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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詩 문학

영화 "콘스탄틴"을 보고 - 매우 기독교적인 영화임.

작성자데니스|작성시간05.06.21|조회수639 목록 댓글 0


영화 "콘스탄틴"을 보고

 


wolflee@hanmail.net

이동승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많은 기독교인들의 평이 '반기독교적이다'고 하기에, 그런가고 직접 색안경을 끼고 비판적 시각으로 자세히 보았지만, 오히려 여러가지 면에서 볼 때 다분히 기독교(주로 카톨릭)에 우호적이라 매우 놀라왔다.  어떤 측면에서는 할리우드적 퇴마 영화인척 하며 사실은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물론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많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시각은 매우 긍정적이고 기독교적이다.  창조 후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사탄을 허락한 것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규칙과 섭리에 불만을 제기하는 인간대표 콘스탄틴을 한축으로 하고,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해주시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불공평한 긍휼과 사랑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천사대표 가브리엘을 다른축으로 하여, 그들의 갈등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신비한 역사 방법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작가의 노력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주인공 이름을 콘스탄틴이라 정한 것도, 기독교에 우호적이었으나 그 자신은 늘그막에 죽기 전에서야 침례를 받았던 가짜 크리스챤 콘스탄틴 대제를 오늘날 대부분의 엉터리 신자들의 모습에 투영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면, 영화에서 제기되는 신학상의 이슈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작가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자기를 선택할 것이다’고 하나님이 루시퍼와 내기하고, 게임규칙으로 직접 관여하지 않고 또 사탄도 직접 관여하지 못하게 하며, 단지 혼혈천사와 혼혈악마를 통해 말씀과 유혹의 ‘영향력’으로 인간을 시험한다는 세계관을 제시한다.

 

‘왜 내기를 했는가? (왜 사탄을 허락했는가와 같은 질문)’하는 안젤라의 질문에 콘스탄틴은 ‘모르겠다. 그냥 재미있으니까 그랬겠지’하고 불만을 터뜨린다. 

이는 ‘욥기’에 등장하는 사탄과 하나님의 내기를 떠올리는 데, 성경을 축자적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서는, 구약의 세계관은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을 담은 신약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사탄에게 자랑삼아 보이려고 인간을 시험하게 허락했는가?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은 그 시험을 통해 인간의 신앙 성장과 성화를 기대했다고 알 수 있다.

 

작가는 콘스탄틴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제기하지만, 영화의 막바지에 가브리엘과의 인류의 운명이 걸린 극적인 갈등을 통해서, 콘스탄틴은 ‘인간이 오히려 특혜를 받고 있다’는 전혀 다른 관점을 경험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고통과 공포’를 통해서만 착하고 겸손해질 수 있기에 마몬을 통해 세상을 불의 왕국, 지옥으로 만들어 참회케 하는 게 오히려 공평한 구원 방법이라는 가브리엘의 지적에 정신이 들고, 이사벨의 자살이 마몬을 통한 음모를 막기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는지 콘스탄틴은 정신이 번쩍 들어 진정한 회개의 변화를 보인다.  그리고 그 변화는 가브리엘에게 인정받는다. 

 

이 과정에서 가브리엘은 자기 방식으로 인간을 직접 깨우치려 하고, 루시퍼를 직접 처벌하려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날개가 타버리고 인간으로 전락한다.  그렇지만 콘스탄틴의 변화된 모습에 자기의 처지는 잊고 오히려 기뻐한다.  결국 콘스탄틴을 정말 회개시키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그러한 희생을 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는데 이는 왠지 예수의 희생과 비교된다. 

 

작가는 어쩌면 고결한 예수님의 희생은 인간의 추악함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지나치게 감지덕지한 것이고, 가브리엘의 터프한 방식의 구원이 격에 맞다고 볼 정도로 인간이 그런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전제하는 혼혈천사와 악마라는 설정은 구약의 네피림 등을 떠올리기는 하지만, 신학적으로 논할 가치가 없고, 그냥 영화적 재미를 위한 장치로 봐 줄까 한다.

 

둘째  ‘자살을 하면 지옥으로 바로 직행하는가?’ 하는 이슈이다.  이는 정통적 카톨릭의 관점이고 개신교도들조차도 이런 기계적인 심판관을 갖고 있다.  작가는 ‘이사벨이 늘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다’는 안젤라의 변호에도 ‘자살하면 영혼이 갈기갈기 물어뜯기는 지옥에 간다’는 콘스탄틴의 무자비한 발언과 늙은 신부의 장례절차 거절의 장면을 제시하며 관객에게 ‘좀 심한 규칙이 아닌가’하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그리고 콘스탄틴이 왜 퇴마일은 열심히 하지만, 마음에 평안이 없어 줄담배로 몸을 망치는지, 왜 하나님의 섭리에 부정적인지 이해하게 한다.  그는 과거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고 알았고, 오로지 은혜를 입어 천국가기 위한 한가닥 희망으로 열심히 퇴마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브리엘은 콘스탄틴에게 기독교 교리로 냉정하게 말한다.  ‘천국은 선한 일을 통해서 갈 수 없다.  믿음과 희생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  콘스탄틴은 한 번 본 지옥에 대한 두려움으로 천국을 가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방식을 납득하지 못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다.  해서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해보았고, 안되면 저주나 하지 하는 심정이었으리라.  즉 특이한 능력을 타고 나게 한 하나님을 원망만 했지 자기 자신의 죄성과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해서 진정한 회개를 한 적이 없었다.

 

해서 자기의 줄담배 탓으로 폐암에 걸긴 것도 근본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며, 애꿎은 벌레를  ‘니코틴 가스실’(유리컵에 담배 연기 넣음)에 가두는 심술을 보인다. 

정말 자살을 하면 자살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불만을 가진 콘스탄틴들만 늘어날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는 곧 작가는 기독교적인 답을 제시한다. 

 

즉, ‘이사벨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세상을 불의 왕국으로 만들려는 마몬의 탄생을 위한 영매가 되지 않으려고 선택한 자기 희생이 아닌가’하고 콘스탄틴이 깨닫게 되고, 이로 인해 변화된 콘스탄틴 자신도 ‘마몬을 다시 지옥으로 데려가게 하기 위해 루시퍼를 불러들일 목적으로’ 자기 동맥을 끊는다.  즉 현상은 ‘자살’이되 본질이 ‘희생’인 경우로서 실제로 루시퍼에게 ‘나를 지옥으로 데려가는 대신 이사벨을 천국으로 보내달라’ 는 콘스탄틴 답지 않은 희생적 요구를 하는 점에서 그의 회심은 입증된다.  루시퍼는 거짓으로 ‘예스’라 대답하지만, 그 결과 하나님 판결로 콘스탄틴은 순간이나마 천국으로 올라가는 경험을 한다.

즉, 작가는 기계론적 심판관을 거부하고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셋째, 악 또는 적의 공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데, 처음 콘스탄틴은 아메리칸 정신답게 혼혈천사가 죽은 것을 복수하기 위해 역시 죽임으로 복수를 한다.  마치 911테러 후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서 성전이라고 말하는 미국의 가치관을 볼 수 있는데, 통쾌하기는 하나 굳이 예수님의 ‘뺨’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과연 기독교적인지 의문이다.  작가는 이를 의식했는지 가브리엘이 ‘복수하고 싶지?  자 하고 싶은 대로 해봐!’하고 시험을 할 때 콘스탄틴이 ‘십자가 주먹’을 휘두르는 선에서 회심 후의 너그러운 변화를 보인다.  이를 가브리엘이 인정하는 장면인데, 총에 의한 복수는 기독교적으로 심하고, 주먹에 의한 복수 정도는 하나님이 봐주지 않을까하는 미국인적 시각을 볼 수 있어 조금은 씁쓸하면서도 한편은 솔직히 인간적이라서 미소 짓게도 한다.

 

넷째, 인간의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어떤 목적을 가지거나 영웅심에서만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콘스탄틴은 자살시도 전력으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면죄부를 얻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퇴마 선행을 한다.  그 증거가 퇴마의식 때 마다 ‘나는 콘스탄틴이다’라고 자기가 했음을 밝힌데 있다.  이것을 꼬마 동료 크래이머는 멋있게 여겨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소영웅심에 들떠 퇴마 후  ‘나는 채즈 크래이머다’고 우쭐한다.  그리고 그 결과 꼬마는 마몬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데 왠지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보이고자 의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론은 애매하지만, 가브리엘의 질투에 의한 위기상황 도래와 그 과정에서 콘스탄틴의 회개를 볼 때, 원죄로 인해 타락한 본성으로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한해 어느정도 자유의지로 반응할 수 있는 것으로 작가는 보고 있어 기독교적이다 할 수 있다.

 

물론 영화는 퇴마 액션의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함인지, 전형적인 할리우드 괴기영화의 엉터리 민간 신학을 보인다.  즉, 예수님과 별 관계없이, 물리적인 빛과 성수, 십자가, 성물을 이용하여 인간이 만든 무기로 마귀를 죽일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하고, 고양이나 여자의 영매를 통해 지옥과 마귀를 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지옥의 성경이 따로 있는 등 황당한 내용이 많다.  그러나 이는 영화적 흥미를 끌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다만 불신자와 초신자에게는 오해 없도록 잘 가르칠 필요가 있겠다.

 

다섯째, 사탄은 하나님과 맞먹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인데, ‘하나님과의 내기’, ‘이사벨의 천국행 약속’, ‘콘스탄틴의 생명 연장’ 장면을 가지고 작가의 관점을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전체를 꿰뚫어 보면 이것이 오해임을 알 수 있다.  즉, 내기는 격이 낮은 사람과도 할 수 있을뿐더러, 하나님이 사탄과 내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욥기’를 문자적으로 이해한 데서 오는 오해일 뿐이다.  루시퍼가 가브리엘에게, 이세상은 잠깐 동안은 루시퍼의 것이라고 하나님이 허락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장면, 자기 아들 마몬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하는 장면, 하나님의 규칙에 순응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장면(마몬에게 조차 위협당할 수 있는 루시퍼의 약한 위치), 마몬의 탄생조차 하나님 뜻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지옥성경 내용, 가브리엘이 주먹을 휘두를 때 ‘움찔’하면서, ‘하나님이 이제 너를 안 밀어주나 보지?’하는 장면에서 작가는 분명히 루시퍼의 레벨이 가브리엘과 격이 같으며,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제한된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지옥에 있는 이사벨을 물론 천국으로 보낼 능력이 루시퍼에게는 없다.  사탄이 굳이 진실을 말하겠는가?  그리고 루시퍼는 죽은 콘스탄틴을 살려낸 것이 아니라 손목과 폐를 치료한 것이다.  사탄에게도 치료의 능력은 있다.  오히려 육체적 생명을 연장시켜서라도 끊임없이 유혹하여 인간 콘스탄틴의 영원한 죽음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사탄의 본성에 충실한 것이다.

 

아무튼 본질적이지 않은 영화적 장치에 연연해서 무작정 ‘비기독교적인 영화’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흐르는 대주제를 보면 이 영화가 다분히 기독교적이고 어쩌면 불신자를 전도하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신자가 보기에 세상이 언뜻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이고, 주변 크리스챤이 ‘다 하나님 계획이다’라고 하면 ‘그럼 사육하는 것이냐?’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백번 ‘하나님의 계획은 구원이다’라고 말로 외치는 것보다, 이 영화 한편을 보게 한 후 위에서 살펴본 이슈를 납득시키는 게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콘스탄틴’ 같은 영화가 나오게 된 것도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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