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문화

Re: 울산 원강사기 圓岡祠記 | 좌승지 엄기( 左承旨 嚴耆), 엄흥도 후손 찾은 기록

작성자김원식|작성시간26.06.09|조회수34 목록 댓글 0

국역) 충의공 엄선생 실기 : 忠毅公嚴先生實紀
원서명 忠毅公嚴先生實紀
저/편자 엄석헌 (嚴碩憲 , ? ~ ?) 편, 엄택진 (嚴垞鎭 , ? ~ ?) 편
원강사기 圓岡祠記 | 좌승지 엄기( 左承旨 嚴耆)

강원국학자료 국역총서 03, 율곡연구원 발행 20221.2.25

원강사기 員岡祠記
[정조 기미년(1797, 정조 21)에 건립하였다]
          좌승지 엄기( 左承旨 嚴耆)
≪좌전(左傳)≫에 이르기를, “귀신은 *동류(同類)가 지내는 제사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모셔야 할 귀신이 아닌데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영월(寧越) 사람인데 울주(蔚州)에 사당을 짓는 것은 아무 의리가 없으니, 신이 흠향하겠는가?
아! 공의 절개는 하늘에 있어서는 일월성신(日月星辰)과 같고, 땅에 있어서는 산악과 같아서 만고의 세월이 지나서도 사라져 없어질 수 없다.
그러나 드러나고 감추어지는 것은 때에 달려 있다.
처음에 공이 한목숨 바쳐 큰 *강상(綱常)을 부지할 때 어찌 사후의 명성에 뜻을 두었겠으며, 또한 어찌 후손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동청나무에 새벽 달빛 비치니 *금속산(金粟山)으로 유해를 몰래 짊어지고 갔고, 창해에 돗단배 타고 떠났던 *치이자피(鴟夷子皮)의 고고한 자취를 따를 길이 없다. 당시의 종적은 비유컨대 학이 떠난 뒤 구름이 텅 비고 용이 돌아간 뒤 강물만 아득한 것과 같다. 더구나 그 후손들이 위축되어 감히 세상에 나오지 못한 것이 거의 수백 년이다.
*엄응탄(嚴應垣)【‘원(垣)’ 자로 잘못 쓰여 있다.】 과 엄응일(嚴應一)에게 후사가 없다는 애사(哀辭)는 지사(志士)로 하여금 한을 품게 하고, *엄제한(嚴悌漢)이 제사를 대신 받든다는 명문(銘文)을 보아 외손만 홀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고양(高陽)의 호적과 예천(醴泉)의 계파가 어지러이 섞여 나와 그 진위를 가릴 수 없다.
비록 우리 종가에서도 감히 단언하여 의혹을 분변하지 못하는 탓에 조정에서 후손을 녹용(錄用)하는 은명(恩命)을 빠뜨려 시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태평 시대에서 미흡했던 전례(典禮)라고 하겠다.
울산의 종가 엄석헌(嚴碩憲)·엄가헌(嚴家憲) 종형제가 입증할 만하고 믿을만한 보계(譜系), 지갈(誌碣), 장적(帳籍), 보첩(報牒)을 가지고 와서 내게 말하기를, “감히 선조 증 참판공(贈參判公)의 사당에 붙일 기문을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천천히 궁구하며 자취를 더듬어보니, 처음에는 못내 의심스럽다가 중간에는 깜짝 놀라고 끝내는 의혹이 확 풀려 감탄하기를, “정말이구나, 정말이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대개 다섯 가지가 있다. 
우리 종친은 다른 본(本)이 없는데 선조가 처음 경주(慶州)를 관향으로 삼은 것은 분명 화를 입을까 두려워 일족에서 따로 갈라진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증거이다.
*노릉(魯陵)을 삼가 봉안한 것은 무신년에 시작되었고, 옛 본적을 회복하고 증조의 이름을 적어 넣은 것도 기유년(1729, 영조 5) 호적대장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감추어졌다가 마침내 드러난 것은 이치로 보면 당연히 그렇게 되는 법이다. 

이것이 두 번째 증거이다.
노명호(魯命好)가 구적(舊籍)에서 외조부의 성을 모두 꺼린 데에서 두렵게 여겼다는 사실을 더욱 알 수 있다. 

이것이 세 번째 증거이다.
예조(禮曹)의 관리 *박사정(朴師正)은 주대(奏對)에서, *“엄 아무개의 자손들이 영남에 옮겨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울산이 바로 영남이다. 

이것이 네 번째 증거이다.
*작동(鵲洞)의 묘지석이 수백 년 뒤에 나온 사실 또한 우연이 아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증거이다.

그 외에 정 도장(鄭都將)이 “이 말을 발설하지 말라.” 라고 한 말이나 이 안사(李按使)가 “바닷가로 달아났다.“라고 한 판하(判下) 등등 어느 것 하나 명확한 증거가 아님이 없다. 참으로 울산의 종친이야말로 진짜 공의 후손이니, 마땅히 사당에 공을 모셔야 한다. 
아! 공의 절개는 천지와 함께 유구하니, 밝으신 영령이 응당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울산의 산천은 태백산 줄기에서 뻗어 나와 청령포와 가까우며, 더더구나 공의 후손은 정성을 자해 삼가 봉향하니 어떠하겠는가?
마땅히 공을 이 사당에서 흠향해야 하는데, 이것은 *하빈사(河濱祠)에 *평양(平陽)의 자손이 있는 것과 그 법도가 동일하다.

【보주(補註)】. 
●노명호(魯命好)는 바로 엄립(嚴立)의 외손으로 옛 본적에서 외조부의 성을 바꾸어 이립(李立)이라고 하면서도 본적은 그대로 영월(寧越)이라 일컬었다. 이를 통해 맨 처음 은폐한 사정을 알 수 있고, 엄립(嚴立)은 본래 영월 사람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정도장(鄭都將)의 이름은 몽동(夢童)으로 지방을 기찰하는 부류이다. 바야흐로 엄씨가 새로 우거할 때 그 또한 그 근본을 대략 알았기에 인정으로써 몰래 자취를 감추고 목숨을 부지할 것을 권하였다. 그 일은 <기유후본부사인등장(己酉後本府士人等狀)에 실려있다.
●이 안사(李按使)는 바로 고(故) 상공(相公) *이은(李溵)이다.
기축년(1769, 영조 45)에 울산 부사 *조재선(趙載選)이 여러 엄시가 관향을 회복한 내력을 낱낱이 열거하였는데, 그 장제(狀題)에, ”바닷가로 달아났다가 끝내 기댈만한 관향을 얻었으니 일이 몹시 기아하다...“ 라는 내용이 있다.】

【‘*’ 표시 각주 설명】
*원강사(員岡祠) : 1799년에 엄흥도(嚴興道)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금의 울산시 울주군 온산읍 대정리에 세운 사당으로, 1817년에 원강서원(員岡書院)으로 승격되었다. 1947년에 온산읍 산성리로 이건하였고, 1994년에 삼동면 둔기리로 옮겼다.
*동류(同類) : 자기 후손을 뜻하는 말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모셔야 ~것이다.” ≪논어≫<위정 爲政>에 공자(孔子)가 : 모셔야 할 귀신이 아닌데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고, 옮은 일을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강상(綱常) :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이른다.
*영고성쇠(榮枯盛衰) : 인생이나 사물의 번성함과 쇠락함이 서로 바뀜.
*동청나무에~ : 동청나무는 무덤가에 심은 나무를 뜻한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발산(鉢山)자락에 묻은 것을 뜻한다. ≪철경록(輟耕錄)≫ 4권에 원나라 때 당각(唐珏, 1247~?)이 훼손된 송나라 왕릉의 유해를 몰래 수습하여 난정산(蘭亭山)에 장사 지내고 상조전(常朝殿)의 동청나무 한 그루를 옮겨와 심어서 표시하였다고 한다.
*금속산(金粟山) : 당 현종(唐玄宗)이 묻힌 산. 
*'치이자피(鴟夷子皮)'라는 말은, 오나라의 공신이었으나 결국 모함에 의해 죽음을 당한 오자서의 시신이 말가죽으로 만든 술부대에 담겨 물에 던져진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제나라의 상경 벼슬을 얼마간 살다가 높은 자리에 오래 있으면 해롭다고 하여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제나라를 떠났다고도 한다. 범려는 모든 것을 다 이룬 후, 갑자기 모든 관직을 버리고 잠적해 버렸다.구천에게서 벗어나 잠적한 범려의 이후 행적은 미스터리이나 《사기》에 의하면 그가 제나라로 도망쳐 자신의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고치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거부가 된 범려의 재능을 알아본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범려는 모은 재산을 모두 나눠주고서는 또 잠적해 버렸다. <나무위키 범려>
*엄응탄(嚴應垣)【‘원(垣)’ 자로 잘못 쓰여 있다.】 과~ : ≪충의공실기≫ 권1 <묘명(墓銘>에, ”공의 5대손은 엄응탄(嚴應垣), 엄응평(嚴應平), 엄응일(嚴應一)인데. 엄응탄과 엄응일은 떠돌다 죽어 지금 후사가 없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엄제한(嚴悌漢)이 ~ : ≪충의공실기≫ 권1 <묘명(墓銘>에, ”엄승진(嚴承軫)은 성은 같고 파가 다른데, 엄화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 외손 엄제한이 겨우 남아 있어, 오히려 공의 제사를 대신 받들고 있다.“ 라고 하였다.
*노릉(魯陵)을 ~시작되었고, : 1668년(현종 9) 노산군 묘를 노릉(魯陵)으로 승격시킨 후에 송시열의 건의에 따라 엄흥도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박사정(朴師正) : 1683~1739, 자는 시숙(時淑),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171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부교리, 경산현감, 대사간, 이조참의,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엄 아무개의 자손들이~ : ≪승정원일기≫ 영조 15년(1739) 1월 1일 기사에, 봉상시 제조(奉常寺提調) 박사정(朴師正)이 아뢰기를,
“신이 장릉(莊陵)을 봉심하는 일로 영월(寧越)에 다녀온 뒤에 오늘 비로소 입시하여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의 일을 신은 감히 우러러 아뢰지 못하였는데, 의열(義烈)이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에 일찍이 숙묘조(肅廟朝) 때 좌랑에 추증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성조(聖朝)에서 풍교(風敎)를 세우는 도리로 볼 때 자손을 녹용(錄用)해야 합니다. 현묘조(顯廟朝) 때는 송시열(宋時烈)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자손을 거두어 녹용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 자손이 떠나간 곳을 알지 못하여 미처 조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영남(嶺南)에 옮겨 가 살고 있는 후손이 본토(本土)를 오가며 분묘를 정리하였고 또한 유업(儒業)에 능하다고 들었습니다. 후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조정에서 거두어 녹용해야 합니다. 후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를 가려 그에 상당하는 관직에 제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포장하여 아름답게 여기는데, 엄흥도의 의열에 대해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자손이 침체된 것은 매우 흠이 되는 일이니, 진달한 바가 참으로 옳다. 쓸 만한 자를 가려 녹용하도록 해당 조에 신칙하라.”
하였다.  봉상시는 예조(禮曹)에 소속된 관청이다. <승정원일기 원문에는 태상제조(太常提調)로 되어 있는데 봉상시(奉常寺)와 같은 뜻이다.>
*작동(鵲洞)의 묘지석~ :  작동은 언양현(彦陽縣) 금곡(金谷)으로, 현재 운산시 울주군 삼동면 작동마을을 가리킨다. 이곳에 엄흥도의 현손인 엄선(嚴善)의 묘소가 있는데, 그 후손 엄사의(嚴思儀)가 묘역을 정비하다가 묘지석을 발견하였다.
*하빈사(河濱祠) :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순천 박씨 집성촌인 묘골마을[竗洞]에 있는 낙빈서원(洛濱書院)의 사당이다. 처음에는 충정공 작팽년(忠正公 朴彭年)의 위패만 모셨으나, 박팽년의 현손(玄孫) 박계창(朴繼昌)이 사육신이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고 깨달은 바가 있어 다섯분의 신위를 추가로 설치해 함께 제향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1694년(숙종 20)에 ‘낙빈(洛濱)’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고,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에 다시 서원은 복원되었지만 사당은 1974년에 육신사(六臣祠)라는 이름으로 중건하였다.
*평양(平陽) : 순천(順天)의 옛 이름으로, 여기서는 순천박씨인 박팽년을 가리킨다.
*이은(李溵) : 1722~1781,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74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59년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의금부도사, 공조좌랑, 남평현감, 황해도관찰사, 대사헌, 예조판서, 좌의정 들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조재선(趙載選) : 1713~1781,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의금부도사, 종부시 주부, 신계현령(新溪縣令), 평창군수(平昌郡守), 호조좌랑, 울산부사(蔚山府使), 충주목사(忠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764년에서 1769년까지 6년 동안 울산부사를 연임하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