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23초. 검정치마의 첫 싱글 <좋아해줘>에서 (16비트 패밀리 게임기 효과음 비슷한) 드럼 머신 인트로로부터 (통상적인 용법에서의) 훅(hook)이라 할 만한 멜로디까지 도달하는 시간. 평범한 팝 싱글이라면 이때쯤 슬슬 보컬이 노래를 시작하려 할쯤인데, 검정치마는 일찌감치 쇼부보고 있지요. 게다가 이 훅이라는 것, 사실 조금 애매합니다. 고조되는 뉘앙스야 물론 있지만, 그 훅이라는 자(者)는 저잣거리의 숱한 팝 싱글들 마냥 "모든 승부는 여기서 가리겠어!"라고 떠들고 다니지 않거든요. 그는 분명 '한 방'보다는 '난타전'을 사랑하는 파이터. 오락기가 연상되는 인트로가 끝난 바로 뒤부터 그는 일찌감치 당신의 고막을 신나게 두드리고 있었을 것- 무엇으로? 대책 없이 스위트한 팝-튠으로! 그 원초적인 달콤함에 당신은 진작 저 세상으로 가버렸을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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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샛길로 새지요. 언니네 이발관의 [비둘기는 하늘의 쥐] 기억 못하시는 분, 손! 어느 앨범이나 그렇듯 이 음반도 들어보셨거나 들어보지 못하셨거나 둘 중 하나일터인데 (정말 만약에) 아직도 이걸 못 들어보셨다면 당장 레코드점으로 가서 얼른 한 장 계산해 오시길. 한 장 소장할만한 디스크니까요(혹여 품절되었다면 그냥 눈물 슥- 닦는 겁니다. 방법이 있나요). 물론 가치야 모든 이에게 다르겠지만, 최소한 제게 [비둘기는 하늘의 쥐]는 아주 소중한 디스크로 남아있답니다. 한국 인디 씬의 태동이니 뭐니 하는 사적(史的)인 가치야 차치하더라도 언니네 이발관의 데뷔작은 충분히 아껴줄만한데, 이는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그리고 한국 인디 씬에 있어서도) '다시없을' 멜로디를 담은 디스크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의 '다시없을'이라는 수사는 '대체-불가능'의 의미: 그러니 이를 두고 "단편선이 [비둘기는 하늘의 쥐]가 언니네 이발관의 최고작이라는 뻘소리를 해쌓더라"는 식의 악성 루머를 퍼뜨리실 필요는 없겠고요. 언니네 이발관은 본 작 이후로 [후일담]이나 [꿈의 팝송], 그리고 최근의 [가장 보통의 존재]까지 훌륭한 음반들을 발표해왔지만 이들 작품들은 모두 그들이 음악의 '룰'이라 할 만한 것을 어느 정도 깨친 이후의 작품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데뷔작, [비둘기는 하늘의 쥐]는 '엄격한 팝송'의 기준에서 평가하자면 완전히 오류투성이의, 실패 그 자체인 디스크. 그 유명한 초반의 3연타: <푸훗>, <동경>, <보여줄 순 없겠지>까지- 정상적인, 그리고 건실한 팝의 규격을 지켜주는 트랙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말하자면 비문(非文)들. 언니네 이발관의 이석원이 고백했듯 기타를 처음 잡고서 '되는대로' 만든, 칠삭둥이 같은 디스크랍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언니네 이발관의 데뷔작을 폄하하는 것이 몹시나 부당함은 하늘과 땅이 아는 일- 예나 지금이나 언니네 이발관의 최대 무기라 할만한 (특유의) 청승맞은 멜로디는 그들이 음악의 음(音)자도 몰랐던 그 시절, 그 디스크에서도 명징하게 빛나고 있었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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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스톱. 여분의 얘기들이야 언니네 이발관과 관련된 다른 글에서 하면 될 터이고, 검정치마의 [201]을 위하여 필요한 얘기들은 거반 다 등장했습니다. '비문'과 '(명징한) 멜로디' 사이에서의 역학 관계. 여기서 조그마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가령 "언니네 이발관의 [비둘기는 하늘의 쥐]에서 이석원의 청승맞은 멜로디는 그 구조의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것이었다"는 문장이 있다면, 중간의 '에도 불구하고'를 '으로 인하여 오히려 더욱'으로 고치는 식으로요: "언니네 이발관의 [비둘기는 하늘의 쥐]에서 이석원의 청승맞은 멜로디는 그 구조의 허약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더욱 빛나는 것이었다." [비둘기는 하늘의 쥐] 특유의 비-문법성은 (음악적인 완성도에 해가 되는) 일종의 '걸림돌'이 아닐 수 있으며, 오히려 긍정될 만한 고유의 덕목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짤막하게나마 제가 쓴 여러 편의 글에서 '팝송'의 규격, 성질 등에 대한 언급을 해왔지요(이전의 리뷰, 시와 [시와], 언니네 이발관 [가장 보통의 존재] 등을 참조해주시길). 그것은 규칙이며, 문법입니다. 하지만 (언니네 이발관의 데뷔작 같은) 비문들은 안정된 그것들의 룰에 '구멍'을 내고, '흔들기'를 시도하지요. 예를 들어 <동경>의 유명한 기타 프레이즈는 그것이 훅=중심(center)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그러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전통적인 목적론적 서사를 '결론'짓지 못하고 있어요. 드라마는, 실패하지요. 그렇기에 [비둘기는 하늘의 쥐]는 (이는 제 주관이 너무 깊숙이 개입된 독해이겠지만) 어떠한 순차적인, 인과율에 따른 감정의 지속적인 고양을 불러일으키는 텍스트는 아닙니다. 그것은 종종 툭, 툭, 끊겨버리거든요. 대신 그것의 매력은, 그들 멜로디에서 순간순간 발현되는 어떤 '반짝임'에 있습니다. 중심이 없거나 미약하기에 개별적인 시퀀스들은 하나의 중심에 의하여 대표(re-present)되지 못하며, 때문에 개별 시퀀스 고유의 생명력은 날 것에 가깝게, (모종의 목적론적 서사에) 희석되지 않은 형태로서 리스너들의 피하(皮下)에 직접적으로/즉각적으로 투여되지요. 그것은 구조적 완성도에 관련한 이성적 판단을 '배제'하면서 당신의 감각기(感覺器)에게 그 즉시 동의할 것을 요청하는데, 그것이 가진 소박한(그러나 지극히 멜랑꼴리한) 감정들과 당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리듬과의 싱크가 맞물린다면 당신은 비로소 [비둘기는 하늘의 쥐]와 사랑에 빠지게 되겠지요(직거래 속에 싹트는 사랑!). 아마 수줍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 디스크와 이러한 경위로 야반도주를 계획했던 사람도 몇 있을 터인데, 이는 녀석이 좀 어설프긴 했어도 꽤나 미끈한 청춘이었기에 가능하겠습니다(어설픈 비-논리는 곧 패망의 지름길. 이 명제는 희준 옵하의 초기작들에 의하여 완벽히 논증된 바 있어요. 물론 그 자체로는 조금 비극적인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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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길인 주제에 너무 많은 것을 두서없이 늘어놓은 것 아닌지. 하지만 언니네 이발관의 [비둘기는 하늘의 쥐]에 대한 이 짧지 않은 논의는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나 발매된 검정치마의 최신작 [201]과 직렬로 연결되는, 제법 유용한 논점들을 제공하고 있답니다.
디디디디두두두두도도도도띵- 첫 싱글 <좋아해줘>의 심플한 드럼 머신 인트로로 다시 되돌아옵니다. 일단 불만 붙었다 하면 "기다려!"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말끔히 지워버린 듯 방만하게 난사되는 팝 멜로디들. 만약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면 이러한 멜로디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음미해볼 여유마저 주지 않고서 바로 다음, 다음, 다음, 다음, 다음으로 스쳐지날 것. 영문도 모르는 채 흠씬 두들겨 맞다 겨우 정신을 차릴 때쯤 되면 어느새 쫑(終)나버리는 트랙- 머릿속에는 하늘거리는 몇몇 단편들만 남았을 따름이지만 정신없던 그 와중이 묘하게도 무척 달달한 순간이었던 것만은 거의 확실하거든요. 자초지종 따져볼 겨를도 없는데 드라마가 성립될만한 유효 시간 따위는 애당초 고려조차 되지 않지요. (음악의 음자도 몰랐기에 다소 '본의 아니었던' 언니네 이발관의 경우와는 다르게) [201]에서 이는 의도적 연출이었음이 거의 명백해 보이는데, <좋아해줘>의 노랫말은 모종의 선언에 가까울 지경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네 엄마 아니 아빠보다 더", "서울 아니면 뉴욕에서도", "어제 막 찾아온 사춘기처럼" 좋아해달라니. 게다가 "뜨거운 멜론에게 믿음을 줘"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까지 하면서 "그래도 내가 좋아지지 않는다면 그건 너의 잘못일거야"라고 내뱉어 버리는 그 뻔뻔함! 논리적 사고라고는 결여된 듯,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후안무치의 경지에게, 그러나 영락없이 녹아버리는 저라면 그것은 제 잘못인걸까요? 유치한 짓거리, 라면서 아예 귀를 닫아버리지만 않으신다면 되레 당신도 금세 설득 당해버릴지도. '비문'과 '멜로디'의 야릇한 동거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 뛰어 지금-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가동을 시작하고 있습죠.
이러한 매력이 싱글이자 오프닝 트랙인 <좋아해줘>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에요. [201]에서 종종 '규격'이란 농락의 대상, 혹은 무시의 대상이 되는 듯한데 큰 기조를 유지한 채로 세세한 전술에서는 보다 자유로운 외형을 취합니다. <Stand Still>의 로파이한 구식 로큰롤과 댄서블한 파워 팝 스타일이 '부자연스레' 접붙여진 모양새는 이어지는 <강아지>에 비하면 무척이나 양반 축에 속하겠습니다. ("우리가 알던 여자애드는 돈만 쥐어주면 태워주는 차가 됐고"란 노랫말 또한 인상적인) <강아지>는 기타가 다소 강조된 컬리지 록처럼 시작되어 잘 가는 척 하다 여지없이 두 번째 절(verse)부터 뜬금없는 스카 리듬을 빌려 이어지는 후렴구(chorus)마저 익살맞은 뉘앙스로 변주해버리지요. 이후의 트랙들에서도 파격은 계속되는데,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영 구분 어려운 신스팝 트랙 <Antifreeze>와 구식 로큰롤과 파워 팝의 접합, <Avant Garde Kim>도 두드러집니다.
당혹스럽지만 아름다운 디스크, [201]에서 검정치마는 팝을 부정하기라도 하는 것일까요? 글쎄, 그가 애니멀 컬렉티브(Animal Collective)도 아니고. 그가 만들어내는 (어쨌거나) 달달한 사운드를 맛보고 있노라면 그는 실상 팝의 저격수가 아닌, 오히려 팝의 추종자에 가깝다는 확신이 듭니다. 사실 그가 멜로디 속에 녹여낸 향(香)이란 거반 다 여러 장르의 팝 사운드를 한 데 넣고 팔팔 끓여 우려낸 것들, 다만 (그것을 배치함에 있어서) 교묘하게 팝적인 룰의 뒤통수를 때리는 격이지요. 팝과 지극히 닮았으면서도 은근히 뒤로는 팝을 바싹 약 올리는 형국. 그것은 급진적이지 않으며, 그보다는 기회를 엿봐 허술한 틈새를 가격하는 아웃복서의 전법을 따르지요. 그렇게, 팝으로 팝에 구멍-내기. 이는 검정치마의 큰 기조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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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01] 곳곳에서 감지되는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적 정서 역시 검정치마를 주목하게 만드는 주요인 중 하나지요(이는 언니네 이발관의 데뷔작과 검정치마의 그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텍스트로 갈리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세계주의, 이는 검정치마에게 있어 단순한 이념으로서가 아닌 실질적으로 작업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많은 부분을 좌우하는 하나의 '믿음'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검정치마의 세계주의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필요한데, 그의 관심은 보편성 보다는 차이: 만국의 공통-언어를 찾아내려는 시도보다는 개별 로컬(local)의 특수성과 차이를 (그 자체로) 긍정하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다채로운 기호들을 낙관적으로 유희하는 것에 있어 보입니다(국내의 경우, 전자와 관련된 가장 최근의 시도는 아톰북에게서, 후자와 관련된 가장 최근은 아이 앤 아이 장단의 그것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인 정서는 트랙에 따라 두 종의 언어를 교차-배치하는 방식(<강아지>, <Tangled>, <Dientes>)으로 비교적 직접적인 방식을 통하여 제시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트랙에서도 다양한 음악적 기호의 조합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개진되고 있기도 합니다. 영미권 인디 팝과 개러지-록 사이를 오가는 <좋아해줘>부터 복고적인 신디사이저와 디스코 리듬이 춤을 추는 <Antifreeze>, 웨스턴 스타일의 슬라이드 기타가 황량하게 울리는 <Tangled>, 프렌치 팝의 한 부분을 인용한 듯한 색소폰 세션과 모타운 풍의 코러스가 인상적인 <Kiss And Tell>까지, [201]의 트랙들은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달성하고 있지요. 그 중에서도 스페인어를 차용한 <Dientes>의 시도는 값진데, 명랑하면서도 우수어린 멜로디에 실린 이국의 언어는 우리 깊은 속내를 파고드는 힘이 있습니다.
취향의 가감 없는 노출, 보편보다는 로컬에 찍은 방점. 이러한 경향성은 특히 지난해와 올해의 한국 인디 씬에 걸쳐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그림자 궁전, 브로콜리 너마저,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달콤한 비누, 갤럭시 익스프레스 등 다수), 그렇다면 검정치마의 본 작도 그러한 맥락의 연장 속에서 파악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앞서의 밴드들과) 일정한 차이를 지니기도 하는데, 차이의 핵심은 우리의 특수성, 즉 '한국적인 것'을 다루는 방식에 있습니다(이는 오래된 전통으로서의 '한국적인 것'이 아닌, 60~70년대 이후 근대 한국 대중음악에서의 '특수성'을 이야기합니다). 브로콜리 너마저나 달콤한 비누가 영미식 팝/록의 특정 기호들을 거의 매개하지 않음(그들은 이미 한번 이상 '윤색'을 거친, B급으로 격하된 '가요'들을 인용하지요)과는 대조적으로, 검정치마는 '가요'를 배제하지도 않으면서 또한 특권화 시키지도 않는 신중함을 보입니다. [201]이 비록 많은 부분에서 한국어로 불리고 있는 디스크기는 하지만, 그것이 뚜렷한 국적성을 담보하고 있다 보이지는 않거든요. 다양한 로컬들의 기호가 얽힌 검정치마의 작업에서 '한국적인 것'이란 다른 요소들에 비하여 절대 우위에 서지 않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 여러 경향 중 하나로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배수아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무국적성의 발로라기보다는, 다국적인 감수성의 만개에 가깝지요. 대표적인 다인종/다문화 도시 뉴욕에서 3인조 펑크 밴드로 시작되었다는 검정치마의 지난 이력이 문득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흥미롭게도 같은 레이블에서 얼마 전 발매된 파블로프의 경우, '한국적인 것'을 다루는 데 있어 검정치마와 비교될 만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역시 <보다>에 기고되었던 그들의 데뷔작, [반드시 크게 들을 것]에 대한 제 졸고를 참조하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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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두 갈래, 팝으로 팝에 구멍-내기, 그리고 코스모폴리탄적 감성이라는 테마로 검정치마의 [201]을 살폈습니다. 꽤나 흥미로운 연출을 보여주는 디스크지요, 그의 데뷔작이란. 종래의 한국 씬에서 이렇다 할 유사 아티스트를 찾을 수 없으면서도, 게다가 그것이 자족적인 아방가르드적 실험의 형태가 아닌 지극히 파퓰러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때 우리는 구멍-내기라든지 코스모폴리탄적 감성 같은 그의 영리한 '시도들'에 대하여 '시도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충만하다'라는 식으로 값을 쳐주는 비평을 경계해야겠습니다. 언니네 이발관의 [비둘기는 하늘의 쥐]가 그러했듯, [201]의 비범함도 기본적으로 기꺼이 듣고 즐길 수 있는 '좋은' 노래들이 담겨 있기에 가능해지거든요. 구멍-내기란 실상 안티-뮤직에 대한 욕구가 아닌 팝의 '생산적인 갱신'을 지향합니다. 기존의 틀 안에서 표현되지 못하여 '초과된' 정서를 담아내기 위한 일종의 '극복'이고요.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되돌아갑니다. 벌써 수십 번은 반복해들었을 싱글, <좋아해줘>. 하지만 들을 때마다 재미납니다. 멋진 팝송인 주제에, 잠시만 정신 놓고 있으면 황망하게 지나쳐버리는 것은 여전하고요. 세세한 단점들이 슬쩍 보이기는 하지만, 뭐 상관없어요. 청춘이란 원채 조금 어설프기도 한 법, 게다가 거칠면서도 달달한 팝-튠에 "어제 막 찾아온 사춘기처럼" 좋아해달라는 (일견 유치하기도 한) 메시지를 무작정 담아 나르는 검정치마를, 과연 외면할 수 있을까요? "너와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해, 또 다른 빙하기가 찾아오면은 어떡해"라면서도 "춤을 추며 정말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Antifreeze>)라고 다짐치는 불꽃같은 러브송을? 멋지잖아요, 청춘. 낭만은 차고, 흘러넘치고, 세계를 뒤덮습니다. 조금 바보 같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너의 잘못"(<좋아해줘>)일거에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언젠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Antifreeze>)라는 믿음으로. 예, 그 믿음으로요. 디스크는 뱅글뱅글- 춤을 추고 있습니다. (단편선/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