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호스텔 방이 철길 옆이어서 기차가 지날 때마다 우르릉거렸습니다. 여름 방학 기간 여행 성수기에는 로잔에서 생 모히스까지 숙소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레만 호반 관광지여서 수요 공급의 불균형이 시시때때로 있는 곳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미리 예약해야 합니다. 어제 밤 리셉션 담당 나니(Nanie) 아가씨에게 부탁해서 내일 밤 애글르(Aigle) 숙소 예약을 부탁했습니다. 여행자 사무소에서 받은 민박집들 전화를 했는데 모두 방이 없었습니다. 비베 (Vevey) 마을 음악 콘서트 때문에 이 일대 호스텔, 민박집, 캠핑장들이 모두 만원이었습니다. 나니 아가씨가 예약 취소된 침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내일 밤 이곳 몽트회에서 자기로 하고 예약을 했습니다. 오늘 밤은 로잔에서 자고 내일은 몽트회까지 기차로 와서 애글르까지 갔다가 기차타고 이곳에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숙소문제를 해결하고나니 룰루랄라였습니다.
호스텔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커피와 빵. 배낭에서 무거워 보이는 책과 약품, 침낭, 옷가지를 빼어서 라카에 넣고 배낭 무게를 줄였습니다. 몽트회(Montreux)에서 로잔까지 역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거리는 31km. 일부를 제외하고 호수 가를 따라 도시가 연결된듯했습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아 호수 건너편 프랑스 마을 불빛이 반짝였습니다. 어제 피곤해서 건성으로 보았던 호수와 건너편 산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고급 주택들이 공터없이 늘어선 2 km를 걸어 몽트회 시장 건물 (Marché couvert de Montreux)이 있는 광장에 왔습니다. 수십 개의 쇠기둥으로 버티는 넓은 시장 건물이었습니다. 시장 상인들이 하루 장사를 하려고 채소며 과일을 진열하고 있었습니다. 이 철제 건물은 네슬레 창업주 앙리 네슬레가 죽기 전 8만 프랑을 기부하여 1891년에 지은 것입니다. 당시에 유행했던 파리 에펠 탑 설계 시공 공법에 따라 철제로 지었습니다.
몽트회(Montreux) 인구 26,570명. 후기청동기 시대의 주거흔적이 있는 곳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상플롱 고개(Col du Simplon)를 넘어온 로마가도가 이곳에서 아벙슈(Avenches -당시 스위스 수도) 방향과 브장송(갈리아 지방)쪽으로 갈라졌습니다. 로마시대 이후 주요한 주거지역으로 이어지다가 12세기에 포도재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귀족들 손에서 손으로 이전되었습니다. 15세기 프랑스왕국과 브르고뉘왕국 사이의 전쟁과정에서 베른 세력이 이곳을 점령해서 시옹(Chillon) 성이 관할했습니다. 종교전쟁 시기에 이탈리아의 위그노교도들이 피난 와 정착하면서 공예기술이 퍼졌습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 지역을 베른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서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19세기부터는 관광업이 활성화되면서 전 세계 부자들이 돈을 쓰며 다녀갔고 덕분에 현대도시로 탈바꿈했습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불쑥 튀어나오는 동상. 호수 가에 서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은 살아 있을 때 공연 모습이었습니다. 이곳은 프레디 머큐리가 과일이나 채소가게에 장을 보러 오던 곳이라고 합니다. 1995년 발매된 그의 앨범 “Made in Heaven” 재켓에 사용된 사진이 이곳입니다. 그는 1960년대부터 작곡 등 음악 활동을 했고 70년대에 그룹 퀸을 결성했습니다. 80년대 중반부터 폭발적인 무대 공연으로 전세계를 열광시켰다가 1991년 죽었습니다. 그의 나이 45세 때였습니다. 락 발라드는 고전음악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퀸의 “Love of My Life”는 신세한탄이었습니다. [Queen, Love of My Life, in A Night at the Opera, 1975]
Love of my life, you've hurt me
You've broken my heart and now you leave me
Love of my life, can't you see?
Bring it back, bring it back
Don't take it away from me, because you don't know
What it means to me …
살아서 잊지 못할 그대, 제게 아픔을 남겼네요
가슴을 들 쑤셔 아프게 놔두고 떠나버렸네요
살아 생전 잊지 못할 그대, 알고 계셨나요?
사랑하는 마음을 돌려 주세요, 돌려주세요.
그 사랑을 빼앗지 말아요, 잘 모르시면서
제게 어떤 의미인지도요 …[1]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살았다는 Duck House 옆을 지나갔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동 아프리카 잔지바르 섬에서 태어난 페르시아 계통의 영국인이었습니다. 그룹 퀸의 리딩 보컬로서 4 옥타브를 감당해내는 발성능력과 폭발적인 무대 매너로 세계적인 가수가 되었습니다. 1991년까지 이곳 녹음실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1978년 몽트회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러 이곳에 왔다가 녹음실을 사들이고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시가 특별허가를 해서 이 집을 사들여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을 때까지 이곳에 정착하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프레드 머큐리 동상
클라헝스 (Clarens) 마을을 지나갔습니다. 인구 8600명. 두 작곡가들이 이곳에서 작곡했습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그의 대표 발레 곡 “봄의 제전 (Весна священная)”과 “풀치넬라(Пульчинелла)”를 이곳에서 작곡했습니다. 특히 “봄의 제전 – 베쓰나 스뱌쉔나야”은 현대 음악으로 가는 길목이라 할 만큼 선구적인 곡이었습니다.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바이올린 협주곡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을 이곳에서 작곡했습니다.
장자끄 루소는 이곳에 자주 왔기 때문에 지리에 정통했다고 합니다. 루소는 소설 “신 엘로이즈(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가 1761년 출판된 후, 그 인기가 유럽을 휩쓸면서 그 이야기의 배경으로 유명해졌던 마을입니다. 이 동네에 오는 관광객들 중에는 주인공 줄리에(Julie)와 생 푸흐(St-Preux)가 만난 장소를 찾기도 합니다.[2]
이 서간체로 쓴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정숙하고 매력적인 쥘리와 감성적이며 성급한 가정교사 생 프뢰는 사랑에 빠지지만 쥘리 아버지의 결혼 반대로 생 프뢰는 떠납니다. 쥘리는 아버지의 친구 볼마르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습니다. 생 프뢰가 돌아와 쥘리와 사이에 정신적 사랑이 시작되어 그 사랑을 지키다가 결국 죽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중세시대 서간집 "두 연인 간의 편지"를 개작한 것입니다. 원작 서간집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중세시대 39세 평민출신 철학자 아벨라르가 17세 귀족집안 소녀 엘로이즈의 가정교사가 되어 비밀 연애를 했는데 신분 차이로 결혼하지 못하고 갈라져 수도사와 수녀가 되었습니다. 만나지 못하는 두 연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로 전개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결말은 두 사람이 죽어서 합쳐진다는 내용입니다.
루소는 머리 속 이성보다는 마음 속 감정에 솔직하게 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젊은 날 겪었던 고뇌와 회한일 수 있도 있겠습니다. 만남에는 속박이 없었겠지만 헤어짐에 사회적 갈등이 있었다면 포기한 당사자들은 현실이라는 삶의 무게에 짓눌렸다고 할 것입니다. 과거 일은 과거일이라고 잊는 것이 좋을 지 모르겠습니다.
호수가에는 산책길이 없었습니다. 9번 도로를 따라 걸어야 했습니다. 가다보면 도로와 호수 사이 좁은 공간에 텐트들이 빼곡했습니다. 말라데허 캠핑장(Camping de la Maladaire)이었습니다. 숙소 문제를 경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설이었습니다. 나무가 우거져 여름에 햇볕을 가려주고 호수가 가까워 물에 발을 담글 수 있겠습니다.
히바쥐(Rivage) 마을 선착장에서 호수를 다시 만났습니다. 요트 계류장 안에 있는 작은 보트에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얼마 안 있어 소방차가 도착했습니다. 이른 아침 화재로 배 안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 나와 불 구경했습니다. 순식간에 보트는 전소되었습니다. 다친 사람이 없어야 할텐데하며 계속 걸었습니다. 플라타나스가 우거진 직선 호반 길에 산책나온 사람들이 오고 갔습니다. 호수는 잠잠했습니다.
비베(Vevey)마을을 지나갔습니다. 인구 19,800명. 마을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갈리아 말로 비버라고 했다가, Veveyse 라는 강 이름과 관련 있다고 했다가, 라틴어로 교차로라고도 했다가. 호수가를 따라 공터나 잔디밭에 가설 건물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축제를 찾아와 차린 임시 천막 술집 아니면 식당들이었습니다. 청소가 되지 않아 지저분했습니다. 술 취한 젊은이들이 아직도 호수가에 모여 있었습니다. 아마 이곳에서 밤을 새웠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도시 분위기를 망가뜨린 난장판이었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동상이 있는 랄리몽따리움 (l’Alimentarium) 광장 앞 호수에는 커다란 은색 포크가 꽂혀 있었습니다.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든 은색 라 푸셰트(La Fourchette)라는 기념물입니다. 8m 높이에 1.3m의 폭입니다. 1995년 임시로 세워진 이 포크는 당국의 설치허가를 받지 못해 철거되었다가 많은 우여곡절 끝에 2007년 영구설치 허가를 받고 비베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습니다. 2014년 세계에서 가장 큰 포크로 기네스 북에 기재되었습니다. 뉴욕의 자유 여신상이나 코펜하겐의 인어와 같은 지위를 받은 것입니다.
비베 호반
조형물 포크
채플린과 포크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배척을 받아서 이곳을 찾아와 살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 광기의 피해자였습니다. 아무나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매장시켰던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 채플린이 배우 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서 아쉽다고도 했지만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번잡한 일상을 내려놓고 살았다니 그것도 복일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을 또래들의 기억 속에 영원한 광대로 남았습니다. 그의 동상이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모습으로 호수가 공원에 서 있었습니다.
비베(Vevey) 마을 끝 자락에 거대한 7층 유리 건물이 보였습니다. 지상 층은 뻥 뚫린 필로티 구조의 건물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식품회사 네슬레의 본사였습니다. 어제 지나온 오흐브(Orbe)의 커피공장도 이곳이 본사였습니다. 1867년 이 회사에서 밀크 초콜릿이 발명되었습니다. 비베의 제과업자였던 다니엘 피터(Daniel Peter)는 초콜릿과 우유를 혼합할 때 수분제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웃집에 사는 앙리 네슬레(Henri Nestle)가 아기분유를 만들어 팔고 있어서 분유제조 공정의 탈수 방법을 알려주어 밀크 초콜릿이 탄생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동업을 해서 세계적인 식품회사 네슬레가 출범했고 전세계 초콜릿 시장을 석권했습니다.
[1] Queen, Love of My Life, in A Night at the Opera, 1975
[2] [1] J.J.Rousseau, La nouvelle Héloïse, Flammarion, 1999, 김중현 역, 신 엘로이즈, 책세상, 2012.
[2] Héloïse et Abélard, Lettres des deux amants, attribuées à Héloïse et Abélard, traduites et présentées par Sylvain Piron, texte français suivi du texte latin établi par Ewald Könsgen, éditions Gallimard, 2005 한국어 번역판,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정봉구 역, 을유문화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