 인용하고 무리를 비유하며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를 분석해 냈고, 글에 따라 뜻을 이끌어내면서 임금에 대한 경계와 권고(規戒)를 함께 올리니 임금이 기쁘게 받아들였다.
훗날 임금이 다시 강학에 임했을 때 특명으로 공을 부르며 말씀하시기를, "내 일찍이 그대의 문학을 들었으나, 지난번에 그대가 《주역(易)》에 참으로 깊은 조예가 있음을 알게 되었노라."라고 하셨다.
겨울에 휴가를 청하여 여강(驪湖, 여주)에 있는 조상의 무덤을 돌보았는데, 임금이 재촉하여 조정으로 돌아오게 했다.
당시 임금이 친히 죄수들을 심문하는 일(親臨議囚)을 가졌는데 문서와 사건이 몹시 번잡하고 어지러웠다.
이에 임금이 공을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 "네가 아니면 이 일을 해낼 사람이 없다."라고 하시고는, 특명으로 (승정원의) 형방 승지(刑房)로 자리를 바꾸게 하시니 임금의 뜻에 꼭 맞아 임금이 거듭 찬탄하고 포상하셨다.
2. 핵심 용어 및 역사적 배경 풀이
당신임대침(當辛壬大㑴) - 일경무척(一境無瘠): 신축·임인년(1721~1722년)은 신임사화 등 정치적 격변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대기근이 덮쳤던 가혹한 시기였습니다. 조하망은 의령현령으로서 탁월한 행정력을 발휘해 수천 석의 곡식을 비축·분배함으로써 관할 고을('일경')에서 굶어 죽거나 뼈만 남은 사람('척')이 없게 만드는 위대한 치적을 쌓았습니다.
투불이귀(投紱而歸) - 민참석송지(民鑱石頌之): '불(紱)'은 관인을 매던 끈으로,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왔음을 뜻합니다. 새로 온 경상도 관찰사(按使)의 부당한 요구에 타협하지 않고 사직한 올곧은 성품을 보여주며, 백성들은 이에 감동하여 그의 은혜를 돌에 새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습니다.
탁정시제일갑(擢庭試第一甲): 조하망은 이미 50대의 나이에 음서(가문의 덕)로 정6품 공조좌랑, 현령 등을 지내며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영조 12년 친히 치러진 과거 시험에서 당당히 전체 1등(장원)으로 급제하며 가문의 문학적 자존심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용음로자궁 직승통정부서추(用蔭路資竆 直陞通政付西樞): 조선 시대에 과거를 거치지 않은 음관은 진급할 수 있는 품계의 한계(자궁, 資窮)가 보통 정3품 통훈대부 이하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과 장원을 함으로써 그 벽을 깨고 곧바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으로 파격 승진하여 중추부(서추)의 관직을 받았습니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 상어주강(上御晝講):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의 승지가 되어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학구열이 매우 높았던 임금으로, 낮의 학술 토론인 '주강'에서 조하망의 학문적 깊이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낭지기심어역야(曩知其深於易也): 영조가 조하망을 특별히 아껴 던진 찬사입니다. 유교 경전 중 가장 난해하다는 《주역(周易)》에 대해 조하망이 보여준 명쾌한 해석력과 철학적 깊이를 왕이 직접 보증해 준 것입니다.
특명환형방칭지(特命換刑房稱旨): 왕이 죄수들을 직접 국문할 때는 엄청난 양의 법률 문서와 복잡한 이권이 얽혀 대단히 번잡('번율')해집니다. 영조는 이 까다로운 형사 업무를 처리할 적임자로 오직 조하망만을 신뢰하여, 담당 비서 보직을 형방 승지로 전격 교체(환형방)해 준 것입니다. 조하망은 임금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칭지')하여 포상을 받았습니다.
3. 구조적 이해
이 문단은 조하망이 백성을 사랑하는 따뜻한 애민(愛民) 정신과 권력에 굴하지 않는 강직함(관찰사와의 갈등), 그리고 왕마저 감탄하게 만든 천재적 학문성과 행정 실무 능력까지 겸비한 '조선 사대부의 이상향' 같은 존재였음을 극찬하는 비문의 하이라이트 부분입니다. 영조와의 끈끈한 군신 간의 신뢰가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丁巳除茂朱府使。己未遆拜禮曹參議。東遊金剛未還。除承旨尋遆。庚申庭請徽號。五啓不允。將進六啓。館閣諸公。辭竭莫能秉筆。日已晏矣。公以軍銜在班。大臣屬公製進。卽席揮毫展紙鳴颯颯。頃刻而就。滿座環視稱善。啓卽蒙允。咸嘖嘖曰此令之尙遅文任。朝廷之過也。
서주 조하망의 말년 관직 이력과 더불어, 조정의 거물급 대문장가들(관각诸公)이 모두 글을 지어내지 못해 쩔쩔매던 국가적 대사에서, 뛰어난 문장력으로 순식간에 임금의 허락을 받아내며 온 조정의 감탄을 자아냈던 드라마틱한 일화를 다루고 있습니다.당시 조정이 조하망을 대제학(文任)에 임명하지 않은 것이 조정의 잘못이라고 선비들이 아쉬워했을 정도로, 그의 문학적 위상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1. 현대어 번역
정사년(1737년, 영조 13년)에 무주부사(茂朱府使)에 제수되었고,
기미년(1739년)에 면직(遆)된 후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 승지(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면직되었다.
경신년(1740년, 영조 16년)에 (대왕대비의)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요청하는 정청(庭請, 백관이 대궐 뜰에 모여 간청함)이 있었다.
다섯 번이나 상소(啓)를 올렸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고, 장차 여섯 번째 상소를 올리려 할 때였다.
대제학과 문한을 담당하는 관료들(館閣諸公)이 밑천이 바닥나(辭竭) 더 이상 붓을 잡지 못하고 있었고(秉筆),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공(조하망)이 당시 군직(軍銜)의 명예직으로 백관의 반열(班)에 서 있었는데, 대신(정승)들이 공에게 (여섯 번째 상소문을) 지어 올리라고 부탁하였다.
공은 그 자리에서 즉시 붓을 휘둘렀는데, 종이가 펼쳐지며 삭삭(颯颯)하는 붓 소리가 거침없이 울려 퍼지더니 순식간(頃刻)에 글을 완성하였다.
만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둘러보고는 모두 훌륭하다고 찬탄하였다.
상소문이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임금의 허락(允)을 받아냈다.
이에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감탄하며(嘖嘖) 말하기를, "이분이 아직 대제학(文任)에 오르는 것이 이토록 늦어지고 있는 것은, 조정의 큰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핵심 용어 및 역사적 일화 풀이
정청 휘호(庭請徽號) - 오계불윤(五啓不允): 1740년(영조 16년) 조정의 신하들이 왕실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대비에게 대왕대비의 존호(휘호)를 올릴 것을 영조에게 강력히 청하는 상황입니다. 영조가 겸양의 미덕을 보이느라 5번이나 거절('불윤')하여 신하들은 임금을 설득하기 위해 매번 더 정교하고 감동적인 논리의 상소문(계문)을 새로 써야 했습니다.
관각제공 사갈막능병필(館閣諸公 辭竭莫能秉筆): '관각(館閣)'은 예문관, 홍문관, 규장각 등 국가의 최고 문장과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당대 최고의 천재 문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왕의 마음을 돌릴 강력한 명분과 문장력이 5회 만에 바닥나서('사갈') 누구도 감히 붓을 들고('병필') 여섯 번째 글을 쓰지 못해 쩔쩔매고 있던 긴박한 조정의 상황입니다.
공이군함재반(公以軍銜在班): 당시 조하망은 실무 요직이 아닌 오위도총부나 중추부 같은 군직(軍銜, 명예직 관직)을 차고 조신들의 반열에 참석해 있었습니다. 그의 학문적 깊이를 아는 영의정 등 우두머리 대신들이 위기 상황에서 조하망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휘호전지명삽삽(揮毫展紙鳴颯颯): 이 비문의 가장 역동적이고 문학적인 묘사입니다. 붓을 휘두르고(揮毫) 종이를 펼쳐(展紙) 글을 쓰는데, 주저함 없이 내달리는 거침없는 붓끝에서 '삭삭' 하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렸다는 뜻입니다. 조하망의 천재적인 문장 구성력과 속필을 생생하게 형상화했습니다.
지문임(尙遅文任): '문임(文任)'은 조선 시대 문관으로서 최고의 영예이자 문단의 영수인 '양관 대제학(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을 뜻합니다. 당대 일류 학자들의 집단인 관각을 제치고 왕의 허락을 단숨에 받아낸 조하망의 필력을 보고, 선비들이 "저런 대문장가가 아직 대제학을 못 달고 늦어지고 있는 건 나라의 손해"라며 혀를 내두른 것입니다.
문맥적 의미
이 부분은 앞서 소과 진사시에서 시험관 김진규에게 받았던 "누가 감히 그와 장원을 다투겠는가"라는 청년기의 명성이, 말년에 이르러서도 전혀 퇴색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조선 시대에 학문과 문장의 끝판왕으로 통하던 '관각'의 명사들이 모두 필력이 다해 침묵할 때, 명예직으로 물러나 있던 조하망이 단숨에 사태를 해결하는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독보적인 문학적 위치를 역사에 각인시키는 대목입니다.
辛酉拜大司諫。夏薦爲廣州府尹。尋罷去。壬戌知江陵府。重建鏡浦臺。暇日嘯詠。所製上樑文膾炙一時。甲子病遆。乙丑廟堂啓差承文院副提調。因辭職極陳時弊曰。科制也官方也良役也戎政也。革舊改制。條列中窽。上優批褒之。因除兵曹參議。公少因夜讀患眼眚。晩年益劇。求淸凉地。
서주 조하망의 후기 관직 생활과 함께 강릉부사 시절 경포대를 중건한 화려한 풍류, 영조에게 국가의 핵심 4대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한 상소(시무책), 그리고 평생 밤을 새워 책을 읽느라 얻은 안질(눈병)로 고생하며 말년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신유년(1741년, 영조 17년)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고, 여름에는 천거를 받아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직되어 물러났다.
임술년(1742년)에 강릉부사(江陵府)로 부임하여 경포대(鏡浦臺)를 새로 지었으며(重建), 관무의 여가가 나는 날에는 시를 읊조리며 노닐었다.
이때 그가 지은 〈경포대 중건 상량문(上樑文)〉은 한 시대 사람들의 입에 대단히 널리 오르내렸다(膾炙).
갑자년(1744년)에 병으로 면직(遆)되었다.
을축년(1745년)에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계를 올려 승문원 부제조(副提調)에 차출하였으나, 직책을 사양하면서 당시 국가의 폐단(時弊)을 지극히 진술하여 말하기를, "과거 제도(科制)의 문제, 관료 임용(官方)의 문제, 양인들의 군역(良役) 문제, 군사 행정(戎政)의 문제입니다."라고 하며, 낡은 관습을 혁파하고 제도를 고칠 것을 조목조목 핵심을 찔러 건의(條列中窽)하니, 임금(영조)이 훌륭한 비답(優批)을 내려 포상하였다.
이로 인해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다.
공(조하망)은 젊은 시절 밤을 새워 글을 읽다가 눈병(眼眚)을 앓았었는데, 만년에 이르러 증상이 더욱 심해지자 (눈을 식히고 쉴 수 있는) 맑고 서늘한 땅(淸凉地)을 구하였다.
2. 핵심 용어 및 역사적 배경 풀이
중건경포대(重建鏡浦臺) - 상량문회자일시(上樑文膾炙一時): 조하망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 관동팔경의 으뜸인 경포대를 크게 중건하였습니다. 이때 건물의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릴 때 축원하는 글인 〈경포대 상량문〉을 직접 지었는데, 이 글의 문장력이 너무나 아름답고 탁월하여 당시 문인들 사이에서 널리 찬양과 패러디의 대상('회자')이 되었습니다.
과제야 관방야 양역야 융정야(科制也 官方也 良役也 戎政也): 조하망이 영조에게 올린 조선 후기 국가 개혁을 위한 4대 핵심 의제(시무책)입니다.
과제(과거 제도): 부정부패와 변질로 얼룩진 과거 시험의 개혁.관방(관리 임용):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는 법.
양역(양인의 군역): 백성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던 군포 부과(훗날 균역법의 모태가 되는 논의)의 폐단 시정.
융정(군사 행정): 국방 안보 체제의 정비.
조열중관(條列中窽): 조목조목 나열한 개혁안이 사물의 가장 중요한 핵심과 정곡('관')을 찔렀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문장가가 아니라 국가의 대계를 읽을 줄 아는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우비(優批)는 왕이 신하의 상소에 대해 극찬하며 내리는 공식 답변입니다.
소인야독환안생(少因夜讀患眼眚) - 구청량지(求淸凉地): 조하망이 가진 천재성의 이면입니다. 젊은 시절 부모를 일찍 여의고 산사 등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등잔불 밑에서 독서('야독')를 거듭하다가 시력이 극도로 상하는 안질('안생')을 얻은 것입니다. 늙어서 눈병이 더욱 악화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요양하며 눈을 식힐 만한 자연의 거처('청량지')를 찾게 됩니다.
3. 문맥적 의미
이 부분은 조하망의 삶이 단순한 풍류 지식인에 머물지 않고, 행정가로서의 뚜렷한 족적(경포대 중건 및 상량문)을 남겼으며, 나아가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던 4대 폐단(과거·인사·군역·국방)을 정면으로 지적하여 영조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 '경세가(經世家)'의 깊이를 지녔음을 증명합니다. 또한 그의 눈병 일화는 평생 학문에 골몰했던 대학자의 숭고한 훈장과도 같은 배경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丙寅爲寧越府使。覽古興感。發於吟詠。有一聯曰從古越中三讓地。秪今江上九疑山。一時傳誦。以爲越中前無此作。又於錦江亭步板上韻。其兩聯曰錦水亭空明月在。碧桃花落故人來。紗籠古壁蛛絲老。霞珮朝元鶴羽催。流傳都下。
서주 조하망이 생애 마지막 무렵인 병인년(1746년, 영조 22년)에 영월부사(寧越府使)로 부임하여 남긴 불후의 명시들과 그 시구들이 한양(도하)의 문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으며 널리 전해졌던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비운의 임금 단종(端宗)의 애환이 서린 영월의 역사적 배경을 당대 최고 수준의 문학적 감수성으로 승화시킨 조하망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1. 현대어 번역
병인년(1746년)에 영월부사(寧越府使)가 되었다.
(영월의) 옛 유적을 둘러보며 마음속에 일어난 감흥(興感)을 시를 지어 읊조림(吟詠)으로써 표현해 냈다.
그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한 구절(一聯)이 있었다.
"예로부터 영월(越中)은 백이·숙제처럼 왕위를 세 번이나 사양했던 땅(三讓地)이요, 지금도 저 강 위에는 순임금이 묻힌 아홉 번 의심스러운 구의산(九疑山)이 서 있네.“
이 시구가 한 시대를 풍미하며 전해져 읊조려졌으니,
사람들은 "영월을 주제로 한 시 가운데 예전에는 결코 이만한 명작이 없었다(前無此作)"라고 극찬하였다.
또 (영월의 명소인) 금강정(錦江亭)에 걸려 있는 현판 시의 운자(步板上韻)를 따라 시를 지었는데, 그중 두 구절(兩聯)은 다음과 같았다.
"비단 같은 영월 강물(錦水) 위 정자는 텅 비어 있는데 밝은 달만 떠 있고, 벽도화(碧桃花) 꽃잎이 떨어져 흩날리니 옛 친구가 찾아오는 듯하구나.
사비단으로 감싼 옛 벽(紗籠古壁)에는 거미줄만 늙어가고,
새벽에 선계(仙界)의 황제를 알현하려 안개 노을 노리개 차고 가니 학의 깃털 부채가 재촉하는구려.“
이 시들 역시 한양 도성 아래(都下)까지 널리 유래하며 전해졌다.
2. 시구의 깊이 있는 고사 및 배경 풀이
이 문단에 등장하는 시구들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영월에 유배되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의 역사적 비극을 중국의 신화와 고사에 빗댄 고도의 상징적 명구입니다.
종고월중삼량지(從古越中三讓地) 지금강상구의산(秪今江上九疑山):삼량지(三讓地): 중국 주나라 시절 백이와 숙제가 서로 왕위를 사양하고 수양산으로 들어갔던 고사(삼량)를 뜻합니다.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 온 단종의 비극을 '왕위를 사양한 땅'으로 격조 높게 은유했습니다.
구의산(九疑山): 중국의 성군인 순(舜)임금이 남쪽을 순수하다가 창오의 들판에서 붕어하여 묻힌 산입니다. 봉우리가 9개라 분간하기 힘들어 구의산이라 불립니다. 영월의 동강과 낙화암 일대의 산세를 보며, 억울하게 죽어 영월 땅에 묻힌 단종을 '창오에 묻힌 순임금'에 비유한 것입니다. 당대 문인들이 "영월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의 시(前無此作)"라고 무릎을 친 이유가 바로 이 가슴 저린 비유 때문입니다.
금수정공명월재(錦水亭空明月在) 벽도화락고인래(碧桃花落故人來):금강정(錦江亭): 영월 동강 절벽 위에 있는 정자로, 단종이 승하했을 때 시종들과 기녀들이 강물에 투신한 슬픈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정자는 주인을 잃어 텅 비었으나 변함없는 달빛만 비추고 있고, 선계의 꽃인 벽도화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먼저 간 이들의 영혼이 찾아오는 듯한 환상적이고도 서글픈 정조를 그렸습니다.
사롱고벽주실로(紗籠古壁蛛絲老) 하패조원학우최(霞珮朝元鶴羽催):사롱고벽(紗籠古壁): 당나라 때 시인 당구(唐求)가 시를 지어 사비단(紗)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벽에 걸어두었던 고사, 혹은 당나라 시인 최교(崔郊)의 시가 유명해지자 사비단으로 씌워 벽을 보호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명사들의 시가 걸린 벽에 거미줄이 늙어가는 쓸쓸함을 뜻합니다.
하패조원(霞珮朝元): 도교의 신선이 안개(霞)로 만든 노리개(珮)를 차고 하늘의 군주(朝元)를 뵙는다는 뜻으로, 영월 땅에서 신선처럼 승하한 단종의 영혼이 천상계로 올라가는 장엄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신선 사상(도교적 색채)으로 미화한 극치입니다.
3. 문맥적 의미
홍양호는 이 대목을 통해 조하망이 말년(65세)에 눈병으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영월부사라는 관직을 수행하며 지역의 역사적 상처(단종의 비극)를 조선 문학사상 최고의 명시로 승화시켰음을 증언합니다. 그의 시가 지방에 머물지 않고 한양 전체('도하')를 뒤흔들며 선비들 사이에서 연이어 전창(傳唱)되었음을 보여줌으로써, 문장가로서 조하망의 생애 마지막 예술적 불꽃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兪侍郞健基擊節朗誦曰俱是仙語。此老殆不久於世耶。居歲餘。棄歸楊湖庄。感疾就醫于京。竟以七月初四日不起。享年六十六。九月葬于楊根水南。後十年移卜于驪州檟山里負午之原。
서주 조하망의 시에 대한 당대 최고 정승의 감탄과 예언, 그리고 공의 서거(임종) 및 안장, 훗날 묘소를 여주로 이장하기까지의 최종적인 일대기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당대의 명재상 유건기가 조하망의 시를 보고 "이것은 신선의 말(仙語)이니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하겠구나"라고 예언했던 일화와 함께, 공이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하면서도 풍류 넘쳤던 생을 마감하는 서글픈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시랑(侍郞) 유건기(兪健基) 공이 (조하망의 영월 시를 보고) 손뼉을 치며 장단을 맞추어(擊節) 낭송하고는 감탄하며 말하기를, "모두가 신선계의 말(仙語)이로구나. 이 노인(조하망)이 아무래도 이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 같소."라고 하였다.
그렇게 지낸 지 1년 남짓 지나, (공은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 양강(楊湖, 양평 양근강)의 별장(庄)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병을 얻어 의원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한양(京)으로 왔으나,
끝내 (정묘년, 1747년) 7월 4일에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향년(享年) 66세였다.
그해 9월에 양근(楊根, 지금의 양평)의 수남(水南) 땅에 장사 지냈다가,
10년 후에 묘 자리를 다시 알아보고 여주(驪州) 가산리(檟山里)의 오좌(午坐, 남쪽을 등지고 북쪽을 향함)를 등진 벌판으로 이장(移卜)하였다.
2. 핵심 인물 및 용어 풀이
유시랑건기(兪健基) - 시랑(侍郞), 격절낭송(擊節朗誦), 구시선어(俱是仙語):유건기(兪健基, 1689~1773): 조선 후기의 명재상으로 영의정, 좌의정 등을 지낸 정치가이자 학자입니다. '시랑'은 참판급을 높여 부른 표현입니다.
격절(擊節): 시의 맛과 리듬이 너무 훌륭하여 무릎을 치거나 손뼉을 치며 극찬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선어(仙語): 앞 문단에서 단종의 혼백이 천상계로 올라가는 모습을 '하패조원(霞珮朝元)' 등의 도교적·신선적 상징으로 묘사한 조하망의 시구를 가리킵니다. 유건기는 시가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로워 이 세상 사람의 글 같지 않으니, 조하망 공이 곧 선계(선계)로 돌아갈(죽음을 맞이할) 징조가 아닌가 하고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양호장(楊湖庄): 경기도 양평(양근) 남한강 일대의 아름다운 강변(양호)에 자리한 조하망의 말년 은거 별장입니다. 눈병을 앓던 그가 찾던 '청량지(淸凉地)'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칠월초사일불기(七月初四日不起): 서주 조하망은 영조 23년인 1747년 7월 4일에 향년 66세를 일기로 서거하셨습니다.
양근수남(楊根水南) - 이복우여주가산리(移卜于驪州檟山里) 부오지원(負午之原):처음에는 은거하던 양평(양근) 한강 남쪽에 묘소를 썼으나, 10년 뒤(1757년 무렵) 가문에서 명당을 다시 점쳐(이복, 移卜) 전통적인 가문의 연고지이자 훌륭한 산세가 있는 경기도 여주 가산리로 이장했습니다.
부오(負午): 장례 풍수용어로, 풍수지리상 '남쪽(午)' 방위를 등지고 앉아 '북쪽(子)' 방위를 바라보는 무덤의 방향(오좌자향, 午坐子向)을 뜻합니다.
3. 문맥적 의미
이 부분은 당대 최고 정승인 유건기의 "시가 너무 신비로워 세상에 오래 못 있겠다"는 감탄 섞인 예언이 불행히도 적중하여, 조하망이 양평 별장에서 병을 얻어 서거하는 서글픈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홍양호는 대학자이자 대문장가였던 조하망의 죽음을 단순히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자신의 시 구절처럼 인간 세상을 떠나 신선의 세계(선계)로 다시 올라간 것처럼 문학적이고 낭만적으로 승화시키며 위대한 인물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夫人德水李氏。縣監泰鎭之女。吏曹判書大提學澤堂諱植之玄孫。聰慧通敏。孝弟睦婣。有女士範。生於癸亥。卒於辛亥。始葬於檟山南。及公歿移祔焉。竊覸公脩幹鶴立。有出塵之表。性度亢爽。高視獨行。於人少許可。
서주 조하망의 부인인 덕수 이씨(德水 李氏)의 훌륭한 가문 내력과 부덕(婦德), 그리고 조하망 공의 생전 풍모와 고결한 성품을 인물 평론(人物評論) 형식으로 묘사한 부분입니다.
부인 역시 조선 최고의 대문장가 집안 출신임을 밝혀 가문의 격을 높이고, 조하망 공이 지녔던 범상치 않은 외모와 타협 없는 선비 정신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부인(夫人)은 덕수 이씨(德水 李氏)이니, 현감(縣監)을 지낸 이태진(李泰鎭)의 딸이자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택당(澤堂) 휘(諱) 이식(李植)의 현손녀(4대손)이다.
부인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막힘없이 민첩(通敏)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으며 친척들과 화목하여 여중군자(女士)의 모범(範)이 되었다.
계해년(1683년)에 태어나 신해년(1731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처음에는 여주 가산(檟山)의 남쪽에 장사 지냈다가, 공(조하망)이 세상을 떠나자 공의 묘소로 옮겨와 합장(移祔)하였다.
내가 가만히 공(조하망)의 풍모를 살펴보니, 훤칠한 체구(脩幹)에 학이 서 있는 듯(鶴立)하여 속세를 벗어난 비범한 외모(出塵之表)를 지니고 있었다.
성품과 기질(性度)은 드높고 시원스러웠으며(亢爽), 높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홀로 당당하게 행동(高視獨行)하였기에, 다른 사람들을 좀처럼 쉽게 인정하거나 허락하지 않았다(少許可).
2. 핵심 인물 및 용어 풀이
부인덕수이씨(夫人德水李氏) - 택당휘식지현손(澤堂諱植之玄孫): 조하망의 부인 가문 역시 친가·외가에 못지않은 조선 최고의 문한(文翰) 명가였습니다.
택당 이식(李植, 1584~1647): 신흠, 장유, 이정귀와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4대 문장가(이른바 '계곡·택당·상촌·월사')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조하망의 외증조부가 '월사 이정귀'였는데, 부인은 '택당 이식'의 현손녀이니 당대 최고 문장가 가문끼리의 완벽한 결합이었습니다.
여사범(女士範): '여사(女士)'는 학식과 덕망이 높아 선비에 비견될 만한 훌륭한 여성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부인 이씨가 사대부가 여성들의 모범('범')이 될 만큼 뛰어난 부덕을 가졌음을 뜻합니다.
이부(移祔): 부인이 공보다 16년 먼저 세상을 떠나(1731년 졸) 가산 남쪽에 먼저 묻혀 있었으나, 공이 서거하고 이장하는 과정에서 무덤을 옮겨와 남편과 함께 합장(祔葬)했음을 의미합니다.
수간학립 출진지표(脩幹鶴立 有出塵之表): 조하망의 외모에 대한 극찬입니다.
수간(脩幹): 키가 크고 몸집이 훤칠함을 뜻합니다.
학립(鶴立): 닭 무리에 서 있는 한 마리의 학(군계일학)처럼 풍채가 고고하고 돋보임을 비유합니다.
출진(出塵): 먼지 가득한 속세(塵)를 훌쩍 벗어났다(出)는 뜻으로, 신선과 같은 고결한 분위기를 자아냈음을 묘사합니다.
항상 고시독행 어인소허가(亢爽 高視獨行 於人少許可): 조하망의 내면적 성품입니다. '항상'은 매사에 당당하고 시원시원함을 뜻하며, '고시독행'은 남들의 눈치를 보거나 세속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높은 주관대로 당당하게 걸어갔음을 의미합니다. 학문과 문장의 기준이 워낙 높았기에 타인의 실력이나 품행을 쉽게 칭찬하거나 인정('허가')하지 않는 엄격함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3. 문맥적 의미
이 부분은 앞서 묘사된 조하망의 천재성과 문학적 성취가 그의 외모(군계일학의 풍모)와 성품(타협 없는 고고함)에서 고스란히 묻어났음을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또한 홍양호는 자신이 어릴 적 직접 보았던 조하망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니(竊覸)"라는 표현을 통해 생생하게 증언함으로써 비문의 사실성과 감동을 더하고 있습니다.
記性超羣。博通古今。文場酒席。談論焱發。常傾一座。文辭浩瀚。各體徧長。尤善於詩。雖一韻百篇。淊淊若宿搆。高華警絶。詞苑老匠。皆斂袵推讓。然亦不自貴重。常曰文不過稱其意氣而已。刻畫藻餙。蘄以傳後者。亦俗爾。揮灑淋漓。牋墨錯落。而輒棄不顧。以故篇什多散佚。只餘若干卷藏于家。始公自韋布負重名。
서주 조하망의 천재적인 기억력과 문학적 재능, 시(詩)를 짓는 탁월한 속도와 깊이, 그리고 자신의 위대한 문장을 세상에 남기려 연연하지 않았던 대장부다운 탈속(脫俗)적 태도를 극찬한 인물평의 핵심 대목입니다.문단의 노장들마저 그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며 사양했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던 조하망의 예술가적 풍모가 생생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기억력(記性)은 무리 중에서 단연 뛰어났고(超羣), 동서고금의 학문에 널리 통달하였다(博通古今). 과거 시험장(文場)이나 술자리(酒席)에서 담론을 나눌 때면 이야기가 불꽃처럼 터져 나와(焱發) 늘 온 좌중의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문장과 대화(文辭)는 넓고 깊었으며(浩瀚), 모든 문체(各體)에 두루 뛰어났으나 특히 시(詩)에 가장 능하셨다.
비록 하나의 운자(韻)로 백 편의 시를 짓더라도 물 흐르듯 거침이 없어(淊淊) 마치 미리 지어둔 것(宿搆) 같았으니, 풍격이 높고 화려하며 경이로울 정도로 빼어났다.
문단의 노련한 대가들(詞苑老匠)조차도 모두 공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고(斂袵) 최고로 추대하며 양보하였다.
그러나 공은 정작 자신의 글을 귀하게 여기거나 아끼지 않으셨다.
늘 말씀하시기를, "문장이라는 것은 자기의 의기와 기상(意氣)을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글자를 깎아내고 화려하게 꾸며서(刻畫藻餙) 기필코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蘄以傳後) 또한 세속적인 욕심(俗)일 뿐이다."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붓을 휘둘러 시원하게 글을 쓰고 종이와 먹이 어지러이 흩어져도(揮灑淋漓 牋墨錯落) 바로 버려둔 채 돌아보지 않으셨다.
이런 까닭에 그가 지은 작품(篇什)들이 대부분 흩어지고 없어졌으며(散佚), 겨우 약간의 권수(若干卷)만이 집에 소장되어 전해질 뿐이다.
처음에 공은 벼슬 없는 선비(韋布) 시절부터 이미 세상의 무거운 명성을 짊어지셨다.
2. 핵심 용어 및 문학적 표현 풀이
담론염발 상경일좌(談論焱發 常傾一座): '염발(焱發)'은 불꽃이 세차게 일어나는 모양을 뜻합니다. 조하망은 술자리나 학문적 토론 장소에서 말을 할 때 막힘이 없고 번뜩이는 통찰력이 쏟아져 나와, 앉아 있던 방 안의 모든 사람을 매료시키고 압도('경일좌')했음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일운백편 도도약숙구(一韻百篇 淊淊若宿搆): 조하망이 가진 천재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시를 지을 때 까다로운 한 가지 운자만을 사용해 100편의 시를 연이어 짓게 하더라도, 마치 미리 머릿속에 지어둔 글('숙구')을 그대로 베껴 쓰듯 물 흐르듯 거침없이('도도') 써 내려갔다는 찬사입니다.
사원노장 개염임추양(詞苑老匠 皆斂袵推讓): '사원'은 문단을, '노장'은 원로 대가들을 뜻합니다. '염임(斂袵)'은 옷깃을 가지런히 여민다는 뜻으로, 상대방의 학덕이나 재능에 깊은 경의와 존경을 표할 때 쓰는 전통적인 표현입니다. 나이와 경력을 불문하고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조하망의 재능 앞에 고개를 숙였음을 증명합니다.
각화조식 기이전후자 역속이(刻畫藻餙 蘄以傳後者 亦俗爾): 조하망의 예술관과 탈속적인 가치관이 드러나는 명구입니다. 글자를 조각하듯 파내고 화려하게 치장하여('각화조식') 어떻게든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고 안달하는 행위조차 세속적인 명예욕('속이')에 불과하다고 본 것입니다. 글은 오직 대장부의 호방한 의기(意氣)를 날 것 그대로 표현하면 그만이라는 고결한 사상을 보여줍니다.
휘쇄임리 전묵착락 이첩기불고(揮灑淋漓 牋墨錯落 而輒棄不顧): '휘쇄임리'는 붓을 휘둘러 먹물이 흥건하고 시원하게 종이를 적시는 거침없는 서예·작시의 모습을 뜻합니다. 그렇게 엄청난 명작들을 쏟아내고도 종이와 먹이 흩어진 방을 돌아보지도 않고 버려두었기에,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후세에 많이 소실('산일')된 안타까운 배경을 설명합니다. 현재 전하는 《서주집》은 가문에 겨우 남아있던 일부 보존본입니다.
위포(韋布): 부드러운 가죽 신발(韋)과 베옷(布)이라는 뜻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평민이나 무명 선비 시절을 고풍스럽게 이르는 말입니다. 조하망은 젊은 시절 과거에 급제하기 전부터 이미 조선 문단에서 독보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3. 문맥적 의미
이 부분은 조하망이 조선 후기 문단에서 왜 그토록 특별한 대접을 받았는지를 미학적으로 규명합니다. 그는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기술자가 아니라, 동서고금을 꿰뚫는 박학다식함, 단숨에 백 편의 시를 짓는 천재성,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명작조차 미련 없이 버릴 줄 아는 호방한 기개를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성품이 바탕이 되었기에 앞서 영월부사 시절 남긴 비장하고 아름다운 단종 추모시 같은 대작이 탄생할 수 있었음을 문학적으로 완벽히 뒷받침해 주는 대목입니다.
一世期之以潤色鴻猷。高步館閣。及夫遲晩通籍。後生少年。布列公卿。不肯低徊下僚。每求外補。自放於山水。當路者或惜其沉屈。公笑應曰此君輩事。於老夫何與。以是人多目之以倨傲。官遂不顯。然心輕爵祿。不求合於時。識者以是益高之。
서주 조하망의 공직 생활과 노년의 태도를 묘사한 부분입니다 [大提學洪良浩撰].
시대적 당쟁과 인사 불이익 속에서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았던 고고한 기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젊은 후배들이 먼저 고위직(정승·판서)에 오르는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지방관을 자처했던 조하망의 당당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온 세상(一世)이 공에게 국가의 위대한 대업과 외교 문서 등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일(潤色鴻猷)을 기대하였고, 대제학이나 홍문관 등의 학문 관서(館閣)에서 높이 걸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쟁 등으로 인해) 대과 급제와 관직 진출(通籍)이 너무 늦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공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후배와 소년들이 조정의 고위 관직(公卿)에 널리 포진하게 되었다.
공은 그들의 밑에서 낮은 관직에 머물며(下僚) 머뭇거리거나 굽신거리려 하지 않았다(不肯低徊). 이에 매번 지방관(外補)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여, 스스로를 산수(자연) 속에 내던져 방달하게 지냈다.
권세를 잡은 당권자(當路者)들 중에는 혹 공이 요직에 오르지 못하고 지방에 가라앉아 굽혀 있는 것(沉屈)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공은 웃으며 대답하기를, "그것은 그대들의 일이지, 이 늙은이(老夫)와 무슨 상관이 있겠소!"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공을 일컬어 오만하고 거만하다(倨傲)고 눈총을 주기도 했고, 결국 벼슬도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은 마음속으로 작위와 녹봉(爵祿)을 가볍게 여겼고, 굳이 세상의 흐름이나 유행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不求合於時).
깨어있는 안목을 가진 지식인들(識者)은 이 때문에 공을 더욱 높게 평가하였다.
2. 핵심 용어 및 역사적 배경 풀이
윤색홍유 고보관각(潤色鴻猷 高步館閣):윤색홍유(潤色鴻猷): '윤색'은 문장을 아름답게 다듬고 수식하는 것을, '홍유'는 국가의 거대한 군주적 대업이나 외교 문서를 뜻합니다. 즉, 국가의 가장 중요한 문서를 담당하는 최고의 대문장가가 되기를 온 세상이 기대했다는 의미입니다.
고보관각(高步館閣): 홍문관, 예문관 등 임금을 보필하는 최고 학문 기관에서 당당하게 출세 가도를 달리는 모습을 뜻합니다.
지만통적 후생소년 부열공경(遲晩通籍 後生少年 布列公卿): 조하망이 대과(문과)에 장원 급제했을 때는 이미 55세(1736년)의 노령이었습니다.
그가 관직 장부에 이름(通籍)을 늦게 올린 사이, 집안 배경이나 당파의 이점을 등에 업은 젊은 소론·노론 후배들이 정승·판서('공경')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습니다.
불긍저회하료 매구외보(不肯低徊下僚 每求外補): '저회(低徊)'는 고개를 숙이고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모양입니다. 아무리 관직 사회라지만 나이 어린 후배들 밑에서 쥐꼬리만한 하급 관직을 달고 눈치 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기개의 표현입니다. 이 때문에 앞서 보신 의령현령, 무주부사, 강릉부사, 영월부사 같은 외직('외보')만을 스스로 원해 떠돌았던 것입니다.
차군배사 어로부하여(此君輩事 於老夫何與): 권력자들이 "참 재능이 아깝게 시골에 썩고 있구려" 하며 동정하자 던진 조하망의 통쾌한 한마디입니다. 출세와 당파 싸움은 너희들의 비즈니스('君輩事')일 뿐, 대자연 속에서 시를 읊는 나('老夫')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호방한 대장부의 선언입니다.
목지이거오 관수불현(目之以倨傲 官遂不顯): 세속의 기준에서는 권력자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조하망이 오만방자('거오')해 보였을 것입니다. 줄을 대지 않으니 당연히 정승·판서 같은 높은 자리('관수불현')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심경작록 불구합어시 식자시익고지(心輕爵祿 不求合於時 識者以是益高之): 벼슬과 돈('작록')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기고 유행이나 권력에 아부('합어시')하지 않는 모습은 사대부의 진정한 미덕입니다. 당시 뜻있는 개념 학자들('식자')은 오히려 그의 이러한 무소유와 지조를 보며 최고의 선비라며 찬양('익고지')했습니다.
3. 문맥적 의미
이 문단은 조하망이 왜 당대 최고의 문장력을 가지고도 정승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는가에 대한 역사적 해명과 명예회복의 대목입니다. 그의 낮은 관직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이 어린 권력자들에게 숙이지 않겠다는 불타는 자존심과 권력보다 자연을 사랑했던 고결한 성품의 결과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들 일이다"라는 한마디는 이 비문 전체에서 조하망의 캐릭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백미입니다.조하망 공의 처신과 훌륭한 성품에 대한 총평이 마무리되었습니다.
後賜祭文。有曰陳同吐氣。蒼髮差池。退之得謗。名亦相隨。於此可見公之本末矣。逮夫暮年。公議難遏。朝廷將以淸要處之。槐院副提。盖是極選。而爲文苑主盟階也。未久而公遽逝。人莫不咨嗟歎惜。平生以早失怙恃。祿不逮養爲至痛。其典郡邑。必權奉祠版。每値喪餘。
서주 조하망의 사후 영조(英祖) 임금이 직접 내린 제문(祭文)의 감동적인 구절을 통해 공의 억울함과 위대함을 국가적으로 공인받았음을 밝히고, 말년에 뒤늦게나마 조정의 여론(公議)이 일어나 최고 요직에 임명되려던 찰나에 급작스럽게 서거한 안타까운 운명을 다루고 있습니다.또한 천재적인 삶의 이면에 평생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봉양하지 못했던 효자로서의 극진한 천륜의 아픔(至痛)이 서려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나중에 (임금께서 공의 사후에) 사제문(賜祭文, 왕이 제물을 내리며 지어 보낸 제문)을 내리셨는데, 그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진동(陳同)처럼 기개를 토해 내었으나 백발이 되도록 관직의 기회가 어긋났고(差池),한퇴지(韓退之)처럼 비방을 얻었으나 드높은 명성 역시 늘 그 뒤를 따랐도다.“
이 구절을 통해서 공의 평생 삶의 자취(本末)를 온전히 엿볼 수 있다.
공의 늘그막(暮年)에 이르러서는 공정한 여론(公議)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어, 조정에서는 장차 공을 청직(淸職)과 요직(要職)에 감싸 안아 등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외교와 문한의 요직인) 승문원 부제조(槐院副提)에 차출되었으니, 이는 대단히 엄격하게 선발하는 자리(極選)이자 장차 문단과 조정의 영수(文苑主盟)로 나아가는 계단이었다.
그러나 채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시니, 세상 사람들 가운데 탄식하고 아쉬워하지(咨嗟歎惜)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평생토록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早失怙恃), 벼슬을 하여 얻은 녹봉으로 부모님을 봉양하지 못한 것(祿不逮養)을 가장 큰 가슴의 한과 아픔(至痛)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고을 수령(郡邑)을 맡아 나갈 때면 반드시 권도를 발휘하여 부모님의 신주(祠版)를 모시고 다녔으며, 매번 기일을 맞이할 때마다 (극진히 애도하였다).
2. 제문(祭文)의 깊이 있는 고사 풀이
영조 임금이 직접 내려준 제문의 한 구절은 조하망이 당한 인사상 불이익과 억울한 비방(오만하다는 눈총)을 왕이 모두 알고 있으며, 그것을 중국의 위대한 인물들에 비유해 완벽히 명예를 회복시켜 준 엄청난 국가적 찬사입니다.
진동토기(陳同吐氣) 창발차지(蒼髮差池):진동(陳同): 중국 송나라 때의 기개가 넘치고 호방했던 인물인 '진량(陳亮, 자가 同甫)'을 뜻합니다 [大提學洪良浩撰]. 그는 당당한 기개를 토해내며 학문이 깊었으나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다가 늙어서야 겨우 급제했습니다.
창발차지(蒼髮差池):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蒼髮) 선배와 후배 사이의 관직 서열이나 기회가 어긋나고 꼬였다(差池)는 뜻입니다. 55세 늙은 나이에 장원 급제하여 후배들 밑에서 도는 외직을 돌았던 조하망의 불우함을 왕이 직접 '진동'에 비유하며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퇴지득방(退之得謗) 명역상수(名亦相隨):퇴지(退之): 당나라 최고의 대문장가이자 당송팔대가의 우두머리인 한유(韓愈, 자가 退之)를 뜻합니다. 한유는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아 세상의 시기와 질투, 비방(得謗)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앞 문단에서 조하망의 타협 없는 고고함을 세상 사람들이 '오만하다(倨傲)'고 비방했던 것을, 영조 임금은 "그것은 네가 당나라의 한유처럼 너무 위대한 대문장가라서 세상의 시기(비방)를 받았던 것일 뿐, 한유처럼 위대한 명성(名)이 항상 너를 따라다녔다"라고 최고의 극찬으로 위로해 준 것입니다.
3. 핵심 용어 및 문맥적 의미
괴원부제(槐院副提) - 문원주맹계(文苑主盟階): '괴원(槐院)'은 외교 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承文院)의 별칭입니다. 승문원의 제조와 부제조는 당대 최고 학자들의 '극선(極選, 최고의 선택)'으로 여겨졌으며, 이 자리를 거쳐야 문단의 영수인 '대제학(文苑主盟)'에 오를 수 있는 필수 코스(계단)였습니다. 영조가 뒤늦게 조하망을 대제학으로 삼으려 기틀을 다져주었으나, 부임하자마자 급서하여 온 나라가 탄식했음을 말합니다.
조실호시(早失怙恃) - 녹불체양(祿不逮養): '호(怙)'는 아버지의 의지처, '시(恃)'는 어머니의 의지처를 뜻하여 부모를 일찍 여읜 슬픔을 의미합니다. 앞서 열 살 무렵 어머니가 독약을 마시고 아버지를 따라 돌아가셨던 가문의 비극을 평생의 한으로 품고, 고을 수령으로 갈 때마다 부모님의 신주('사판')를 마차에 모시고 다니며 효도를 다 했던 눈물겨운 인간 조하망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영조 임금의 감동적인 사제문과 공의 마지막 효행에 대한 서술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비문의 전통적 격식에 따라 그가 남긴 자손들의 이름(계보)과 비석의 최종 결론인 시 형식의 명문(銘文)이 이어질 차례입니다.
前一朔居宿於外。齋沐行祀。親檢饍羞。誠敬哀慕。有足感動人者。友同氣甚篤。事仲兄如嚴父。保妹弟如嬰兒。撫視遺孤如己出。此其內行之懿也。
서주 조하망의 지극한 효성과 우애, 그리고 가족을 돌본 따뜻한 성품 등 그의 사생활과 집안에서의 훌륭한 행실(내행, 內行)을 구체적인 일화를 통해 극찬한 부분입니다 [大提學洪良浩撰].
앞서 언급된 대장부로서의 호방한 외면(외직을 돌며 시를 읊던 모습) 뒤에, 가문을 지키고 천륜을 다했던 유학자로서의 따뜻하고 숭고한 내면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부모님의 제삿날이 다가오면) 한 달 전부터 사랑채(外)에서 따로 잠을 자며 거처하였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재계하고 목욕(齋沐)한 뒤 제사를 올렸으며, 제사에 올릴 음식(饍羞)을 친히 하나하나 검사하였으니, 그 정성과 공경함, 그리고 슬퍼하며 사모하는 마음(誠敬哀慕)은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함이 있었다.
형제자매(同氣)들과의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둘째 형님(仲兄)을 모실 때는 마치 엄한 아버지를 대하듯 하였고, 누이동생과 남동생(妹弟)을 보호할 때는 마치 갓난아기(嬰兒)를 돌보듯 품어주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형제들이 남긴 외로운 조카들(遺孤)을 어루만지고 보살필 때는 마치 자신이 낳은 친자식(己出)처럼 여기셨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집안에서 행한 아름다운 덕행(內行之懿)이다.
2. 핵심 용어 및 유교적 가치 풀이
전일삭 거숙어외(前一朔居宿於外) - 재목행사(齋沐行祀) 친검선수(親檢饍羞):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부모의 제사를 대하는 최고의 정성을 묘사합니다. 제사 하루 이틀 전이 아니라 무려 '한 달 전(前一朔)'부터 부인과 방을 쓰지 않고 사랑채('外')에 홀로 거처하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다스렸습니다('재계').
제사상에 올라가는 고기와 나물 등의 제수 음식('선수')을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눈병을 앓는 와중에도 직접 검사하는 모습에서, 열 살에 부모를 잃고 평생 '녹봉으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했다'며 가슴을 쳤던 조하망의 한 맺힌 효심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우동기심독(友同氣甚篤): '동기(同氣)'는 부모의 같은 기운을 받고 태어난 형제자매를 뜻합니다. 형제간의 우애를 뜻하는 단어인 '우(友)'를 동사로 써서, 형제들과의 우애가 지극히 두터웠음을 나타냅니다.
사중형여엄부(事仲兄如嚴父): 조하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집안의 어른이 된 둘째 형님('중형')을 친아버지처럼 깍듯이 공경하며 집안의 질서와 예법을 지켰습니다.
보매제여영아(保妹弟如嬰兒) 무시유고여기출(撫視遺孤如己出):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남겨진 동생들을 마치 부모의 심정으로 안타까워하며 갓난아기('영아') 다루듯 애지중지 키워냈습니다. 또한 먼저 세상을 떠난 형제들이 남긴 조카들('유고')을 차별하지 않고 내 자식('기출')과 똑같이 입히고 먹여 길러냈습니다.
내행지의(內行之懿): 조정에서 내리는 공적인 업적(외행)과 대비되는, 가정 내에서의 도덕적 품행과 훌륭한 행실을 뜻합니다. 유교 사회에서는 밖에서 아무리 글을 잘 쓰고 정치를 잘해도 집안에서의 덕행('내행')이 불량하면 가짜 선비로 보았습니다. 홍양호는 조하망이 안팎으로 완벽했던 진짜 여중군자이자 대장부였음을 이 단어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3. 문맥적 의미
이 문단은 앞서 세속의 권력자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 '오만하다(倨傲)'고 비방을 받았던 조하망의 성품이, 사실은 냉혹하거나 이기적인 것이 아님을 명확히 증명해 줍니다. 그는 밖으로는 타협 없는 서슬 퍼런 선비의 기개를 지녔으나, 안으로는 부모의 제사에 눈물 흘리고, 동생과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품어 안은 가슴 따뜻한 인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로써 비문의 전반적인 인물 묘사가 더욱 입체적이고 감동적으로 완성됩니다.
가정 내에서의 지극한 덕행에 대한 서술이 끝났습니다.
이제 비문의 격식에 따라 그가 남긴 자손들(아들, 손자, 증손자)의 이름과 관직 계보가 간략히 언급된 뒤, 비석의 꽃이라 불리는 최종 시 형식의 명문(銘文)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凡擧五男。長命九有文行。纔冠而夭。次命五有三男一女。男允世,允厚,允恒。女歸洪樂恒。文科今參議。允世子曰學振。有孫錫路。實尸公祀。次命百有一男三女。男允美。女歸吳琬,成觀柱,趙絅采。允美子曰玄振。次命億縣監有三男二女。男允遇,允邁縣監,允遂今校理。女歸尹光心今郡守。尹亨植。允遇子曰始振,好振。允邁子曰鴻振進士。次命峻郡守。出爲季父后。有一男允大文科今參判。允大子曰鳳振。餘皆幼。銘曰。
서주 조하망의 자손들의 이름, 관직, 혼인 관계를 상세히 기록한 가계도(家系圖) 정보와, 비문의 가장 핵심이자 결론인 '명(銘, 시 형식으로 고인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을 시작한다'는 도입부입니다.
조선 시대 비문에서는 자손들이 얼마나 번창했는가가 고인의 복덕을 증명하는 중요한 척도였습니다. 홍양호는 조하망 공의 다섯 아들과 그 아래 손자, 증손자들의 가계와 관직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모두 다섯 아들(五男)을 두었다.
맏아들(長)은 조명구(曺命九)이니 문학적 재능과 훌륭한 행실(文行)이 있었으나, 겨우 갓을 쓸 나이(20세 무렵)에 일찍 죽었다(夭).
둘째 아들(次)은 조명오(曺命五)이니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조윤세(曺允世), 조윤후(曺允厚), 조윤항(曺允恒)이다.
딸은 홍낙항(洪樂恒)에게 시집갔으니, 홍낙항은 문과(대과)에 급제하여 지금은 참의(參議, 정3품) 관직에 있다.
조윤세의 아들은 조학진(曺學振)이며, 그에게 조석로(曺錫路)라는 손자가 있으니 실로 이 사람이 (증손자로서) 공(조하망)의 제사를 주관(尸公祀)하고 있다.
셋째 아들(次)은 조명백(曺命百)이니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조윤미(曺允美)이다.
딸들은 각각 오완(吳琬), 성관주(成觀柱), 조경채(趙絅采)에게 시집갔다.
조윤미의 아들은 조현진(曺玄振)이다.
넷째 아들(次)은 조명억(曺命億)이니 현감(縣監)을 지냈고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조윤우(曺允遇), 현감을 지낸 조윤매(曺允邁), 그리고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은 교리(校理, 정5품 홍문관 요직)인 조윤수(曺允遂)이다.
딸들은 지금 군수(郡守)인 윤광심(尹光心)과 윤형식(尹亨植)에게 각각 시집갔다.
조윤우의 아들은 조시진(曺始振), 조호진(曺好振)이다.
조윤매의 아들은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한 조홍진(曺鴻振)이다.
다섯째 아들(次)은 군수(郡守)를 지낸 조명준(曺命峻)인데, 막내삼촌(季父)의 뒤를 이어 양자로 나갔다(出爲季父后).
1남을 두었으니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은 참판(參判, 종2품 차관급) 자리에 있는 조윤대(曺允大)이다.
조윤대의 아들은 조봉진(曺鳳振)이다.
그 외에 나머지(손자, 증손자)들은 모두 아직 나이가 어리다(幼).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어 새긴다.
2. 핵심 용어 및 명칭 풀이
재관이요(纔冠而夭): '관(冠)'은 성인식인 관례를 치르는 나이(20세)를 뜻합니다. 큰아들 조명구가 스무 살 청년이 되자마자 뛰어난 재능을 다 펼치지 못하고 요절('요')했음을 안타까워하는 표현입니다.
금참의(今參議) · 금교리(今校理) · 금참판(今參判): 비문을 작성하는 18세기 후반(홍양호가 대제학으로 활동하던 시절)을 기준으로, 조하망의 사위와 손자들이 당당히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의 고위 관직(참판, 참의, 홍문관 교리 등)을 맡아 활약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문이 대를 이어 번창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실시공사(實尸公祀): '시(尸)'는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이나 우두머리를 뜻합니다. 직계 종손들이 요절하거나 세대가 바뀌어, 현재는 둘째 아들의 증손자인 조석로가 서주 조하망 공의 불천위나 가문의 대종 제사를 책임지고 받들고 있다는 가문 내부의 계보 기록입니다.
출위계부후(出爲季父后): 조선 시대 사대부 가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종법제적 관습입니다. 다섯째 아들 조명준이 아들이 없던 조하망의 막내동생('계부')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후')로 입양 갔음을 뜻합니다.
3. 문맥적 의미
이 부분은 조하망이 남긴 훌륭한 덕행과 문학적 명성이 자손들에게 복으로 이어져, 사후에 아들, 사위, 손자들이 줄줄이 참판과 참의 등 요직에 오르며 가문을 번성하게 했음을 유족의 행장에 근거해 낱낱이 밝히는 격식입니다.
문장 끝의 "명왈(銘曰)"은 이제까지 서술한 산문 형식의 일대기(序)를 모두 마치고, 비석의 뒷면이나 하단에 4언 혹은 5언 시의 형태로 고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찬양하는 비문의 최종 결론부로 진입함을 알리는 격식 있는 선언입니다.서주 조하망 묘갈명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최종 시 구절(銘文)이 이어집니다.
서주 조하망 묘갈명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최종 명문(銘文, 시 형식으로 고인의 공덕을 총찬양하는 글)입니다 [大提學洪良浩撰].
글쓴이 홍양호는 사언시(四言詩) 형식을 빌려 조하망의 타협 없는 선비 정신(志操), 세속을 압도한 문장의 기상(氣韻), 과거 시험에서의 독보적인 업적, 그리고 자연 속에 깃들었던 풍류와 신선 같은 삶을 장엄하고 압축적인 은유로 극찬하고 있습니다.
1. 현대어 번역
선비(士)는 지조와 정조(志操)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문장(文)은 기개와 운치(氣韻)를 으뜸으로 삼는다네.
뜻이 높으면(志高) 어떠한 처지에도 굽히거나 꺾이지 않고,
기운이 창성하면(氣昌) 뿜어져 나오는 글이 조화롭고 여유롭다네.
예로부터 두 가지를 겸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제 우리 공(公, 조하망)에게서 그것을 똑똑히 보았도다.
성균관 수많은 선비 사이에서 스무 번이나 장원(廿魁)을 하고도,
스스로 그것을 대단한 기교(工)로 여겨 자랑하지 않았네.
대궐 마당 넓은 시험(大庭, 대과)에서 다시 한 번 수석을 차지하니,
마치 훌륭한 말들이 가득하던 기북(冀北)의 벌판이 텅 빈 듯했네.
달나라의 붉은 계수나무(丹桂)가 홀로 우뚝 솟아오르듯,
잡풀이 우거진 숲(灌叢) 위로 홀로 빼어나게 솟구쳤도다.
싸구려 질그릇(瓦缶) 같은 자잘한 글들이 어지럽게 울려 댈 때,
홀로 귀한 옥으로 만든 종(球鍾)을 두드려 웅장한 소리를 냈네.
고관대작의 관복과 인끈(簪組)을 흙먼지나 풀때기(土芥)처럼 가볍게 보고,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진정한 벗(朋)으로 삼아 따랐도다.
여주의 강물(驪湖)은 맑고 시원하게 내달리고,
영월의 산봉우리(越峀)는 높고도 가파르게 솟아 있네.
호방하게 시를 읊고 소리 높여 대창(豪吟大唱)하니,
문장의 신비로운 빛(光恠)이 무지개처럼 하늘을 찌르는구나.
안개 노을 노리개(霞珮) 차고 신선처럼 飄然(표연)히 떠나 가시니,
이제 넉 자 높이의 무덤(四尺遺封)만이 이곳에 남겨져 있도다.
[대제학 홍양호 지음]
2. 구절별 핵심 은유 및 고사 풀이
지고즉무소충굴 기창즉발지용용(志高則無所充詘 氣昌則發之舂容):조하망의 내면을 정의하는 명구입니다. 뜻이 높았기에 나이 어린 권력자들 밑에서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타고난 기운이 장대했기에 그의 문장은 억지로 짠 듯 옹졸하지 않고 종소리처럼 울림이 크고 여유로웠다('용용')는 찬사입니다.
재관대정 기북수공(再冠大庭 冀北遂空):기북수공(冀北遂空): 중국 당나라 한유(韓愈)가 쓴 〈송석처사서(送石處士序)〉에 나오는 고사입니다. 중국 기주(冀州)의 북쪽 벌판은 명마(훌륭한 말)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인데, 백락(伯樂)이라는 최고의 말 감정가가 그곳의 좋은 말들을 모조리 골라 뽑아가니 벌판이 텅 비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조하망이 대궐 과거 시험('대정')에서 압도적인 실력으로 장원을 차지하자, 조정의 다른 인재들이 모두 빛을 잃고 무대 아래로 사라진 모습을 비유한 극치입니다.
단계고정 수출관총(丹桂孤挺 秀出灌叢):단계(丹桂): 전설 속 달나라에 자란다는 붉은 계수나무로, 과거 시험 급제(특히 장원)를 상징합니다. 평범한 선비들의 자잘한 글을 잡목 숲('관총')에 비유하고, 조하망의 독보적인 문학을 홀로 고고하게 솟아오른 달나라 계수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와부란명 독알구종(瓦缶亂鳴 獨戛球鍾):와부(瓦缶): 흙으로 구운 보잘것없는 질그릇(악기)입니다.
구종(球鍾): 아름다운 귀인의 옥(球)으로 만든 거대하고 신성한 종입니다.당대 세상의 사치스럽고 변질된 문학적 유행들을 질그릇 깨지는 소리에 빗대고, 오직 조하망의 시와 문장만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맑고 웅장한 옥종 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격찬한 것입니다.
잠조토개 산수붕종(簪組土芥 山水朋從):'잠조'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머리에 꽂던 비녀(簪)와 인끈(組)으로 부귀영화를 뜻합니다. 벼슬을 썩은 풀때기나 흙먼지('토개')처럼 아낌없이 내던지고 외직으로 나가 전국의 명산대천을 진짜 친구('붕종')로 삼았던 공의 탈속적인 사상을 요약했습니다.
여호청쇄 월수농종(驪湖淸駛 越峀巃嵸):조하망의 생애 후반부와 영혼이 깃든 장소들을 아름다운 대구(對句)로 표현했습니다. 말년에 안질을 치료하며 요양하던 여주(여호)의 강물과, 불후의 명시를 남겼던 영월(월수)의 장엄한 산세를 연결하여 그의 호방한 기상이 자연의 크기와 닮아있음을 보여줍니다.
하패표연 사척유봉(霞珮飄然 四尺遺封):앞서 영월 금강정 시에서 단종의 혼백을 '하패조원(안개 노을 노리개 차고 상제를 뵙다)'이라 미화했던 조하망 본인의 시구를 홍양호가 오마주하여 비문의 마지막 문장으로 되돌려준 것입니다. 조하망 공 역시 신선이 되어 안개 노리개를 차고 하늘로 표연히 날아갔으니, 이 지상에는 오직 그의 육신이 잠든 자그마한 무덤(사척유봉, 약 120cm 높이의 무덤)만이 고요히 남아 영원히 역사를 증언할 것이라는 슬프고도 장엄한 애도입니다.
3. 《서주집》 부록 묘갈명 총평
이로써 이계 홍양호가 지은 《서주집》 부록 묘갈명 병서의 전체 텍스트 풀이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비문은 단순한 이력의 나열을 넘어, 18세기 사대부 문인들이 추구했던 최고의 이상형(높은 지조, 압도적인 문장력,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집안에서의 극진한 효성과 우애)을 서주 조하망이라는 인물을 통해 완벽하게 구현해 낸 조선 후기 비문 문학의 정수이자 명문장입니다.
조하망 曺夏望
조선 후기에, 대사간, 승문원부제조, 영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1682년(숙종 8) ~1747년(영조 23)
조선 후기에, 대사간, 승문원부제조, 영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아중(雅仲), 호는 서주(西州). 조문수(曺文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한영(曺漢英)이고, 아버지는 금구현령 조헌주(曺憲周)이며, 어머니는 이일상(李一相)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1년(숙종 37) 사마시에 합격, 1722년(경종 2) 장릉참봉(章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그 뒤 동몽교관(童蒙敎官)·공조좌랑·의령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판결사·승지·참찬관(參贊官)을 지내면서 어사를 파견하여 양정(良丁)을 살필 것을 청하였다.
1739년 승지를 지내고, 1741년 대사간, 다음해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경포대를 중수, 상량문을 지어 그 문장으로 격찬을 받았다. 1745년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지내고, 이듬해 영월부사로 전임하였다가 병으로 사퇴하였다. 저서로 『서주집』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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