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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왕

워터하우스 - Mariamne Leaving the Judgement Seat of Herod
헤롯은 '영웅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틴과 그 근접 지역을 B.C. 55-A.D.93년까지
다스린 왕조의 왕들을 통틀어 헤롯이라고 합니다
그 중 대 헤롯(헤로데)이라 불리는 헤롯대왕은 로마 제국이 임명한 유대의 왕(BC 37~4 재위)이다.
그는 많은 성채·수로·극장·공공건축물을 세웠으며, 전반적으로 유대를 번영시켰지만 말년에는 정치적
헤롯은는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안티파트로스는 에돔 사람(사해와 아카바 만 중간
지역에 사는 아랍인)이었다. 안티파트로스는 큰 영향력과 부를 지녔고, 당시 부흥하던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
(요르단 강 남서부) 출신의 귀족 딸과 혼인하여 그 영향력과 부를 더욱 증가시켰다. 그러므로 헤롯은 비록
유대인 행세를 했으나 부계와 모계 둘 다 아랍 혈통이었다.
BC 63년 폼페이우스(BC 106~48)가 팔레스타인을 침공했을 때 안티파트로스는 그의 원정을 지원함으로써 로마와 오랜 관계를
시작했고, 로마로부터 그와 헤롯은 혜택을 받았다. 6년 뒤 헤롯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헤롯 가문을 좋아하여 BC 47년 안티파트로스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는데,
그 신분은 헤롯 및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계승되었다. 같은 해 헤롯은 아버지로부터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받아 정치무대에
나섰다. 6년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갈릴리 분봉왕으로 삼았다. BC 40년 파르티아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고
내전이 일어나자 헤롯은 로마로 도망갔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유대 왕으로 임명하고 그 지역을 충분히 장악할 만한 군대를
주었다.
BC 37년 헤롯은 36세의 나이에 감히 아무도 도전하지 못하는 유대의 통치자가 되어 32년 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다.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아내 도리스와 이혼하고 그녀를 아들과 함께 궁 밖으로 쫓아낸 뒤 하스몬 왕가의 공주
마리암과 재혼했다. 그가 재혼한 목적은 유대 민족의 지도자이며 제사장 가문인 하스몬가(家)와의 불화를 끝내려는
것이었지만, 결혼한 뒤 마리암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두 집정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카이사르의 권력을 계승하기 위해 갈등이 생기자, 헤롯은 친구 안토니우스를
지원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정부이며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을 이용해
헤롯의 가장 좋은 영토를 많이 차지했어도 안토니우스를 계속 지원했다.
BC 31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가 최종적으로 패배한 뒤 헤롯은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자기가 누구 편을 들었는지
솔직히 고백했다. 이전에 로마에서 헤롯을 만난 적이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로마가 원하는 대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릴 유일한 인물임을 알고서 그를 다시 왕으로 인정해주었으며, 또한 클레오파트라가 차지했던 땅을 헤롯에게 돌려주었다.
헤롯은 아우구스투스의 대행정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손자와
증손자의 이름을 지었다.
 B. Britten - 악티움 해전
황제와 대행정관은 헤로데에게 국빈으로 로마를 방문할 기회를 주어 그는 다시 이탈리아를 2번 방문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에게 키프로스 구리 광산 감독권을 주고 이익의 절반을 할당해주었다. 그는 BC 22, BC 20년에 헤롯의 영토를 2배로
늘려주었기 때문에 헤로데의 영토는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요르단 강 동편, 즉 오늘날 요르단 왕국의 일부지역과 레바논 남부,
시리아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 나바테아 왕국도 헤롯에게 줄 뜻이 있었지만, 당시 그 왕국의 권좌가 공석이었을 당시
헤롯은 정신과 육체 모두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롯은 자기 영토에 수많은 요새와 화려한 도시들을 건설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두 도시는 주로 이교적인 새 도시로 하나는
요파(야파)와 하이파 사이의 해안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항구도시 카이사레아로, 훗날 로마령 팔레스타인의 수도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고대 사마리아의 옛 터에 세워진 세바스테였다. 그는 예루살렘에는 안토니우스 요새와 웅장한 왕궁
(그 일부가 성채 안에 남아 있음)을 지었다(→ 예루살렘 성전).
안토니우스 요새는 그 일부가 오늘날 비아 돌로로사(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걸어간 길)에 세워진 수도원들 밑에 남아 있다.
그가 지은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웅장한 것은 성전으로서, 그는 그 전체를 다시 건축했다. 넓이가 14ha에 이르는 성전 바깥
뜰은 오늘날도 '알 하람 아시 샤리프'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는 또한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로도스 등 외국
도시들과 많은 성읍들을 장식했다. 헤롯은 올림픽 경기의 의장이 되어 그것을 후원했다.
자기 왕국에서는 유대교의 주도적인 파벌인 바리사이파를 거스르는 것을 우려하여 마음껏 자기를 과시하지 못했다.
바리사이파는 그를 외국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언제나 그와 대립해 있었다. 헤롯은 자기에게 감사해 마지않는 이교도들의
후원자로서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바깥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의 보호자로도 자임했고,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 군주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불행하게도 헤롯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뚜렷하게 어둡고 잔인한 성격을 드러냈다. 더구나 그의 정서불안은 가정 내부에서
계속된 음모와 술수 때문에 더욱 깊어졌다.
마리암을 깊이 사랑한 그는 질투심이 일어나면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헤롯의 누이 살로메
(그녀의 증조카, 즉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는 다른 인물)는 남을 쉽게 의심하는 그의 성격을 교묘하게 이용해 헤롯이
아내를 미워하게 만들어 두 사람의 관계를 깨뜨렸다. 결국 헤롯은 마리암과 그녀를 통해 낳은 두 아들, 그녀의 오빠와 할아버지,
그녀의 어머니를 모두 살해했는데, 마리암의 어머니 또한 야비한 사람으로서 살로메의 음모를 종종 돕곤 했다.
헤로데는 도리스와 마리암 외에도 8명의 아내가 더 있었으며, 그 가운데 6명의 아내를 통해서 14명의 자녀를 낳았다.
 루벤스 - 영아 대학살
헤롯은 말년에 동맥경화증을 앓았다. 그는 1차례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이웃나라인 나바테아와도 분쟁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신망을 잃고 말았다. 그는 큰 통증에 시달렸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또 3번이나 후계자 문제에 자기의 뜻을 번복하다가, 왕위를 물려주던 맏아들 안티파테르를 살해했다. 그가 죽기 직전에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일은 전적으로 그가 빠져 있던 혼란과 일치한다.
헤로데는 1차례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한 뒤에 죽었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재가를
받는 것을 전제로 한 뒤 자기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나누어주어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왕이 되도록 했고,
빌립보와 안티파스에게는 분봉왕들로서 나머지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도록 했다.
S.H. Perowne 글

출처:인터넷로고스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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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을 읽다보면 헤롯이 여럿 등장합니다. 헤롯이 분명히 죽었는데 또 헤롯이 나타납니다.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에 피난갔던 예수님 가족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재판을 받을 때 또 헤롯이 등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헤롯을 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안 얘기지만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헤롯, 아버지 헤롯, 아들 헤롯, 손자 헤롯을 좀 구분해 봅니다.
헤롯이 신약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입니다. 이 때 등장하는 헤롯을 헤롯1세, 혹은 헤롯대왕이라고 부릅니다. 아들 헤롯하고 구분하기 위해 대왕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헤롯 왕인데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름만 알고 지나가면 헤롯 안티파터 2세입니다.
헤롯대왕(헤롯1세) 이 헤롯이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입니다. 동방박사들을 통해 유대인의 왕이 나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살 미만의 아이들을 다 죽인 바로 그 왕입니다. 헤롯은 유대인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46년에 걸쳐 성전을 지은 바로 그 헤롯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 헤롯을 피해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살다 헤롯이 죽은 후에 돌아와 나사렛에서 살았습니다.

이 집안이 좀 복잡합니다. 부인을 여럿두다 보니 생긴 일입니다. 첨부한 가계도를 보기만 해도 복잡함이 느껴지지요. 가계도 위에서 세번째 줄이 헤롯대왕의 부인들입니다. 혹 가계도가 잘 안보이면 가계도 위에 커서를 놓고 한 번 더 클릭하시면 조금 더 큰 가계도를 볼 수 있습니다. 헤롯대왕이 죽으며 나라를 셋으로 나눠 아들들에게 줍니다. 그렇게 유언을 하고 죽습니다. 당시 유다나라가 로마의 식민지 통치아래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 유언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세 아들에게 나눠준 걸 나라라고 하기 보다는 지방 몇을 나눠줬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나라 강원도보다 조금 큰 유대나라 전체를 셋으로 나눠줬으니 말입니다.
아들 헤롯 헤롯의 첫째 아들 이름은 헤롯 아켈라오, 둘째는 헤롯 안디바, 셋째는 헤롯 빌립(빌립보)2세입니다. 아버지 헤롯이 이들에게 나눠준 땅은 지도에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첫째 아들 헤롯 아켈라오 헤롯 아켈라오는 헤롯대왕이 직접 통치하던 유대와 사마리아 및 이두매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는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 계승을 반대하는 유대인 3000명을 학살하는 등 헤롯대왕과 같은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다가 결국 A.D.6년 아우구스투스의 재판을 받고 고울(Gaul) 지방으로 추방됨으로써 그의 통치는 짧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영토는 총독(빌라도)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둘째 아들 헤롯 안디바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이 헤롯이 예수님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헤롯은 아우구스투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디베료(Tiberius)에게 자기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갈릴리 호수 서편에 디베랴(Tiberias)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바다라고 부르는 것은 이 도시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헤롯은 가계도에서 보는 것 처럼 그의 이복 형제였던 헤롯 빌립(가이사랴 빌립보를 통치한 빌립과 구별하기 위해 빌립 l세라고 부름)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재혼합니다. 그걸 책망한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이 일로 세례요한은 구속되고 결국 참수형을 당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이 헤롯을 분봉왕 헤롯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우'라고 부른 헤롯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 헤롯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셋째 아들 헤롯 빌립 헤롯 빌립에게 할당된 지역인 아우라니티스, 트라고니티스, 이두래는 팔레스타인의 북쪽과 동쪽에 있습니다. 이 빌립은 누가복음 3장에 '이두래와 두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한 번 언급됩니다. 빌립도 그가 통치하던 지역에서 몇 개의 중요한 건축사업을 실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 도시의 건설입니다. 빌립도 가계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조카였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합니다.
손자 헤롯 손자 헤롯의 이름은 아그립바 1세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또 등장합니다. 헤롯왕이 교회를 핍박합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입니다.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베드로도 잡아 가둡니다. 천사가 베드로를 그 옥에서 구출하여 내지요. 이 때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대왕의 손자헤롯입니다. 그의 이름은 헤롯 아그립바1세입니다. 가계도에서 보는 것 처럼 손자 헤롯왕은 위에 등장하는 세 분봉왕 중 한 왕의 아들이 아닙니다. 가계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헤롯대왕의 또 다른 아들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다. 이 헤롯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함으로 충(蟲)이 먹어 죽었습니다. 손자 헤롯 아그립바1세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이어 왕이 됩니다. 딸 이름은 버니게(행25:13)와 드루실라입니다. 드루실라는 로마 총독인 벨릭스의 세번째 아내가 됩니다(행24:24).
증손자 헤롯 증손자 헤롯의 이름은 아그립바2세입니다. 사도행전 25장에 가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아그립바왕이 바로 증손자 헤롯입니다. 헤롯 아그립바2세입니다.
좀 정리가 되시나요?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헤롯왕의 요새]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칠고 건조한 유태지역에 헤롯왕에 의해 지어진 궁전 헤로디온이 헤롯왕에 의해 지어진 궁전 헤로디온이 언덕에 우뚝 서 있다. 헤롯왕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웅장한 건물중의 하나인 이 성채는 B.C. 1세기 중,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언덕의 정상으로부터 황폐하나 인상적인 파노라마를 당신은 만끽할 수 있고 유태사막에서 사해, 베들레헴 그리고 예루살렘을 거치며 구경할 수 있다. 그 성은 헤롯의 난공불락의 피난처중 하나였으며 실제의 독수리둥지와 흡사하다. 벽과 타워, 모자이크 조각들, 커다란 물통, 목욕과 연회를 뜻하는 건물, 이런 것들은 원래 건물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곳에 헤롯왕이 묻혔다고 전해진다.
(그림:위대한 헤롯왕의 요새가 있는 언덕의 모습, 둥그런 양치기의 땅의 성경적 조화와 전원 분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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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주교인터넷선교단 원문보기▶ 글쓴이 : 어부/니콜라오
헤롯과 가이사랴(Caesarea)
이스라엘을 떠나는 날 가이드는 헤롯 대왕의 무덤을 고고학 팀이 발견했다는 속보(速報)를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었다.
나는 헤롯만큼 엽기적인 지도자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평소 많이 했었다.
그는 왕조를 배반하고 로마의 앞잡이가 되면서 가장 잔인(殘忍)한 독재자가 되었다. 정권을 위해 유대사람이었던 처자식까지 죽이고, 예수 탄생 때는 후에 자신의 정적이 될까봐 아이들까지 죽였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건축(建築)에 대해선 일가견이 있었다. 역사만큼 상처 깊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再建)할 뿐 아니라, 마사다는 왕권을 위해 더욱 요새화 했고, 헬라의 신전(神殿)들은 셀 수없이 많이 지었다.
그 많은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혁혁한 공은 역시 모든 악조건 속에 있었던 가이사랴(Caesarea)를 가장 아름다운 항구(港口)도시로 만든 일이었다.
사람들이 가이사랴 항구를 보고 외적인 미(美)에 놀라고, 건축 과정들을 들은 후에 또 놀란다.
전문가들조차 파도가 심한 이 곳에 돌로 바다를 메워 인공항을 만들고 그 위에 성벽과 여러 망대를 건설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신(新) 도시 텔아비브를 지나 헤롯의 역작인 가이사랴 항구에 도착하여 지중해 바다를 바라볼 때 나는 모든 피로가 일순간에 씻겨 나간 듯, 순간 황홀하기까지 했다.
예수 탄생 당시 로마 황제는 헤롯왕에게 불모지 같은 이 지역을 하사(下賜)하자, 그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공법으로 10여년 만에 만든 후, 로마황제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Caesarea)’라 명명하자,
황제는 그곳을 유대 지방의 행정과 정치 중심지로 사용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은 가이사랴 안에는 로마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최첨단 시설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사랴에는 당시 아고라라는 시장(市場)과 공중목욕탕, 원형경기장과 원형극장까지 당대 최고의 예술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들이 즐비했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인상 깊었던 것은 5천 명 이상 앉을 수 있도록 만든 원형 야외극장이었다.
물론 이 극장은 헤롯이 만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로마사람들은 어딜 가나 가장 먼저 야외극장(野外劇場)을 만들곤 했었다.
요르단 페트라에서도 순전히 돌로 깎아 만든 야외극장은 극장이 아니라 무슨 예술작품을 무더기로 산 속에 옮겨놓은 듯 정교하게 깎아놓은 것을 보고서 새삼 로마의 국력이 실감났었다.
특별히 가이사랴 야외극장은 무대 중앙으로 나가 말을 하면 구석구석 모든 좌석까지 들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기에, 우리 팀에서도 즉석으로 중창을 했는데 다른 순례자(巡禮者)로부터 금방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던 것이다.

이렇듯 가이사랴에 있는 많은 시설물들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도 대단했지만,
그 중에서도 로마식 수로(水路)는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헤롯은 사막과 같은 마사다에서도 지하수로(地下水路)를 만들었고, 황량한 가이사랴에서도 멀리 갈멜산 줄기부터 도수교를 만들어 물을 끌어와 사람 사는 도시로 만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기름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듯이, 모든 것이 다 구비된 도시라도 물이 없으면 공동묘지와 다를 바가 없다.
비행기(飛行機) 안에서 코에 호흡이 있어야 사람이지, 호흡이 멈추는 그 순간 사람은 화물로 전락된다. 이렇듯 물은 우주(宇宙)가 되고 있다.
사람과 짐승, 자연(自然) 그리고 일(work)속에서 물이란 하루만 없어도 살 수 없는 생명 자체가 되고 있기에 사람들은 옛날부터 물을 다스리는 치수(治水)란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동일시했던 것이다.

물이란 이렇게 삶의 모든 근원이 되고 있기에, 일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주지 않아도 다 알고 있지만,
우리 인생에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필요성보다는 더 밀접한 삶의 진리(眞理)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진리다. 뭐가 막혀있어도 따지지 않고 밑으로 흘러가다보면 사람들은 물처럼 평온함을 느낀다.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물은 특별(特別)한 일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흘러가는 동안에 떨어지고 부딪치고 깨지면서 원래 자신의 모습을 잃게 되지만 그 사이에 더럽게 오염된 물을 깨끗하게 정화(淨化)시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흐르는 물은 내려가면서 필요(必要)에 따라 생명을 공급해 주면서,
냇물이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되고 바다는 세상이 되므로, 물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물(水)은 물이요, 산(山)은 산이다’ 라는 어떤 분의 격언이 요즘 들어 더 생각나는 것은,
각박한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도무지 그런 물 같은 사람이 없기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헤롯은 안타깝게도 가장 아름다운 항구를 건축하여 사람들에겐 오아시스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바이블에 나오는 많은 사건의 주 무대가 되었던 역사 깊은 곳의 개척자였건만 어찌된 일인지 정작 가기 자신만은 불충한 사람이 되었다.
곧 헤롯은 다른 어떤 왕보다 자의든 타의든 아니면 섭리든 간에 신과 교제할 많은 기회(機會)가 있었음에도,
만남은커녕 오히려 대적했고 핍박자가 됨으로 가장 불행한 왕이었다는 것은 가이사랴가 발굴되면서 온 천하에 공개(公開)되었던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가이사랴를 발굴할 때 놀랄 만한 유물과 유적을 많이 발견했지만, 그 중 돌에 새겨진 특별한 기념비가 하나있었다.
비(碑)에는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이것은 예수를 재판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이 곳 가이사랴에 주재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었겠는가.
저주도 대물림된단 말인가. 아버지 헤롯은 피해망상증 환자처럼 유아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헤롯의 아들은 세례요한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조롱했으며, 그의 손자 헤롯은 야고보를 죽였다. 그리고 헤롯의 증손자 아그립바 2세는 14년 후에 바울을 심문했다.

모든 사람에겐 기회(機會)가 있다. 그렇다고 그 기회를 다 잡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불공평한 삶이지만 살아가면서 역전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헤롯과 같이 많은 호조건(好條件) 속에서도 기회를 원수로 바꾸는 사람도 있다.
헤롯은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로마가 원하는 일이란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했었지만, 정작 신(神)이 원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만든 가이사랴는 지중해안에서 가장 번성하던 도시요, 역사적으로 수많은 일들과 함께 기독교적으로도 유서 깊은 곳이었지만,
헤롯은 이 모든 기회들을 자신을 위한 영광만을 위해 사용했지, 정작 본질적인 인생의 주인 앞에서는 포악한 영웅의 무상함 외에는 보여준 것이 없었다.
사람은 남이 알아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결국 절대자 앞에 가야하므로 항상 세 가지를 염두하며 살아야만 성공 속에서도 실패하지 않는 인생이 될 수 있다.

먼저 영혼(靈魂)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영혼은 육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육체란 영혼의 옷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죽음(死)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싫어하지만, 예고 없이 필연적으로 다가오므로 항상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절대자(絶對者)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그 분 앞에 서는 일도 피할 수가 없다.

주여,
헤롯은 뛰어난 기회주의자였으며, 스스로 산성과 요새(要塞)를 만들었지만,
자신의 영혼 앞에서는 언제나 피해망상증 환자였습니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다 해도, 남겨진 것은 영웅의 무상함을 보여준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하기에, 더도 말고 덜 더 말고 물 같은 사람이 되게 하셔서,
늘 그 분을 만남으로 낮은 곳으로 흐르므로, 필요를 채워주는 소망(所望)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2007년 6월 24일 단오제 마지막 날 강릉에서 피러한이 <성지순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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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2000년만에 발굴된 헤롯 왕의 무덤. 헤롯 왕은 기독교가 태동하던 시대에 정치적으로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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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근 |
| 지난 8일 오전 10시.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시낫홀의 300석은 이미 외신기자들로 가득 찼고, 단상에는 각 방송사들의 마이크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연신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발표순간을 기다리는 에후드 네쩌르 교수의 얼굴도 사뭇 상기된 표정이었다.
세기의 고고학 발굴로 기록될 헤롯 왕의 무덤 발굴 발표를 위해 네쩌르 교수가 마이크 앞에 서자 사진기자들과 일단 내용을 좀 듣자는 취재기자들간의 공방으로 몇 번이나 회견이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헤롯 왕의 무덤이 세계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간 수십 년간 여러 고고학자들이 그렇게도 찾고자 노력했지만, 헤로디움에 묻혔다는 역사기록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날, 네쩌르 히브리대 교수가 1972년부터 약 35년 간의 발굴 끝에 드디어 헤롯 왕의 무덤을 발견했음을 발표한 것이다. 헤롯 왕의 무덤이 발견된 곳은 베들레헴 앞 유다 광야로 헤롯 왕이 그의 생전에 인공으로 쌓아올린 요새 및 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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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브리대 고고학과 에후드 네쩨르 교수가 기자회견에서 헤롯 왕의 무덤발굴 사실을 발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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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근 |
| 아기 예수 죽이려고 했던, 바로 그 사람
헤롯 왕은 2000년 전 멀리서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에서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우려해 당시 2살 이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장본인이다. 헤롯은 25세때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어 약 34년간 유대땅을 다스린 왕이었다.
헤롯 왕이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기독교 탄생 시기에 정치적으로 핵심에 있었던 인물로 그의 실존이 바로 기독교 탄생의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헤롯 왕은 건축광으로도 유명한데, 예루살렘 '통곡의 벽'· 맛사다·가이사랴·여리고 겨울궁전·헤브론 막벨라굴 그리고 유대광야에 쌓아올린 헤로디움 등 현재 이스라엘의 주요 유적들이 그에 의해 건축된 것이다.
서기 1세기 역사가였던 요세프스는 헤롯 왕이 장례식 후 그의 요새인 헤로디움에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위해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의 무덤 발굴을 시도했으나 그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현재까지는 산 정상의 궁전과 산 아래의 교회유적이 그의 무덤으로 유력시되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네쩌르 교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의 발굴 과정을 10여장의 자료사진을 보여주며 하나 하나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 헤롯 왕의 무덤으로 단정한 여러 증거자료를 제시했다.
자신의 원래 전공은 건축학이라는 점을 강조한 네쩨르 교수는 발굴된 무덤의 규모나 수준이 왕이 아니면 건축될 수 없는 대규모 석관묘라는 것을 힘주어 말했다. 특히 그가 헤롯 대왕의 석관 일부로 제시한 문양이나 장식은 요르단 페트라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것으로 당시 왕이나 최고위층 인사의 무덤에 썼던 것과 같은 형태라는 주장이다.
헤롯의 이름이 적히 묘비나 그와 관련된 직접적인 유물 등 헤롯 왕의 무덤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는 것은 숙제이지만, 외신들은 네쩨르 교수의 주장을 반론의 여지 없이 세기의 고고학 발굴 성과로 타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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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로디움을 하늘에서 본 모습. 헤롯 왕이 쌓아 만든 요새이자 왕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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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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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로디움 전경. 산 중턱에 무덤 발굴 현장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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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근 기자 |
| 산 중턱에서 무덤이 발견된 까닭은
기자회견 다음날, 기자는 헤롯 대왕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헤로디움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에서 분리장벽으로 둘러싸인 베들레헴으로 들어가 다시 유다광야 쪽으로 달려 자동차로 약 1시간 만에 헤로디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마침 발굴을 지휘하고 있는 에후드 네쩌르 교수를 만났다. 네쩌르 교수는 지금까지 헤롯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는 두 장소에 대한 의심을 갖고 새로 지목한 현재의 장소를 발굴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선 산 정상 왕궁의 동쪽 탑 아래 무덤이 있었을 가능성인데, 왕궁 안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좀 믿기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무덤을 성 밖이나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두는데, 하물며 왕궁 안에 무덤을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후에 유대인 반란시 훼손될 것을 우려해 육중한 탑 아래 묻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간 헤롯 왕의 무덤으로 주장되어온 또다른 장소는 헤로디움 산 아래 교회 유적 안이다. 그러나 이 또한 결정적인 단서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1년 전부터 지금 무덤이 발견된 산 중턱을 집중 조사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첫 발굴에서 위치를 잘못 짚기는 했지만, 산 중턱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성벽축대를 발견했어요. 이것은 분명히 자연적인 산과 그 위로 인공으로 쌓아올린 경계였으며, 이 성벽이 무덤을 보호하는 축대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쩨르 교수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리고 지난 3주전에 고급스런 석관 일부를 발견했다. 네쩌르 교수는 기자에게 석관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 봐요! 헤로디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훌륭한 석조기술입니다. 이것은 당시 최고위층 석관으로 우리가 찾고 있던 헤롯 왕의 무덤이란 확신이 듭니다."
1972년 이래 약 35년간의 발굴 노력 끝에 에후드 네쩌르 교수가 얻은 성과이다.
성서 고고학의 최대 미스터리 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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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세프스의 기록과 발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헤롯 왕의 장례행렬 루트과 무덤의 위치(네쩌르 교수 재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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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근 |
| 헤롯 왕의 무덤은 서기 135년 전쟁 때 유대인들이 이같이 훼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헤롯의 어머니는 원래 에돔의 이방 여인으로 집안이 개종을 통해 유대인이 되었고, 로마의 도움으로 유대인의 왕이 되었다.
따라서 헤롯은 언제든지 유대인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해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으며 유사를 대비해 헤로디움을 비롯해 맛사다·여리고·마케루스 등 여러 개의 피신할 수 있는 요새를 만들었다.
사후에 자신의 무덤이 유대인들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한 장소를 찾던 중 헤로디움 중턱에 만들었을 것이라는 게 네쩌르 교수의 추측이다. 헤로디움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이 무덤은 분명 예루살렘쪽 을 향하고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추가 발굴을 거쳐 이 유적이 헤롯 대왕의 무덤으로 최종 확인될 경우 중동 지역의 고고학 발굴 사상 사해 두루마리 발견 이후 최대의 발견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 성서 고고학계에 최대의 미스터리가 풀린 것이란 의미를 부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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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신사[바른신앙을 찾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 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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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2000년만에 발굴된 헤롯 왕의 무덤. 헤롯 왕은 기독교가 태동하던 시대에 정치적으로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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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근 |
| 지난 8일 오전 10시.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시낫홀의 300석은 이미 외신기자들로 가득 찼고, 단상에는 각 방송사들의 마이크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연신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발표순간을 기다리는 에후드 네쩌르 교수의 얼굴도 사뭇 상기된 표정이었다.
세기의 고고학 발굴로 기록될 헤롯 왕의 무덤 발굴 발표를 위해 네쩌르 교수가 마이크 앞에 서자 사진기자들과 일단 내용을 좀 듣자는 취재기자들간의 공방으로 몇 번이나 회견이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헤롯 왕의 무덤이 세계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간 수십 년간 여러 고고학자들이 그렇게도 찾고자 노력했지만, 헤로디움에 묻혔다는 역사기록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날, 네쩌르 히브리대 교수가 1972년부터 약 35년 간의 발굴 끝에 드디어 헤롯 왕의 무덤을 발견했음을 발표한 것이다. 헤롯 왕의 무덤이 발견된 곳은 베들레헴 앞 유다 광야로 헤롯 왕이 그의 생전에 인공으로 쌓아올린 요새 및 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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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브리대 고고학과 에후드 네쩨르 교수가 기자회견에서 헤롯 왕의 무덤발굴 사실을 발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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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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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왕은 2000년 전 멀리서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에서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우려해 당시 2살 이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장본인이다. 헤롯은 25세때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어 약 34년간 유대땅을 다스린 왕이었다.
헤롯 왕이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기독교 탄생 시기에 정치적으로 핵심에 있었던 인물로 그의 실존이 바로 기독교 탄생의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헤롯 왕은 건축광으로도 유명한데, 예루살렘 '통곡의 벽'· 맛사다·가이사랴·여리고 겨울궁전·헤브론 막벨라굴 그리고 유대광야에 쌓아올린 헤로디움 등 현재 이스라엘의 주요 유적들이 그에 의해 건축된 것이다.
서기 1세기 역사가였던 요세프스는 헤롯 왕이 장례식 후 그의 요새인 헤로디움에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위해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의 무덤 발굴을 시도했으나 그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현재까지는 산 정상의 궁전과 산 아래의 교회유적이 그의 무덤으로 유력시되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네쩌르 교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의 발굴 과정을 10여장의 자료사진을 보여주며 하나 하나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 헤롯 왕의 무덤으로 단정한 여러 증거자료를 제시했다.
자신의 원래 전공은 건축학이라는 점을 강조한 네쩨르 교수는 발굴된 무덤의 규모나 수준이 왕이 아니면 건축될 수 없는 대규모 석관묘라는 것을 힘주어 말했다. 특히 그가 헤롯 대왕의 석관 일부로 제시한 문양이나 장식은 요르단 페트라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것으로 당시 왕이나 최고위층 인사의 무덤에 썼던 것과 같은 형태라는 주장이다.
헤롯의 이름이 적히 묘비나 그와 관련된 직접적인 유물 등 헤롯 왕의 무덤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는 것은 숙제이지만, 외신들은 네쩨르 교수의 주장을 반론의 여지 없이 세기의 고고학 발굴 성과로 타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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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로디움을 하늘에서 본 모습. 헤롯 왕이 쌓아 만든 요새이자 왕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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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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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로디움 전경. 산 중턱에 무덤 발굴 현장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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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근 기자 |
| 산 중턱에서 무덤이 발견된 까닭은
기자회견 다음날, 기자는 헤롯 대왕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헤로디움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에서 분리장벽으로 둘러싸인 베들레헴으로 들어가 다시 유다광야 쪽으로 달려 자동차로 약 1시간 만에 헤로디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마침 발굴을 지휘하고 있는 에후드 네쩌르 교수를 만났다. 네쩌르 교수는 지금까지 헤롯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는 두 장소에 대한 의심을 갖고 새로 지목한 현재의 장소를 발굴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선 산 정상 왕궁의 동쪽 탑 아래 무덤이 있었을 가능성인데, 왕궁 안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좀 믿기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무덤을 성 밖이나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두는데, 하물며 왕궁 안에 무덤을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후에 유대인 반란시 훼손될 것을 우려해 육중한 탑 아래 묻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간 헤롯 왕의 무덤으로 주장되어온 또다른 장소는 헤로디움 산 아래 교회 유적 안이다. 그러나 이 또한 결정적인 단서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1년 전부터 지금 무덤이 발견된 산 중턱을 집중 조사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첫 발굴에서 위치를 잘못 짚기는 했지만, 산 중턱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성벽축대를 발견했어요. 이것은 분명히 자연적인 산과 그 위로 인공으로 쌓아올린 경계였으며, 이 성벽이 무덤을 보호하는 축대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쩨르 교수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리고 지난 3주전에 고급스런 석관 일부를 발견했다. 네쩌르 교수는 기자에게 석관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 봐요! 헤로디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훌륭한 석조기술입니다. 이것은 당시 최고위층 석관으로 우리가 찾고 있던 헤롯 왕의 무덤이란 확신이 듭니다."
1972년 이래 약 35년간의 발굴 노력 끝에 에후드 네쩌르 교수가 얻은 성과이다.
성서 고고학의 최대 미스터리 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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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세프스의 기록과 발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헤롯 왕의 장례행렬 루트과 무덤의 위치(네쩌르 교수 재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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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근 |
| 헤롯 왕의 무덤은 서기 135년 전쟁 때 유대인들이 이같이 훼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헤롯의 어머니는 원래 에돔의 이방 여인으로 집안이 개종을 통해 유대인이 되었고, 로마의 도움으로 유대인의 왕이 되었다.
따라서 헤롯은 언제든지 유대인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해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으며 유사를 대비해 헤로디움을 비롯해 맛사다·여리고·마케루스 등 여러 개의 피신할 수 있는 요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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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신사[바른신앙을 찾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 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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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6:17-18 전(前)에 헤롯이 자기(自己)가 동생(同生)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든고(故)로 이 여자(女子)를 위(爲)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獄)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同生)의 아내를 취(娶)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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