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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

[스크랩] 헤롯 왕

작성자곽성자|작성시간13.06.29|조회수75 목록 댓글 0

헤롯


헤롯왕 (대략 기원전 73년 탄생, 왕 재임기간 기원전 37-4)

등장

 기원전 63년 로마장군 폼페이우스는 로마에게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페르시아-메소포타미아,시리아-이집트를 연결하는 군사도로 한 가운데 위치, 소아시아와 이집트

 사이의 교두보, 동방의 이방인들을 막는 방어벽 역할), 이 지역을 행정구역 시리아에 편입시킵니다

 (주요도시 안디옥, 다메섹). 그리고 이스라엘을 동화시킬 목적으로 헬레니즘문화를 이 지역에 유입시킵니다.
 기원전 44전 로마황제 시저가 살해되는 어수선한 틈을 타서 팔레스티나에서는 로마의 총독

 (Prokurator) 힐칸 2세가 살해되고 (기원전 43년) 귀족들과 장군들 사이에 알력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러다 장군 헤롯이 권력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하스모니아 왕가의 아들 안티고누스가 시리아

 파더왕의 도움으로 헤롯을 몰아냅니다.

로마로 망명과 귀국

그는 로마로 도망가서 거기서 자기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안토니우스와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유다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어냅니다. 헤롯은 귀국하여 기원전 39-37에 걸쳐

안티고누스와 전쟁을 하고 승리, 그를 안디옥에서 처형합니다.
헤롯은 이스라엘로 귀화한 이두메인 출신입니다. 따라서 전통성문제가 그에게는 항상

걸림돌이였습니다. 이를 확보하기 위해 37년 하스모니아 왕가의 딸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45%의 사두개 제사장들을 처단하고 권력을 공고히 합니다.
그는 로마 권력을 뒤에 업은 왕이여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시를 재건하고 국가재정을 튼튼히합니다.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63-기원후 14)

악티움해전에서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승리하였을 때, 패한 안토니우스와

교분이 있었던 헤롯은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살아있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옥타비아누스로부터 호감을 사 오히려 갈릴리 주위의 몇 도시을 상으로 받습니다.

치세 2기 (기원전 27-13)

그는 로마권력의 앞잡이, 헬라문화의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헬라, 로마 건축술로

전 영토를 치장합니다. 사마리아를 재건하고 지중해 연안의 많은 도시에 헬라건축물을 세웁니다.

가이사랴 항구도 그리고 후에 마지막 로마항거 거점이였던 맛사다 요새도 이때 만들어집니다.

그는 에스라 느헤미아 시대에 재건되었다가 중간시대에 다시 폐허가 된 성전을 두 배나 더 크게

재건하는 대역사에 착수합니다 (기원전 20년에 시작-기원후 63년 봉헌. 참고 요2,20에는 46년

걸렸다고 나옵니다). 심지어 로도스에 아폴로 성전을 짓고 아텐과 스파르타에 기념물을 세웁니다.
친로마적인 이런 정책 때문에 디아스포라 (본국에 살지 않는, 지금으로 말하면 교포)

유대인들이 더욱 많이 로마제국의 전 지역으로 퍼질 수 있게 됩니다. 이들은 나중에 간접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데 기여를 합니다 (바울이나 유대전도자들은 주로 이들의 회당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치세 3기 (기원전 13-4)


이때는 후사문제 때문에 피로 얼룩진 정치가 연출됩니다

 (마 2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다 죽임).

그는 10명의 부인을 통해 많은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아들들이 늙은 자신을 왕위에서 몰아낼까봐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래서 첫 두아들을 기원전 7년에, 셋째 아들은 자기가 죽기 5일 전에 처형합니다.

헤롯사후

그가 죽고나자 팔레스타인 영토는 그의 세 아들에의해 나뉘어져 통치됩니다.

 1) 아켈라오 (왕 Ethnarchen 마 2,22): 그는 아버지와 성격이 비슷했습니다. 유다와 사마리아

    땅을 다스렸는데 주민들의 심한 반발을 받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청원을 해, 결국 그는 추방됩니다 (기원후 6년).

    이후 이지역은 로마의 총독에 (Prokurator) 의해 다스려집니다 (참고 빌라도 총독 기원후 26-36).
  2) 헤로데스 안티파스 (분봉왕 Tetrarch): 그는 갈릴리와 베뢰아지역을 (요단과 사해의 동편) 다스립니다.

    성경에는 그냥 헤롯이라고 나옵니다.

    그가 세례요한을 죽였고 나중에 빌라도에게 붇잡혀 있던 예수와 잠시 대면합니다. (눅 23,6이하).

    그는 헬라문화에 경사되어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신앙과 종교적 감정을 해치지 않고 조용히 통치했습니다.

    기원후 39년에 왕위에서 찬탈당합니다.
  3) 빌립 (분봉왕): 요단동편의 북부지역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예수의 사건와 상관없는 구역에 있었습니다.

 

                                  - 자료제공: 조광호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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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왕

 


워터하우스 - Mariamne Leaving the Judgement Seat of Herod


헤롯은 '영웅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틴과 그 근접 지역을 B.C. 55-A.D.93년까지

다스린 왕조의 왕들을 통틀어 헤롯이라고 합니다

 

그 중 대 헤롯(헤로데)이라 불리는 헤롯대왕은 로마 제국이  임명한 유대의 왕(BC 37~4 재위)이다.
그는 많은 성채·수로·극장·공공건축물을 세웠으며, 전반적으로 유대를 번영시켰지만 말년에는 정치적

헤롯은는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안티파트로스는 에돔 사람(사해와 아카바 만 중간

지역에 사는 아랍인)이었다. 안티파트로스는 큰 영향력과 부를 지녔고, 당시 부흥하던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

(요르단 강 남서부) 출신의 귀족 딸과 혼인하여 그 영향력과 부를 더욱 증가시켰다. 그러므로 헤롯은 비록

유대인 행세를 했으나 부계와 모계 둘 다 아랍 혈통이었다.

 

BC 63년 폼페이우스(BC 106~48)가 팔레스타인을 침공했을 때 안티파트로스는 그의 원정을 지원함으로써 로마와 오랜 관계를

 시작했고, 로마로부터 그와 헤롯은 혜택을 받았다. 6년 뒤 헤롯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헤롯 가문을 좋아하여 BC 47년 안티파트로스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는데,

 그 신분은 헤롯 및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계승되었다. 같은 해 헤롯은 아버지로부터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받아 정치무대에

나섰다. 6년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갈릴리 분봉왕으로 삼았다. BC 40년 파르티아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고

 내전이 일어나자 헤롯은 로마로 도망갔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유대 왕으로 임명하고 그 지역을 충분히 장악할 만한 군대를

 주었다.

 

BC 37년 헤롯은 36세의 나이에 감히 아무도 도전하지 못하는 유대의 통치자가 되어 32년 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다.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아내 도리스와 이혼하고 그녀를 아들과 함께 궁 밖으로 쫓아낸 뒤 하스몬 왕가의 공주

마리암과 재혼했다. 그가 재혼한 목적은 유대 민족의 지도자이며 제사장 가문인 하스몬가(家)와의 불화를 끝내려는

것이었지만, 결혼한 뒤 마리암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두 집정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카이사르의 권력을 계승하기 위해 갈등이 생기자, 헤롯은 친구 안토니우스를

 지원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정부이며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을 이용해

헤롯의 가장 좋은 영토를 많이 차지했어도 안토니우스를 계속 지원했다.

 

BC 31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가 최종적으로 패배한 뒤 헤롯은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자기가 누구 편을 들었는지

솔직히 고백했다. 이전에 로마에서 헤롯을 만난 적이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로마가 원하는 대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릴 유일한 인물임을 알고서 그를 다시 왕으로 인정해주었으며, 또한 클레오파트라가 차지했던 땅을 헤롯에게 돌려주었다.

헤롯은 아우구스투스의 대행정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손자와

증손자의 이름을 지었다.


                                           B. Britten - 악티움 해전


 

황제와 대행정관은 헤로데에게 국빈으로 로마를 방문할 기회를 주어 그는 다시 이탈리아를 2번 방문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에게 키프로스 구리 광산 감독권을 주고 이익의 절반을 할당해주었다. 그는 BC 22, BC 20년에 헤롯의 영토를 2배로

늘려주었기 때문에 헤로데의 영토는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요르단 강 동편, 즉 오늘날 요르단 왕국의 일부지역과 레바논 남부,

시리아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 나바테아 왕국도 헤롯에게 줄 뜻이 있었지만, 당시 그 왕국의 권좌가 공석이었을 당시

 헤롯은 정신과 육체 모두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롯은 자기 영토에 수많은 요새와 화려한 도시들을 건설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두 도시는 주로 이교적인 새 도시로 하나는

요파(야파)와 하이파 사이의 해안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항구도시 카이사레아로, 훗날 로마령 팔레스타인의 수도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고대 사마리아의 옛 터에 세워진 세바스테였다. 그는 예루살렘에는 안토니우스 요새와 웅장한 왕궁

(그 일부가 성채 안에 남아 있음)을 지었다(→ 예루살렘 성전).

안토니우스 요새는 그 일부가 오늘날 비아 돌로로사(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걸어간 길)에 세워진 수도원들 밑에 남아 있다.

그가 지은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웅장한 것은 성전으로서, 그는 그 전체를 다시 건축했다. 넓이가 14ha에 이르는 성전 바깥

뜰은 오늘날도 '알 하람 아시 샤리프'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는 또한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로도스 등 외국

도시들과 많은 성읍들을 장식했다. 헤롯은 올림픽 경기의 의장이 되어 그것을 후원했다.

 

자기 왕국에서는 유대교의 주도적인 파벌인 바리사이파를 거스르는 것을 우려하여 마음껏 자기를 과시하지 못했다.

바리사이파는 그를 외국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언제나 그와 대립해 있었다. 헤롯은 자기에게 감사해 마지않는 이교도들의

후원자로서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바깥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의 보호자로도 자임했고,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 군주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불행하게도 헤롯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뚜렷하게 어둡고 잔인한 성격을 드러냈다. 더구나 그의 정서불안은 가정 내부에서

계속된 음모와 술수 때문에 더욱 깊어졌다.

마리암을 깊이 사랑한 그는 질투심이 일어나면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헤롯의 누이 살로메

(그녀의 증조카, 즉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는 다른 인물)는 남을 쉽게 의심하는 그의 성격을 교묘하게 이용해 헤롯이

아내를 미워하게 만들어 두 사람의 관계를 깨뜨렸다. 결국 헤롯은 마리암과 그녀를 통해 낳은 두 아들, 그녀의 오빠와 할아버지,

그녀의 어머니를 모두 살해했는데, 마리암의 어머니 또한 야비한 사람으로서 살로메의 음모를 종종 돕곤 했다.

헤로데는 도리스와 마리암 외에도 8명의 아내가 더 있었으며, 그 가운데 6명의 아내를 통해서 14명의 자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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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벤스 - 영아 대학살

헤롯은 말년에 동맥경화증을 앓았다. 그는 1차례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이웃나라인 나바테아와도 분쟁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신망을 잃고 말았다. 그는 큰 통증에 시달렸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또 3번이나 후계자 문제에 자기의 뜻을 번복하다가, 왕위를 물려주던 맏아들 안티파테르를 살해했다. 그가 죽기 직전에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일은 전적으로 그가 빠져 있던 혼란과 일치한다.

헤로데는 1차례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한 뒤에 죽었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재가를

받는 것을 전제로 한 뒤 자기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나누어주어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왕이 되도록 했고,

빌립보와 안티파스에게는 분봉왕들로서 나머지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도록 했다.

S.H. Perowne 글

출처:인터넷로고스 선교회

헤롯 왕과 그 집안 이야기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헤롯이 여럿 등장합니다. 헤롯이 분명히 죽었는데 또 헤롯이 나타납니다.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에 피난갔던 예수님 가족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재판을 받을 때 또 헤롯이 등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헤롯을 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안 얘기지만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헤롯, 아버지 헤롯, 아들 헤롯, 손자 헤롯을 좀 구분해 봅니다.  

헤롯이 신약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입니다. 이 때 등장하는 헤롯을 헤롯1세, 혹은 헤롯대왕이라고 부릅니다. 아들 헤롯하고 구분하기 위해 대왕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헤롯 왕인데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름만 알고 지나가면 헤롯 안티파터 2세입니다.  

헤롯대왕(헤롯1세)
이 헤롯이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입니다. 동방박사들을 통해 유대인의 왕이 나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살 미만의 아이들을 다 죽인 바로 그 왕입니다. 헤롯은 유대인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46년에 걸쳐 성전을 지은 바로 그 헤롯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 헤롯을 피해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살다 헤롯이 죽은 후에 돌아와 나사렛에서 살았습니다.



이 집안이 좀 복잡합니다. 부인을 여럿두다 보니 생긴 일입니다. 첨부한 가계도를 보기만 해도 복잡함이 느껴지지요. 가계도 위에서 세번째 줄이 헤롯대왕의 부인들입니다. 혹 가계도가 잘 안보이면 가계도 위에 커서를 놓고 한 번 더 클릭하시면 조금 더 큰 가계도를 볼 수 있습니다. 헤롯대왕이 죽으며 나라를 셋으로 나눠 아들들에게 줍니다. 그렇게 유언을 하고 죽습니다. 당시 유다나라가 로마의 식민지 통치아래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 유언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세 아들에게 나눠준 걸 나라라고 하기 보다는 지방 몇을 나눠줬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나라 강원도보다 조금 큰 유대나라 전체를 셋으로 나눠줬으니 말입니다.

아들 헤롯
헤롯의 첫째 아들 이름은 헤롯 아켈라오, 둘째는 헤롯 안디바, 셋째는 헤롯 빌립(빌립보)2세입니다. 아버지 헤롯이 이들에게 나눠준 땅은 지도에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첫째 아들 헤롯 아켈라오
헤롯 아켈라오는 헤롯대왕이 직접 통치하던 유대와 사마리아 및 이두매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는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 계승을 반대하는 유대인 3000명을 학살하는 등 헤롯대왕과 같은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다가 결국 A.D.6년 아우구스투스의 재판을 받고 고울(Gaul) 지방으로 추방됨으로써 그의 통치는 짧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영토는 총독(빌라도)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둘째 아들 헤롯 안디바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이 헤롯이 예수님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헤롯은 아우구스투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디베료(Tiberius)에게 자기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갈릴리 호수 서편에 디베랴(Tiberias)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바다라고 부르는 것은 이 도시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헤롯은 가계도에서 보는 것 처럼 그의 이복 형제였던 헤롯 빌립(가이사랴 빌립보를 통치한 빌립과 구별하기 위해 빌립 l세라고 부름)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재혼합니다. 그걸 책망한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이 일로 세례요한은 구속되고 결국 참수형을 당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이 헤롯을 분봉왕 헤롯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우'라고 부른 헤롯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 헤롯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셋째 아들 헤롯 빌립
헤롯 빌립에게 할당된 지역인 아우라니티스, 트라고니티스, 이두래는 팔레스타인의 북쪽과 동쪽에 있습니다. 이 빌립은 누가복음 3장에 '이두래와 두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한 번 언급됩니다. 빌립도 그가 통치하던 지역에서 몇 개의 중요한 건축사업을 실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 도시의 건설입니다. 빌립도 가계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조카였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합니다.  

손자 헤롯
손자 헤롯의 이름은 아그립바 1세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또 등장합니다. 헤롯왕이 교회를 핍박합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입니다.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베드로도 잡아 가둡니다. 천사가 베드로를 그 옥에서 구출하여 내지요. 이 때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대왕의 손자헤롯입니다. 그의 이름은 헤롯 아그립바1세입니다. 가계도에서 보는 것 처럼 손자 헤롯왕은 위에 등장하는 세 분봉왕 중 한 왕의 아들이 아닙니다. 가계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헤롯대왕의 또 다른 아들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다. 이 헤롯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함으로 충(蟲)이 먹어 죽었습니다. 손자 헤롯 아그립바1세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이어 왕이 됩니다. 딸 이름은 버니게(행25:13)와 드루실라입니다. 드루실라는 로마 총독인 벨릭스의 세번째 아내가 됩니다(행24:24).

증손자 헤롯
증손자 헤롯의 이름은 아그립바2세입니다. 사도행전 25장에 가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아그립바왕이 바로 증손자 헤롯입니다. 헤롯 아그립바2세입니다.

좀 정리가 되시나요?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스크랩] 헤롯왕의 요새| ♣ 해외 성지
로사리아 조회 36 | 07.07.30 09:01 http://cafe.daum.net/biblesky/RMg/151

[헤롯왕의 요새]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칠고 건조한 유태지역에 헤롯왕에 의해 지어진 궁전 헤로디온이 헤롯왕에 의해 지어진 궁전 헤로디온이 언덕에 우뚝 서 있다. 헤롯왕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웅장한 건물중의 하나인 이 성채는 B.C. 1세기 중,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언덕의 정상으로부터 황폐하나 인상적인 파노라마를 당신은 만끽할 수 있고 유태사막에서 사해, 베들레헴 그리고 예루살렘을 거치며 구경할 수 있다. 그 성은 헤롯의 난공불락의 피난처중 하나였으며 실제의 독수리둥지와 흡사하다. 벽과 타워, 모자이크 조각들, 커다란 물통, 목욕과 연회를 뜻하는 건물, 이런 것들은 원래 건물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곳에 헤롯왕이 묻혔다고 전해진다.

헤롯왕의 요새가 있는 언덕 성경적 조화와 전원 분위기
(그림:위대한 헤롯왕의 요새가 있는 언덕의 모습, 둥그런 양치기의 땅의 성경적 조화와 전원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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