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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동행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6|조회수14 목록 댓글 0

동행

횡단보도 앞에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 있다. 자동차들은 분주하게 오가고, 상가 간판들은 저마다의 색으로 도시의 하루를 밝힌다. 누구나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서두르는 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춘다.

한 노인이 손수레를 밀고 있다.

손수레 위에는 높다랗게 쌓인 종이상자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마치 작은 산 하나를 옮기는 듯하다. 허리는 깊이 굽었고 걸음은 느리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신호등이 초록빛으로 바뀌자 노인은 묵묵히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다.

삶도 저런 것이 아닐까.

사람마다 밀고 가야 할 짐 하나쯤은 있다. 누군가는 가족의 생계를, 누군가는 병든 몸을, 누군가는 마음속 상처를 밀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저마다의 손수레를 끌고 인생이라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것이다. 노인의 뒷모습은 작다. 그러나 등에 얹힌 세월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가 살아온 날들의 무게가 손수레 위 종이상자보다 더 높이 쌓여 있는 듯하다.

젊은 날의 꿈과 사랑, 눈물과 희망, 가족을 위한 헌신과 포기가 그 안에 함께 실려 있을 것이다. 바람이 스친다. 종이상자 가장자리가 살짝 흔들린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생각을 한다. 저 짐을 조금만 나누어 들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은 혼자 걷는 길이라지만 사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의 손길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 잠시 함께 걸어 주는 발걸음 하나가 삶의 무게를 놀랍도록 가볍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뜻밖의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양산을 든 또 다른 노인이 옆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은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 같은 속도로 걸음을 맞춘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친구 같다. 혹은 부부일 수도 있고, 평생을 같은 동네에서 살아온 이웃일 수도 있다.

관계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생의 마지막 언덕길에 이르러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가장 큰 축복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에는 앞서가는 것이 중요했다. 남보다 빨리 도착하고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은 것을 이루는 것이 삶의 목표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깨닫게 된다. 삶은 경쟁이 아니라 동행이라는 것을. 누가 먼저 가느냐보다 누가 곁에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세월은 많은 것을 가져간다. 젊음도 가져가고 건강도 가져가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마저 데려간다. 그러나 세월이 끝내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사람의 온기다. 곁에 서서 기다려 주는 마음이다. 함께 길을 건너 주는 배려다. 그 작은 온기 하나가 긴 인생을 버티게 한다.

노인은 여전히 손수레를 밀고 있다. 바퀴는 삐걱거리고 짐은 무겁고 햇살은 뜨겁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가 곁에서 같은 걸음으로 걷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래전 부모님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시장길을 함께 걷던 모습, 무거운 장바구니를 번갈아 들던 모습, 말없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모습.

사랑은 거창한 말이 아니다.

동행이다.

상대의 짐을 모두 대신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진 채 걸어가는 곁을 함께 지켜 주는 일이다. 넘어질 듯 비틀거릴 때 손을 내밀어 주고, 지칠 때 잠시 쉬어 갈 그늘이 되어 주며, 긴 침묵마저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 주는 것이다.

횡단보도의 흰 줄이 하나둘 뒤로 멀어진다. 노인들의 뒷모습도 점점 작아진다. 그러나 그 작은 풍경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건너는 일인지도 모른다. 비록 각자의 짐은 스스로 밀어야 하지만 곁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 있다면 삶은 조금 덜 외롭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 계절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성공이 아니라 함께 걸어 줄 사람이다. 서로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 말없이 곁을 지켜 주는 사람. 힘겨운 횡단보도 앞에서 “같이 갑시다” 하고 손 내밀어 주는 사람.

문득 신호등의 초록불이 깜빡인다. 도시의 소음은 여전하지만 내 마음에는 잔잔한 울림 하나가 남는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살아가고, 사람 때문에 견디며, 사람 덕분에 웃는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먼 길 끝에서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은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함께 걸었던 발자국들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무거운 손수레를 밀며 하루를 건너고 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그 곁을 조용히 걸어간다. 그 평범한 풍경 속에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따뜻한 진실이 숨어 있다.

동행은 길을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함께 견디어 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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