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서울대교구 : 경기 감영 터

작성자실베스텔|작성시간10.06.07|조회수195 목록 댓글 0

서울대교구 : 경기 감영 터
테마 분류 :: 성지
하느님의 종 조용삼 베드로가 옥중에서 세례 받고 신자들을 감동시킨 순교 터

지금의 서대문 적십자 병원 일대는 조선 시대에는 서대문 밖으로서 경기 감영이 있던 곳이다. 태조 2년(1393년)에 설치되었으며 속칭 포정사(布政司)로 부르기도 하였다.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1801, 베드로)은 아직 예비신자였을 때인 1800년 여주에서 체포되어 경기도 감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더 이상의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경기 감영 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경기 감영에서 형벌을 받던 예비신자 조용삼 베드로는 1801년 3월 27일(음 2월 14일)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 지역에서 탄생한 신유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였다.
조용삼 베드로는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여주에 사는 임희영(任喜永, ?~1801)의 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 들었는데, 이때부터 정약종(丁若鍾,1760~1801, 아우구스티노)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조용삼 베드로가 아직 예비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鄭宗浩, 1752~1801)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李中培, ?~1801, 마르티노), 원경도(元景道, 일명 사신, 1774~1801, 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모진 박해로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었으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1800년 5월에는 양근 지역에서도 천주교를 배척하는 무리들이 신자들을 밀고함으로써 윤유오(尹有五, ?~1801, 야고보), 유한숙(兪汗淑, 일명 사겸, ?~1801)등 7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된 양근과 여주의 신자들은 그곳의 옥에 갇혀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10월에는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감사 앞에서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다음해 초에 신유박해가 일어나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크나큰 시련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제주의 첫 순교자 김기량(金耆良, 1816~1867, 펠릭스 베드로)도 이곳에서 문초를 받은 적이 있었다. 뱃사람인 그가 중국에 표류하게 된 상황을 조사받았다. 표류 후 1858년 1월에 귀국한 뒤 그는 의주와 경기 감영, 강진 등에서 표류 전말에 대해 조사를 받았지만 의심할 만한 점이 아무것도 없어서 즉시 석방되었다.

◆ 경기 감영도 12곡병 [보물 1394호,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경기감영도는 서대문 밖 적십자병원 일대에 있었던 경기 감영과 그 주변을 그린 그림으로, 지금의 경기도청에 해당하는 경기 감영을 중심으로 돈의문(서대문)으로 향하는 도로 가운데 하천에 놓여 있는 경교(京橋) 다리, 감영의 서편에 있는 이름 높던 연못인 서지(西池)와 연꽃, 경기 중영(京畿中營)의 훈련 모습, 북쪽으로 영은문, 남쪽으로는 서소문으로 향하는 도로와 그 주변의 민가, 행인의 모습 등을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으로 묘사하여 생생하게 보여준다.

12폭 병풍으로 된 이 그림은 관찰사가 집무하는 경기 감영을 그린 전형적인 관아도(官衙圖)이다. 작자 미상으로 제작 시기는 대략 19세기로 추정되며, 아마도 능숙한 화원(畵員)들의 솜씨로 평가된다. 파노라마 형태로 시점을 이동하면서 옛 서울의 서대문 밖 전체를 조망한 그림으로서 병풍 오른 쪽으로 부터 시작하여 1폭의 대문이 돈의문이며, 4폭의 위쪽 산봉우리는 북악산의 측면이 된다. 6폭 중앙의 큰 건물이 선화당으로 관찰사가 집무하는 곳이다. 6폭에서 9폭까지의 큰 연봉들이 인왕산, 11폭의 산봉우리는 안산이다. 관영 앞에는 관찰사의 행차 장면이 그려져 있어 성시를 이루고 있는데 시가의 인물 표현이나 집채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면 주변의 산의 배경은 중묵(重墨)으로 골세(骨勢)와 위용을 강조하고 있어 화면 전체에 무게와 활기를 더해주고 있다.

◆ 감영(監營)
조선시대 각 도의 관찰사가 기거하는 관청을 감영이라 하여 전국적으로 충청도 충주(1602년 공주로 이전), 경상도 상주(1600년 대구로 이전), 전라도 전주, 황해도 해주, 강원도 원주, 함경도 함흥(1600년 영흥으로 이전), 평안도 평양 등에 있었다. 그중 기영은 경기 감영 또는 경기도 관찰사의 관청을 달리 이르던 말로 서울과 수원에 설치되었다. 서울에 두었던 경기 감영은 지금의 서대문 적십자병원이 있는 자리에 있었다.

◆ 선화당(宣化堂)이란?
조선시대에 각 감영에서 관찰사가 정무(政務)를 처리하던 정청(政廳) 건물을 말한다. 일반 도청 청사의 기능과 법원의 기능을 복합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고을에서는 동헌(東軒)이라고 하였다. 정면 중앙에는 "임금의 덕을 베풂으로써 백성을 교화한다(宣上德而化下民)"는 뜻의 '선화당(宣化堂)'이라고 쓴 편액(扁額)을 달았다.

감영 관내의 모든 행정업무와 송사(訟事)·형옥(刑獄) 업무가 여기에서 처리되었다. 현존하는 것에는 1667년(현종 8) 완공된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목조 주심포(株心包)에 팔작지붕의 선화당, 대구 중앙공원에 있는 겹처마 팔작지붕의 선화당, 충청남도 국립공주박물관 경내에 있는 익공계(翼工系) 맞배 지붕의 선화당, 그리고 함경남도 함흥시에 있는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44호인 익공계 팔작 지붕의 선화당 등이 있다.

■  순교자

◆  조용삼 베드로 ( ?∼1801년) <하느님의 종 124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후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정약종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친을 끌어내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는 경기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 무렵 그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 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64 
지리좌표 [병원 정문] 북위 37°33′99.4″ 동경 126°58′03.3″ 
연락처 중림동 성당(중구 중림동 149-2) (02) 362-1891 FAX (02) 392-1457  
홈페이지 중림동 성당 http://www.yakhyeon.or.kr/  
미사시간 [중림동 성당]
평일 : (월수금) 오전 6:00, (화) 오후 7:00 (목) 오전 10:00 (서소문 성지), 12:10
(토) 오후 4:00, 6:00
주일 : 오전 6:00, 9:30, 11:00, 오후 6:00  
교통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에서 도보 10m에 서울적십자병원이 있다. 이 일대가 경기 감영 터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