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왔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걷기만 하면 됩니다.
지구가 반 바퀴 돌고 난 새벽 여섯시 반, 피아첸자를 빠져나오는 아스팔트 도로는 길고 지루했습니다. 구시가를 피해 신시가지 거리를 걸었습니다. 비알레 단테 알기에리 거리(Viale Dante Alighieri)에는 고층 건물이 없었습니다. 2층이나 3층의 상가들이 동이 터오는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출근하는 사람들, 학교 가는 아이들이 책가방을 지고 바삐 걸었습니다. 제 키만한 악기 케이스를 등에 진 아이도 그 대열에 끼었습니다. 붉은 동녁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코르푸수 도미니 성당 (Parrocchia del Corpus Domini)앞에서 출발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지만 20세기초에 지었습니다. 피아첸자 도시 확장에 따라 지은 비교적 신축 건물입니다.
코르푸수 도미니 성당 (Parrocchia del Corpus Domini)
피오렌주올라까지 31km, 언덕이 전혀 없는 평야지대를 걷습니다. 변두리 지역의 여유로운 건물들 사이에는 정돈된 나무 울타리, 정원이 보였습니다. 날은 이미 밝았습니다. 도시지역을 벗어나자 인도는 따로 없었습니다. 화물차 통행량이 많은 도로였습니다. 중국인 가게가 있었습니다. 찻길 옆을 조심해서 걸었습니다. 외곽 순환도로(Tangenziale)를 지나자 몬탈레(Montale) 마을이었습니다. 한적한 거리 안쪽으로는 대도시 변두리 공장지대였습니다.
몬탈레 산 피에트로 성당에 딸린 순례자 숙소가 있었습니다. 침대 7개, 부엌이 있는 곳입니다. 10유로. 근처에 식당과 바가 있었습니다. 피아첸자에서 머물지 않고 이곳까지 오는 순례자들이 묵어 가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피오렌주올라까지 26km여서 칠십대 순례자에게 하루 걷는 거리로 적절할 것입니다. 코로나 환난으로 폐쇄된 상태였습니다. 환난이 끝난 훗날 이곳을 지날 때 머물려면 미리 연락해봐야 하겠습니다. 산 피에트로 성당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까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하고 출발했습니다. 도시 지역을 지나자 널디 넓은 들판이 앞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말라서 물 흐름이 시시해진 누레(Nure) 강의 다리를 지났습니다. 짙은 숲이 물길 따라 이어졌습니다. 길은 SS9번 도로에서 벗어났습니다. 시골길이었습니다. 자동차 소리가 멀어지자 까미노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콩과 채소를 심은 밭, 벼는 한창 자라고 있었고, 밀은 베어 맨땅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들이 지평선이었습니다. 조깅하는 마을 사람들이 몇 지나가고는 조용했습니다. 길가에 홀로 서 있는 키 작은 나무에는 새들이 쉼 없이 조잘거렸습니다.
까미노 걷기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습니다. 좁은 농로는 포장되었다가 흙길로 바뀌었다가 다시 포장도로가 되었습니다. 폰테누레(Pontenure) 마을을 지나갔습니다. 인구 6,500명. 깊은 역사보다는 담담하고 조용한 시골 도시였습니다. 성당 앞 광장에는 장례미사에 온 장의차가 서 있었습니다. 90세된 분의 장례미사였습니다. 장의차 운전수와 고인의 가족 몇이 서성거렸습니다. 흰 옷입은 사제가 마중 나오고 성당 문이 열리면서 관이 운구되어 성당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성당 앞 게시판에는 이미 지난 장례미사 안내가 줄줄이 붙어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세상을 뜬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성당 앞에서 돌아가신분을 위해 기도를 바치고 떠났습니다.
길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아페닌 산 그림자를 향해 4 km 넘게 걸었습니다. 논 농사 들판을 빙 둘러 가는 비아 프란치제나 순례길에 인적이 없었습니다. 교통량이 많은 자동차 길을 따라 동으로 곧장 가면 피오렌주올라까지 7-8km는 단축될 것입니다. 인도가 없고 좁아서 위험한 길입니다. 들판으로 나서니 포강에서 멀리 떨어지니 아침 안개도 없고 건조한 공기가 상큼했습니다. 먼 산 그림자는 남쪽 끝 지평선에 병풍으로 있었습니다. 그늘 없이 탁 터진 들판 군데군데에 나무들이 서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 호남평야라면 그 나무 그늘에 앉아 새참 먹는 농부들이 막걸리 잔이라도 들고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들판은 인적 없이 비어 있었습니다. 자갈밭은 수확이 끝나고 붉은 흙더미에 나그네의 그림자가 지나갔습니다. 가을이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푸른 산 그림자는 아페닌 산맥입니다. 포강 골짜기의 논 지역이 끝나고 밭이 시작되는 엉거주춤한 곳입니다. 포장도로여서 발바닥이 피곤했습니다.
흙 더미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와 장례식 운구의 쓸쓸함으로 마음이 스산했습니다. 이 걷는 여정의 목적지는 죽음입니다. 모두가 결국 죽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 한걸음 한걸음이 기적처럼 소중했습니다. 이곳이 오늘 목적지였습니다. 조금 전 빠져나온 도시는 이곳에서 별 의미가 없습니다. 걷는 곳으로 왔으니 이제 걸으면 되었습니다. 밟히는 단단한 땅,
단순하고 반복되는 팔과 발의 움직임에 리듬이 있으면 더욱 즐겁습니다. 육체와 장신이 화음을 이루면 아름답습니다.
긴 그림자를 끌고
그냥 걷습니다.
한 걸음에 온갖 잡생각 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한 걸음에 온갖 걱정 다 오라고 하세요.
한 걸음에 탐욕과 허세도 들어오라고 하세요.
한 걸음에 원망과 님의 탓 내탓 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가져다 길에 뿌리고 걸으세요.
한걸음 한 걸음 화음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뿌려서 뱃살까지 길에 깔아놓고 가세요.
마음을 비워놓고 그냥 걸으세요.
길가에 핀 민들레가 철 지났으면 어때요?
비 온 뒤 지나가는 구름이 어때서요?
다가오는 죽음에는 의미가 없겠죠.
그리운 이를 위해서
고통받는 낯모르는 이를 위해서
과거와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같이 걷고 있는 그분을 위해서
그냥 걷습니다...
긴 그림자를 끌고
조용한 마을 발코나소(Valconasso)를 지나갔습니다. 가게와 바가 있는 인구 370명의 농촌마을입니다. 해발 72m. 잘 가꾸어진 생 울타리, 새로 지은 것처럼 보이는 집들이 길가에 있었습니다. 성모 몽소 승천 성당(Chiesa di Santa Maria Assunta)에 들어갔습니다. 아름다운 종탑과 어울리는 15세기 초에 지은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이었습니다. 고딕 양식의 건물 파사드에 장미창이 있었습니다. 내부는 단일 회중석에 다섯개의 창으로 채광했습니다. 15세기 프레스코화가 벽을 장식했습니다. 화가는 누군지 모릅니다. 부드럽고 작은 시골성당에서 잠시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당 마당에 앉아 쉬는데 개가 쫓아와 짖어대자 개를 따라온 이웃집 청년이 쥬스와 초콜릿을 가져왔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그 가정의 행복을 빌었습니다.
이 마을 남쪽에 조업 중인 큰 치즈 공장을 지나갔습니다. 100년 역사를 가진 발콜라테(Valcolatte)사였습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에 나갔다가 귀환한 엔조 파니찌(Enzo Panizzi)가 창업해서 대를 이어오는 기업이었습니다. 이 지방 여러 곳에 사업장을 가진 기업이었습니다. 창업자 자손들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브랜드를 가지고 시장에 접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마을 경제에 큰 도움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남쪽으로 몇 km 더 걸어서 파데르나 성(Castello di Paderna) 앞을 지나갔습니다. 숲과 성벽 안에 농가 형 정원과 부속 성당을 가진 곳입니다. 천년 넘는 역사를 가진 성이면서 옛 성주의 후손들이 예식장 영업을 하는 곳입니다. 입장료를 받는 곳입니다. 길가의 사도 성 바오로 성당(Cattedra S. Pietro Apostolo) 건물은 가림막을 치고 보수중이었습니다. 들판을 더 걸으면 커다란 카시나 건물을 지납니다.
몬타나로(Montanaro) 마을 길가에 아름다운 성 미카엘 대천사성당 (Chiesa San Michele Arcangelo)이 있었습니다. 주변 잔디밭과 어울려서 여유 있어보였습니다. 성당 주변에 집이 몇채 있었는데 성당은 외따로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전나무 상록수가 친구처럼 서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로 사각 종탑에 붙은 남쪽 시계는 망가진 채로 있었습니다. 종탑이 멀리까지 보이는 것은 주변이 논밭이기 때문입니다. 벼 대신 옥수수를 심는 것은 노동력 확보와 토질 때문에 어려움이 있어서 아닌가 했습니다. 주변에 중국인 농부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은 경당을 지나 남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주인 없는 산 토끼들이 길에 나왔다가 놀라 달아나기 바빴습니다.
해가 중천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걷기만 하면 됩니다.
몬타나로 (Montanaro) 성 미카엘 대천사성당 (Chiesa San Michele Arcange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