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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순례

로마로 가는 길 (46) 수도원과 감옥

작성자fidelis|작성시간21.12.28|조회수222 목록 댓글 1

"클레어보 (Clairvaux)"라는 지명은 "맑고 깨끗한 골짜기(clara vallis)"라는 뜻입니다.  인구 1000명의 작은 마을, 비에 쉬 라 페흑테(Ville-sous-la-Ferté)에 시토회 수도원(Abbaye de Cîteaux)이 자리잡았습니다.  동서로 뚫린 골짜기 동쪽 입구에 옛 수도원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흙과 돌로 쌓은 수도원 담 옆을 걸었습니다.  담은 높지는 않지만 길이가 1km는 넘는 것 같았습니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오고 방문자들을 맞이하는 건물이 나왔습니다.    조용히 기도, 명상, 노동으로 삶을 바친 수도자들의 삶터로 만들려고 세운 곳이었습니다. 수도원이니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한 때 번성하여 중부 유럽에  세속 종교적 영향력이 컸던 곳이었습니다.  정치 체제 변혁의 거센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수도원 이름만 남았습니다.

 

시토회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은 흰 수도복에 검은색 겉옷을 걸쳐 입어서 베네딕트 수도회의 검은색 복장과는 구분됩니다.   베네딕트 수도회보다 더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는 봉쇄수도원입니다.  외부의 경제적 도움없이 농업이나 식품가공 등을 통해 자급자족(Autarky)을 지향하는 수도단체입니다.  11세기 프랑스 동부 시토(Citeaux)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도 이 수도회가 들어와 있습니다.

 

 

 

클레어보 수도원(L'abbaye de Clairvaux )은 12세기 생 베흐노(Saint Bernard) 가 세운 곳입니다.  당시 25세의 생 베흐노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수도원을 세우자 마자 엄청난 명성을 날렸습니다.    유럽 전 지역에서 15만명 정도의 수도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곳을 거쳐간 수도자들 중에는 후에 교황이 된 유진 3세도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대의 수도원이었습니다.  생 베흐노의 거대한 왕국이었습니다.  

 

처음 수도원 터를 잡을 때 고려했던 조건 중의 하나는 자급자족을 통한 폐쇄 여건이었습니다.  수도원이 필요로 하는 수자원은 중요한 요건이었습니다.  이 골짜기의 개천과 지하수로 충분한 양의 물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수도원은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져서 동쪽으로 400m 정도 이전하여 60만평의 부지에 시설들이 들어찼습니다.  포도원, 농장, 소금 광산, 대장간 등이 들어섰습니다.  자급자족을 넘어 상당한 규모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오브 강 물줄기를 돌려야 할 만큼 생산시설이 확대되었습니다.  클레어보는 교통 요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권력과 돈, 탐욕이 판치는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인간사회의 속성입니다.  더 이상 청빈을 추구하며 기도에 전념하는 도량은 아니었습니다. 

 

이 수도원에서는 대대적으로 성경과 관련 서적을 필사하여 만들어 냈습니다.  수도사들의 주요 일과가 양피지에 성경을 정성들여 필사하는 일이었습니다.  막대한 양의 양피지가 필요했습니다.  수도원에서 양을 기르는 목적이 고기나 유제품보다는 양피지용 가죽을 얻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짐승 가죽을 가공하여 종이처럼 얇게 만들어 그 위에 거위 깃털로 글을 썼습니다.  양피지 한 장 가격이 월급쟁이 하루 임금에 해당했습니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는 책 한권 값이 일년 소득에 해당했으니 보통 사람들은 책을 읽기가 무척 힘들었을 시대의 산물입니다.  이 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엄청난 양의 서적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 소장되었던 서적들은 현재 트루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클레어보 수도원 평면도

 

 

양피지와 깃털펜: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קלף,_נוצה_ודיו.jpg

 

 

수도원은 자신들이 마련한 돈을 써서 화려한 건물을 짓게 됩니다.  지금 남아 있는 길이 70m의 평신도 작업 홀은 흰색 대리석 기둥의 숲이었습니다.  천정을 떠 받치고 있는 아치가 겹쳐지고 또 겹쳐진 회랑은 이 외진 시골에서 기대할 수 없는 예술품이었습니다.  한 방에 수백명의 평신도 노동 봉사자들이 머물렀다는 홀은 섬세한 대리석 기둥의 숲이었습니다.  거대한 수도원에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지만 대부분 허물어졌습니다.

 

9시경에 수도원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갈 숙소까지 6km.   하루 걷는 거리가 너무 짧아 너무 일찍 도착했습니다. 이 수도원 방문에 신경 쓰다 보니 거리 계산을 잘못해서 일정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오늘 묵어야 할 숙소에 전화를 걸어 약속시간을 2시로 앞당기고 저녁식사 준비를 부탁했습니다.  매점이나 안내소가 10시 30분에 문을 열기 때문에 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늘에 앉아 일기를 적었습니다.  

 

지금은 풀이 무성한 정원은 그 옛날에는 화사하게 꽃이 피었을 것입니다.  이런 멋진 공간을 가능하게 한 부와 여유는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프랑스 혁명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렸습니다.  프랑스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던 1789년 2월 13일 비 자선 수도단체 재산은 국유화되었습니다.  수도원의 부가 결국 백성들의 땀으로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돈 없어 허덕이는 정부가 몽땅 다 가져갔습니다.  수도자들이 원했던 삶이 허망한 꿈처럼 끝나 버렸습니다.  가난한 백성들 마음에 성전을 세웠으면 그 사랑은 오래 남았을 것을.  자선이 없는 수도원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사랑 말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수도원 성당

 

정부는 몰수한 수도원 자산을 1789년 11월 매각에 부쳤습니다.  1792년 유리 세공업자가 사들여 공장을 차렸다가 망했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 정부가 사들여 감옥으로 만들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최대 규모의 감옥이었습니다.  담장과 건물 구조가 죄수들을 가두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같은 때에 감옥으로 전환된 수도원으로 대서양 노르망디 해변의 아름다운 몽 생 미셸 수도원이 있습니다.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돈을 벌겠다는 위정자 때문에 감옥 상태는 비참했습니다.  죄수들의 노동 환경이 좋았을 턱이 없었습니다.  이곳의 비참한 현실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공장은 망했고 일급 중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습니다. 이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은 누가 들어도 그럴 만하다고 수긍이 가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정치범들, 반란자들, 옛 나치 점령기간 중 비시정부 각료들, 카를로스 자칼 같은 테러리스트, 암흑가의 살인범, … 한때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아름다웠을 수도원이 강력범들을 가두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남아 있는 옛 건물을 관광목적으로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지만 감옥에는 죄수들을 수감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터가 아름다운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먹고 남는 것으로 허욕에 찬 건물을 짓지 않고 일부라도 가난한 이를 도왔다면 경건한 신앙심을 키워줄 성스러운 장소로 남았을 것입니다. 수도원과 감옥은 시간 차를 두고 같은 장소에 공존하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무절제의 탐욕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같은 공간이라도 용도에 따라 다르게 보였습니다.  수도인가 아니면 수감인가?  어떻든 사랑은 함께 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남녀가 만나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사랑으로 기르게 됩니다.  오늘 이곳 수도원 성당에서 결혼식이 있어서 잘 차려 입은 손님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수도원을 나와서 앞 거리에 있는 호텔 까페에서 샌드위치와 맥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길 건너 작달막한 동양사람 체형의 순례자가 지나갔습니다.  쫓아갈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옆 테이블애서 밥 먹던 벨기에 부부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69세의 패트릭(Patrick)과 63세의 안느(Anne).  등반이 취미라는 부부였습니다.  지도제작 회사를 경영하다가 후배에게 물려주고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했습니다.  아마 발로 지도를 그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외 아들이 손주 하나를 두었다며 웃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외진 마을 식당에 앉아 한가롭고 자유로운 모습. 그가 한 말은 그 부부의 삶이었습니다.

“천천히 걸어야 멀리 가지요.”

절대로 쫓기지 않았을 일상.  표정과 몸짓에도 그렇게 넉넉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벨기에의 패트릭-안느 부부

 

 

 

수도원 성당에서 결혼식이 끝나 하객들이 이 식당으로 몰려와 왁자지껄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 보니 한시가 가까웠습니다.  두 시 약속시간을 지키려면 한 시간 안에 6 km 를 가야 했습니다.  뜨거운 여름 한낮에 배낭 지고 헐레벌떡 뛰다시피 걸었습니다.  아스팔트 도로는 햇볕에 달아올라 열기까지 뻗쳤습니다.  길은 평탄했고 가끔 구름이 가려주었습니다.  작은 마을을 지났습니다.  식당이나 가게가 보이지 않는 마을이었습니다.

 

마을 끝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 젊은 집주인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열쇠를 받고 시설 안내를 받았습니다.  아늑한 거실이 있었습니다.  냉장고에는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어서 꺼내 먹으면 되었습니다.  숙박비에 저녁 식사 값으로 15유로를 더 주었습니다.  주인이 떠나고나서 빨래하여 마당에 널고 모처럼 책을 펼쳐 들고 여유로운 오후를 보냈습니다.  남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머물렀던 가족이 떠나자 젊은 커플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다음날 아침 떠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혼자가 된 셈이었습니다.  빨래 걷으러 나가보니 그 사이에 비가 내렸습니다.  집 뒤 밭에는 트랙터가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저녁 식탁을 차렸습니다.  미트 파이 샐러드, 닭고기 요리에 맥주 한 캔, 치즈.

 

 

 

 

 

참고문헌:  클레어보 수도원 역사 애니메이션 비디오, https://www.abbayedeclairvaux.com/presentation-de-clairvaux/histoire-de-clairvaux/

이 비디오는 영어 자막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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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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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박주희 | 작성시간 22.01.15 수도원이 감옥으로의 전환~
    다른 느낌의 고립을 연상되면서 읽게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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