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 러시아의 역사에서 독특한 점중에 하나는 개방된 성문화이다.
로마노프 초기 여황제들이 집권한 시기에 여제들의 애인 만들기는 아주 공공연하게 보인다.
특히 그중 압권은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the Great)일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살아있는 중에도 공식적/비공식적 애인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역사에는 총 21명의 애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애인들에 관한 기록들은 잘 보존되어 내려오는 편이다.
기록에 의한 역사학자들이 밝히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애인들 명단은 다음과 같다.
- 1752: Serge Saltykov
- 1756 Stanislaw Poniatowski
- 1758 Gregory Orlov
- 1772 Alexander Vassichikov
- 1774 Gregory Potemkin
- 1776 Peter Zavandovski
- 1777 Simon Zorich
- 1778 Ivan Rimsky-Korsakov
- 1780 Alexander Lanskoi
- 1783 Alexander Ermolov
- 1786 Alexander Mamonov
- 1789 Plato Zubov
그들은 예카테리나 2세를 즐겁게하는 동안 그녀의 침실을 드나들었고,
그녀를 기쁘게 해주는 만큼의 댓가(?)로 농노와 영지와 그리고 권력을 제공받았다.
파트너를 은퇴(?)시킬때면 그들에게 푸짐한 하사품 (영지와 농노 등)과 함께 퇴역시켰다고 한다.
수많은 정부들중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만(ㅠㅠ) 다음에 기술해 본다.
(참고로 아래 기록 및 사진들은 위키백과를 근거로 각색하여 적은 것이다)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Sergei Vasilievich Saltykov ; 1726-1765)
예카테리나 2세의 기억으로는 첫번째 애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녀의 아들 파벨1세(Paul I)는 살티코프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대체적인 정설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공공연하게 아들 파울1세가 살티코프의 아들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고 하는데 역사가들은 그녀가 아들 파울1세가 왕위를 계승하기 보다는 손자 알렉산드르가 후계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아들 파울1세를 극도로 미워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인 즉슨, 피도 안섞인 남편 표트르3세를 닮았다는 이유라는데... 쩝...
어쨋든 첫번째 정부 세르게이 살티코프는 바실리 살티코프 백작의 아들이며, 살티코프 가문은 유명한 러시아 귀족집안으로 알려져있다.
필자주) 슬프게도 살티코프의 초상화는 어디에도 남은게 없었다. 다만 그의 아들이라고 추정되는 파울1세 사진을 대신 실는다.
(파울1세의 소년기 모습)
그레고리 오를로프 백작 (Grigory Grigoryevich Orlov : 1734-1783)
오를로프 집안에는 4명의 오를로프 형제가 있다. 그중 제일 맞형인 그레고리는 예카테리나 2세의 충신이자 애인이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경비대 장교로 근무중 예카테리나 여제가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하는 쿠테타에 앞장섰으며, 결국 그를 교살하는데도 그 형제가 큰 공헌을 한다. (표트르3세는 암살당하기 전까지 오를로프 가문의 영지인 가치나에 감금당해 있었다)
(그레고리 오를로프) (그의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가치나 영지와 궁전)
1762년 예카테리나 2세와 오를로프 백작사이에는 사생아가 하나 태어나는데, 처음에는 알렉세이라고 불려졌다. 예카테리나 2세는 그 아이에게 로마노프 가문의 이름을 주는 것을 갈등하다가 결국 보르린스키(Bobrinsky)라는 이름을 주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예카테리나 2세를 그토록 증오하던 아들 파울1세는 그가 집권하자 피다른 형제인 보브린스키를 백작으로 임명하고 러시아 황실 가족으로 복권시킨다.
(Aleksey Grigorievich Bobrinsky (1762-1813)의 어릴때 모습)
오를로프와 관련한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오늘날 통칭 '오를로프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세계 최고의 다이아몬드 사건인데, 예카테리나 2세의 마음이 오를로프에서 떠나 포템킨으로 가자, 오를로프는 다이아몬드 수집광인 예카테리나 2세의 환심을 사기위하여 세계 최고의 다이아몬드를 선물한다.
이 후로 이 다이아몬드를 the Orlov라고 불리운다.
그레고리 포템킨 ( Prince Grigori Alexandrovich Potemkin-1739-1791)
오를로프에게서 예카테리나 2세의 마음을 뺏은 것은 포템킨이다.
오를로프 형제와 함께 표트르3세 폐위와 암살을 주동하는 근위대 장교였다. 예카테리나는 그의 열정과 통솔력을 자주 칭찬하였다고 한다.
포템킨은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무소불위의 권력과 많은 포상을 받는다. 모든 황제의 중요문서는 그를 통해서만 전달되었고, 그는 러시아 총 사령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애인들과의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기도 하였고 예카테리나 2세의 애인후보자 Pool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예카테리나 2세의 추천으로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조셉2세에 의하여 Prince 칭호도 얻게 된다.
(포템킨 초상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포템킨의 저택)
포템킨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Potemkin Villiage라는 말이 있는데, 당시 포템킨이 관할하고 있는 크리미아 지역을 예카테리나가 시찰하는 과정에 워낙 낙후된 지역이라, 포템킨은 아름다운 마을 정경을 그림으로 그려서 그녀가 배를타고 지나는 지역에 그 대형그림을 그려서 여제로 하여금 좋은 인상을 갖도록 하엿다는 일화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알렉산드르 드미트리프-마모노프(Alexander Matveyevich Dmitriev-Mamonov ; 1758-1803)
포템킨은 예카테리나 2세를 위하여 여제의 애인 후보자 여러명을 확보하고는 그중에서 선발하여 여제에게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 포템킨의 잦은 외유기간중 여제를 즐겁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 후보자들 중에 16살의 나이로 간택(?)된 인물이다.
여제는 그의 빼어난 외모와 매너에 홀딱 반하였고, 그를 1년만에 대령으로, 장군으로 결국 궁정 시종장으로 임명하였고, 그녀가 머물고 있는 겨울궁전 내부에 그의 처소를 마련해주고 지근거리에서 즐겼다.
16살의 미소년과 60세의 노파와의 사랑.
예카테리나 2세는 그를 동반하여 크리미아 전쟁을 협상하는 자리에 까지 동행하는가 하면, 모스크바 근교에 몇주간 밀월여행을 장기간 함께 다녀오고 그 지역을 그에게 선물로 주기도 한다. 그정도로 사랑했던 반면에,
미소년은 마치 우울증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의 친구들이 전하는 글에 의하면 감옥에 갖힌 듯이 불행하게 느낀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그는 몰래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되었고, 이 사실을 안 여제는 분노한다.
당시 시종중의 한사람 일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드미트리에프와 그의 애인은 예카테리나 2세앞에 무릎을 꿇고 둘이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전한다.
여제는 10만 루블과 2250명의 농노를 그에게 하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날것을 명한다.
둘은 결혼하여 모스크바에 거주하게 되는데, 1년후 드미트리는 여제에게 보내는 회한의 편지에서 후회하는 편지를 올렸으나 여제는 일체의 답장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아마 여제의 가슴속에 애증이 그대로 남겨져 있는 듯 하다.
플라톤 알렉산드로비치 주포프 (Platon Alexandrovich Zubov 1767-1822)
그는 예카테리나2세의 마지막 애인으로 알려져 있다.
주포프 가문은 아주 오래된 귀족 가문으로 그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주포프는 블라드미르지역의 부시장을 맡고 있었고, 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백작을 수여받는다.
그중 셋째 아들인 플라톤은 먼 친척관계인 니콜라이 살티코프 장군을 통하여 여제에게 상납(?)되어진다. 당시 포템킨과의 갈등관계에 있던 살티코프의 계교였다.
단박에 여제는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포템킨에게 쓴 편지에서 사랑에 빠졌다고 실토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 60이고 주포프는 22세였다.
(주포프 백작 초상화)
여제는 그에게 어마어마한 권력을 부여한다. 포템킨이 사망하자 그의 권력을 주포프에게 승계하도록 하는 한편 예카테리나 궁전 옆에 주포프의 처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역시 포템킨과 같이 신성로마제국의 왕자 칭호를 부여받도록 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포템킨 보다 더 강하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귀족들과 정치인들은 그에게 줄을 대느라 뇌물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와 동시에 여제는 그에게 수십만의 농노와 토지를 하사한다.
(주포프가 거주했던 예카테리나궁전의 그의 처소)
예카테리나 2세는 갑자기 사망한다.
혼돈에 빠진 주포프는 10일동안 그의 여동생 올가집에 숨어있다가, 후임 황제 파울1세 앞에 나아가 모든 재산과 권력을 내놓고 외국으로 나가겠다고 스스로 무릎을 꿇는다.
그는 그뒤 유럽을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하게된다.
그의 망명에도 불구하고 파울1세 하에서 그의 형제 니콜라이 주포프, 드미트리 주포프는 권력을 유지하였다. 결정적으로 그의 형 니콜라이 주포프는 파울1세의 암살을 기도하고 결국 황제를 암살한뒤에 동생을 귀국시킨다.
뒤를 이은 파벨1세의 아들 알렉산드르 1세는 아버지의 암살 사건에 대하여 주동자 파렌백작만을 국외추방하고 나머지는 더이상의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
c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