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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의 마을]

유현숙 시인의 시

작성자이만섭|작성시간26.06.06|조회수10 목록 댓글 0

 

가을볕

 

 

              유현숙

 

 

 

볕이 참 좋다, 내일 뭐 해?

 

들도 산도 붉다

올래?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 빵빵 채웠어

해거름 둑길 끝까지 달리자

 

산촌 가을은 짧아

산집은 쉬 어두워지고 추워

저녁엔 장작 패서

난로에 불 지피며 불멍 어때?

 

건너와

입석이라도 타고

 

새벽 숲이 가장 숲다운 것 알지?

빨간 장화 신고

노란 꽃 더미 건너

여뀌도 고마리도 이슬 젖은 들길 걷자

 

좋아하는 커피 내려놓을게

꼭 와.

 

 

 

겨울산

 

 

      유현숙

 

 

산어귀에 까마귀 떼 하늘 검게 웁니다

 

산새들은 볕 든 풀밭으로 낮게 들고

 

나뭇가지는 빠른 붓질에 볼긋볼긋 농밀합니다

 

그늘새김한 계곡으로 방금 대한大寒이 건너가고

 

쓸어 모은 삭풍에

 

기다리던 발자국들 지워집니다

 

산모퉁이 저기

 

수묵의 여백 위를 건너오는 그대

 

비로소 완벽한 서경입니다

 

한 권 서책을 두루마리로 펼쳐놓은

 

겨울산은 겨울시입니다

 

 

 

푸른 꽃*

 

 

             유현숙

 

 

사월에 P를 만났다

작약꽃 터진 꽃그늘에서 흘러내린 흰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있었다

 

오래 못 보며 지내왔던 무궁무궁한 사람

 

늦은 점심으로 쌀국수 먹으며

면발 몇 오라기 남은 국물마저 통째로 들고 마셨다

들고 마신 플라스틱 면기에는

그가 살고

내가 살아온

국숫발 같은 이야기가 가닥가닥 화해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겨울 못 뜰의 푸른 꽃

오가며 자주 지나쳤던 그 꽃

 

산동네 지하방에서 만났던 곰팡이꽃

벽을 기어오르던 푸른 절망과 공생하던 이는

벼린 칼 하나와

바람의 무게를 잴 천칭을 쥐고

마틸테를 찾아 떠난 하인리히처럼

강호를 떠돈다

 

말言의 고삐를 쥐고

낭만의 나막신을 신고

안개 숲을 지나 지금은 어디까지 걷고 있을까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의 섬 너머에 닿아

눈먼 시간들 그늘만 남기고

유폐된 신화 한 책 펼쳐 놓았을까

 

작약꽃 터진 꽃그늘에서

사월에 P를 만났다

 

 

*노발리스

 

 

 

저녁 소리

 

 

                유현숙

 

 

능선을 태우고

잠든 물바닥을 반쯤 베어 무는 소리

 

깊은숨 몰아쉬며

뒷산 어깨로 해 떨어지는 소리

 

화약 터지듯 번진 놀빛이 지상에 남기는

애절한 장송곡 한 소리

 

풀들이 울며

어둠이 짙은 쪽으로 몸 기우는 소리

 

그림자 남기고 떠난 기적汽笛이

바지랑대 끝에 매달려 흔들리는 소리

 

일별도 없이 어스름 눈길이

말 삼키는 소리

 

짧은 처마 아래서 녹슨 별을 닦으며

놋숟갈로 제 속을 긁는 소리

 

그 소리들에 귀 털며 발돋움하는

 

내 숨소리.

 

 

-시집 『내일 뭐 해』 2026. 5

 

 

유현숙 / 경남 거창 출생.  2003년 『문학 선』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서해와 동침하다』『외치는 혀』『몹시』『내일 뭐 해』eBook『우짜꼬!』『고독한 여름』『숲, 스케치 』등.  2017년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 문예바다 소설 신인상을 수상하여 지금은 시와 소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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