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핏빛 이명열 시인

작성자윤배박셈|작성시간26.06.08|조회수13 목록 댓글 0

[좋은시를 찾아서]핏빛

             이명열

조릿대가 겨울을 지키는 저수지 둘레길
밧줄이 땅바닥에 금을 긋는다


‘여기는 꽃 진 자리입니다’

 

갸웃거리던 침묵이 뜨겁게
여름을 지나쳐야 그때

 

멋대가리 없는 줄기가 올라온다

 

덩그마니도 괜찮고
함께도 괜찮다

사랑은 늘 그 빛이었으니까

 

◇이명열= 한국시인협회와 천안문인협회에서 시를 쓰고 있다. 때때로 시 낭송을 즐겨하다. 지금은 ‘천안시낭송아카데미’ 대표를 맡고 있다. 『서정시학』으로 등단하여 시집 『양철지붕을 끌고 다니는 비』 『맹세의 바깥』(2026, 시산맥사)

<해설> 사람들에게 가장 친하게 다가오는 빛깔이 “핏빛”일 것이다. 고통의 섬뜩함을 떠올리면서도 동시에 어떤 희열을 간직한 게 핏빛이다. 특히나 남성보다도 여성들은 핏빛에 대범한 편이다. 살빛, 눈빛 등등 인간의 신체를 두고 빛깔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경우 그 빛깔은 친숙함과 오묘한 감정까지도 포함한 채, 새로운 상상의 매개가 된다. 시인이 제목을 핏빛으로 설정한 근거는 얼핏 보면 겨울 호숫가에서 만난 조릿대 그 조릿대가 피워내는 꽃의 색채에 연유되지만, 이미 시의 배경은 겨울이므로 덩그러니 밧줄만 남아 있다. 이때 밧줄은 넘지 말라는 경계의 신호 이긴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여기는 꽃 진 자리입니다’의 꽃진 자리는 폐경의 의미로도 읽힌다. 갸웃거리던 침묵이 뜨겁게 익히던 그때에는 알지 못한, 여름이 지나쳐야 그때, 올라오는 멋대가리 없는 줄기는, 현실의 한 단면이다. 시인에게 덩그마니도 괜찮은 것, 함께도 괜찮은 것. 왜냐? 세월이 지나가도 사랑은 늘 그 빛이었으니까.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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