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 / 박일만
이것은 불의 뜨거움 속에서
순함을 다스려 우려낸 몸이다.
저잣거리를 떠도는, 다분히
천박한 태생이었으나
짙푸른 분노를 두드려
날카로움을 얻었기에
그 품성이 매사에 도리를 다하는
촌부의 둥근 갈비뼈를 닮았다.
그러하니 암흑 속에 몸을 던져
세상을 세우고자 하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없도다, 오늘밤
한 시대의 어둠을 삭혀 횃불을 높이 드는
거짓 선지자의 눈빛이여, 이것은
침묵을 섬기는 몸.
짙푸른 분노를 두들겨
날카로움을 안으로 숨긴
지혜의 둥근 덩어리.
<현대시> 2005 하반기 시인추천작품상 당선작
아내의 거울, 혹은 렌즈/박일만
마주치지 않아도 속내를 훤히 아는 저 맑음 속의 섬뜩함은 내가
뜬구름 헛바람에 이 산, 저 도시로 쏠려 다닐 때에도 그저 잔잔한
물일 뿐이었다 나는 새소리에 아침을 맞지만 압력솥 악다구니에
신호를 맞추는 그녀, 구겨진 근심을 아침마다 다리면서도 촉수는
조용히 나를 읽고 있다 도마 위에 내 얼굴을 올려놓고 다소 짓이
기기도 하겠지 멍빛인 몸과 맘 늦은 귀가에도 비 샐까 눈 샐까 연
잎 같은 믿음 펴주지만 물밑에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얼마나
들여다보았을까 얼마나 유심히 살폈으면 두 눈이 넷 되고 볼록 되
고 오목으로 변했을까 낡아 칠 벗겨진 내 풍경 안에서 수은가루
덧칠하며 관찰했을까 남루한 거울은 단지 오래된 신념일 뿐일텐
데, 아내는 응시하고 그 앞에 서 있는 나는 늘 위태롭고-
뿌리도 가끔은 날고 싶다/박일만
1
외롭지 않아, 늘 네가 있어
너의 몸에선 깊고 푸른 강이 흐르고
숲이 흐르고 바다가 일렁였어
아주 오래도록 어둠속을 걸어가는 동안에도
미세한 핏줄들은 키보다 더 크고 넓은
꿈을 실어나르며 만개하는 웃음 넉넉했어
너의 그 기쁜 힘은 열매 맺는 찬란함이었어
푸른 바람이 부는 일도
흙속에서 네 목숨이 생산하는
맑고 큰 그늘로부터 시작됨을,
뜨거운 혈맥들의 선명한 자유임을
알겠어
2
뿌리도 저마다 길을 간다. 지하 심연 물줄기거나 지상 가득한 길이거나.
부드러운 흙 살을 밀치고 푸른 하늘 날으던 원시림의 기억 찾아,
눈빛 반짝이며 툭, 툭 젖은 발 털며 저 들판과 강을 지나
하늘의 계단참으로 당당히 길을 간다.
바람을 끌어 모으던 손가락들의 완고한 힘줄과 껍질을 뚫고 오르던
가슴 아릿한 기억까지도 한가로운 기쁨이고 싶은,
아! 사랑이고 싶은, 뿌리 ― 네가 일궈 논
그 무궁한 숲 속에서 꽃이 피고 향기가 날릴 때까지
아주 오래도록 땅속의 이정표가 되는, 네가 있어 늘 어둠이 밝다.
― 믿음직한 바위 얼싸안고 벽 혹은 나무를 타고 오르는 청결한 꿈들.
빛이거나 어둠이거나 날마다 날마다 먼길 달려가는 뿌리도 가끔은 하늘을 날고 싶다.
소금밭 은유(隱喩)/박일만
썩지 않을 구석이 남아있을까
방부된 이성과 감성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다리 놓을 수 있을까
안으로 단단해진 심장에 뿌리내리고
들판에 흐드러진 미세한 꽃
물줄기 찾아 떠돌던 바람의
푸른 빛깔도 머무는구나
부식의 상처 덮어주며 어깨도 받쳐주는
중심이 서릿발로 피는 꽃, 피는 자리
정수리를 밝히며 햇빛을 삼투하는
백색의 순결함이 등고선을 이루었다
비상하는 자세다
흙살을 가장한 구린 구석도 이 곳에선
무채색을 띌지도 몰라
바닷새가 까딱대며 집착을 물고 간 거기
가장 가벼운 최적을 향해 익어가는 소금더미
짜게 혹은 깊게 폐부에 와 닿는
나도 이제 썩지 않고 절여질 수 있을지
흰 꽃잎 번지는 의식이 솟구친다
체중만큼 환하게 속으로 핀다
모퉁이에서 피다, 지다/박일만
검정 칠을 하고도 희게 웃는 사내,
목발 세워 둔 한 쪽 발을 길게 밖으로 걸렸다
희망을 켜 놓은 듯 백열등 밝혀 둔 좁은공간
피곤한 구두를 벗어 수선을 맡기는 저녁 무렵
골목은 늘 객관적이다
바닥까지 검정물든 손을 탁, 탁 치며, 이제 그만 해야죠
그만둬야죠,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초로의 사내
십 수 년인 듯 굵어진 손마디가 고집스럽다
내 구두는 이제 항해를 끝낸 폐선처럼 어둡다
좀처럼 광택이 살아나지 못할 거죽으로 찌그러져,
능동적이지 못한 내 성품을 이웃듯 손 빠른 사내
헤진 일상을 기우고 봉긋한 광택을 생산한다
허리춤을 꾸욱 찌르고 견고한 실로 혈관을
벌겋게 온몸을 지지고 닦아 환하게 빛을 복사해 낸다
속내를 보이진 않지만 손에 친친 광목을 감으며 말하겠지
자, 다시 한 번 가면을 쓰고 살아 보세요
그래도 세상은 적당히 가리면 살만 하잖아요
구석에 앉아 왁스에 취해 밖을 바라본다
이 거리에서 오래오래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들과 나
그만 둬야지, 이제 정말 쉬어야지 하면서도
끝끝내 꽃피고 싶은 무화과나무 척박하게 웃는 거리 모퉁이
천천히 천천히 아주 객관적으로 어두워진다
개관적인 달/박일만
1
저문 당신의 정원은 관습처럼 교교하다.
서늘한 눈빛으로 당신의 정원을 흔드는,
나는, 객관적인 달이다.
망연한 허공 그 중심을 듣고 서서
은하계와 내통하는 은밀함으로
오늘밤 당신과 불온한 인연을 맺고 싶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무채색의 들판을 키우고,
수심 가득한 책을 읽는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성호를 긋듯,
마, 리, 아
2
당신, 내 안에 있군요.
무수한 시간 속에 나를 저장하는군요.
쿵쾅거리는 심장의 격렬함,
마음속 깊이
희미한 의식에 전깃불이 들어오면서
붉은 피가 흐르네요.
오래 전에 꾸었던 꿈의 한 장면이
스, 크, 랩, 되, 네, 요.
내가 당신 안에 있어도 될까요?
추억 속에 깨알 같은 시간을 슬어 놓고····
풍선미학/박일만
속살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 난다
이를 테면
내 가슴을 찌르던 장미빛이라던가
햇살 꽉 찬 빛구슬이라던가
먼발치에서도 환한 꽃사태라던가
살아오는 동안 눈치 채지 못했다
팽팽하던 꿈 접고 물렁해진 풍선
속정을 다 내주고 빗살무늬 새긴 몸
아내를 안아보면 남모를 공간이 출렁인다
몸을 빠져나간 바람은 이제 무엇으로 남는가
앙상한 섬 하나 오롯하다
무한대천 세상에서 인연 닿아 살 맞대고
어제와 오늘이 수없이 교차하는 지상의 날들을
살다 갈 우리
헤아려 보면 무엇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데
사람살이가 저 혼자 빛나는 것은 아니어서
서로 부축하며 몸 부비고 사는 것이어서
주름진 몸 거기 뼈 마디마디에
웃음과 회한과 시끄런 강물소리 뒤범벅이다
헛헛해진 생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 바람, 바람
잡아라!
주소지/박일만
연대의식이 담장과 담장을 잇는
거기에 있습니다
끝간데 없이 다리 뻗고
무리들과 어깨 견주며
지적도 위 한 점으로 있습니다
싹을 틔운 점
줄기 뻗고 날개 펴고 식솔 매달고
발목 붙잡힌 나무되어 갑니다
낡아가는 집 한 채에도
익숙하게 마음 붙이고 살아가는
생의 좌표
우편물이 오차없이 배달되고
꽃바람도 이웃인양 들고 납니다
외출에서 돌아와도 흔적 쉽게 발견하듯
한 곳에 머무를수록 깊어지는 나의 뿌리
땅속 물길까지도 훤히 가늠하는,
참으로
관습적인 행보로 서 있습니다
다운타운/박일만
허리에 링거병, 어깨끼리 손 걸쳤다
깁스, 목발에 묶여 오가도 못하는 처지다
계절도 기울고 입동 부근을 배회하며
무거운 시간을 터는 나무들, 후두둑
돌입하는 찬바람에 뼈마디가 삐걱인다
노을빛에 데어 얼굴 또한 붉다
어디를 향해 행군하는지 모를 자동차들
손가락 접어가며 셈하다가
그도 저도 겨운지 한길에 다리 뻗고 기댄 나무들
시절은 쾌속으로 겨울을 향해 발진 중이다
아뜩한 귀착지를 찾아 가는 나무들은 허허롭다
몸을 공중에 매단 간판이
시침 뚝 떼고 미간을 흔들어대는 역 부근,
이쯤에서 버거운 짐을 부려야 하리
난처한 자세로 도심을 관통하는 고가도로 밑이든
쥐들과 소통하는 지하역 어디쯤도 상관없는 투로
삼삼오오 모여드는 검고 깡마른 나무들
더러는 때절은 배낭을
더러는 계절을 앞지른 누더기로 모여든다
상처없이 사는 법을 끝내 익히지 못 한 채
버린 만큼 얻는다는 말씀도 터득하지 못한 채
한 계절을 덮고 지낼 온기를 찾아 꾸역 꾸역
하초를 탕진한 목발 짚고 모여든다
더 깊고 어두워진다
위대한 그늘/박일만
갈라파고스 군도에는 수많은 새들이 살고 있지
거처하는 새들 중 세 척 장신 얼간이새는
제 스스로 그늘은 만든다지
망망대해 속 군도는 동물들의 배설물에
민둥산이 허다하다는데
새끼 얼간이새는 어미가 만드는 그늘에서 큰다지
허나 어미에게는 기댈 나무 한 그루, 그늘이 없어
햇빛, 달빛에 번갈아 쏘여 민머리가 되었다는데
엘리뇨로 반년은 우기이고, 반년은 건기라는데
모진 더위와 추위도 반복되어 종잡을 수 없다지
그래도 얼간이새의 그늘은 변함없이 안온하여
인간처럼 염천과 한천을 가려줄 집이 없어도
얼간이가 되지 않는다지 얼간이새는,
늘 어미가 새끼를 위해
한발이나 두발로 종일 나무그늘이 되어 준다지
태양과 바다가 시시때때 싸움을 거는 변화무쌍함에도
아랑곳없이
민둥산이 되어가는 어미 얼간이새들이 있어
거기에서는 시간도 기꺼이 천천히 그늘을 지운다지
지구의 체적/박일만
사방천지 피는 꽃의 체중만큼
세상도 무거워진다고 여기시겠지만
실상은 꽃의 수만큼 가벼워지는 것이리라
예컨대,
나비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만큼
지구가 가벼워지는 이치이듯
꽃들도 일제히 날개를 펴는 연유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나무가 몸 밖으로 속살을 밀어 꽃을 만든 후
꽃잎들이 수천수만 지구의 날개가 되어
공중에서 너울, 너울대기 때문이리라
주검을 손에 들어본 일 있으신가
사람이 명을 다하는 때 일순 가벼워졌다가
본래대로 돌아오거나 서 너 배 무거워진다던가
그러므로 상여꾼들은 혼자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던가
그러하나 실상은 변함없다 여기지 마시라
묻거나 태우거나 무게는 같다고 하지마시라
몸속에 꽉차있던 혼령이 빠져나가면
그만큼 가벼워지게 되는 것이라던가
살아있을 적에 우리 몸을 지배하던 영혼이
중천이든, 천상이든 날아가고 나면
지구도 몸이 한층 가벼워지는 것이리라
꽃도 영혼도 매한가지 지구의 흔적일지라
그녀의 정전기 / 박일만
오월 풀빛 먹은 몸이다, 초록말
잎사귀 위에 푸른 힘줄 짜넣던 , 초록말
태양이 더움 몸 달구는 맑은 오후, 초록말
나뭇가지들 흠칫 뼈가 자란다, 초록말
가슴을 톡, 치면 맑은 이슬 구를듯 팽팽한, 초록말
계절이 온 몸에 푸른빛을 칠하고, 초록말
한가롭게 달아오르는 햇빛을 머금는다, 초록말
바야흐로 순결도 숲으로 빛난다, 초록말
곁눈질로 마음뻗던 뭇나무들 또한, 초록말
내뿜는 정전기에 푸르르 놀라, 초록말
한 발짝 물러서는, 초록말
빛으로 짜여진 잎맥들 아름답다, 초록말
외진 몸들 서로 어깨 나누며 사느 숲 속, 초록말
태양을 살라먹은 온기들로 넘실댄다, 초록말
견고한 담장을 뜨거운 시선으로 밀치고, 초록말
심장을 향해 직선으로 돌진해 와, 초록말
묵정밭에 쟁기질을 해대는 루르른 관능, 초록말
태양의 유적을 여는 비밀 열쇠를, 초록말
가득가득 품고있는, 초록말
무궁한 창고같은 그녀, 초록말
길들여지지 않는 도발적 색채가 쏘아대는 , 초록말
볼륨이 산 끝까지 뛰어 오르곤 한다, 초록말
그녀에게 감전되는 오월은 행복하다, 초록말
득음 / 박일만
얼마냐는 물음에 대꾸 없다
시끄러운 속내 씻으러 찾아 온 청계사
봄 산도 묵은 계절 벗어내고 있다
산문 주차장 한 쪽
중년의 남루한 여자
낡은 트럭 짐칸에 차려진 국화빵 기계
또다시 가격을 물어도 미소만 보내온다
볼 붉은 꽃잎이 내 가슴을 파고든다
오천원 지폐를 내밀자 그제서야 손으로 가리킨다
만국기처럼 화려하지는 않게 천정에 달린 가격표
“한 봉지에 이천원”
비로소 알아차리고 계산이 건네진다
산쪽에서 비둘기 소리 들린다, 듣는지 마는지
묵언수행도 저처럼 슬퍼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산천대천 번잡한 세상 가운데 태어나
한 생을 선천성 침묵으로 태어나
왁자지껄한 뭇 사람들을 피해
멀찌감치 한 구석 빌려 살아가고 있다
저렇게 말없이 통하는 절 한 채도 있는데
손짓, 몸짓만으로 세상을 읽는 음색도 있는데
쉿!
봄 산이 꿈틀대며 기지개 켜는 소리 들린다
단추 /박일만
구름무늬 몸 속에 새긴 맑은 단추 한 알, 파계를 모르는 둥근 습성으로
은하계를 건너간다 달 같기도 하고 마음 한켠에 담아둔 얼굴 같기도 한,
닮은 것이 많은 몸 굴러간다 맨 몸으로 구멍 드나들며 하루를 조였다 놓
았다 시간을 묶었다 풀었다 하는, 낙천성이 온 몸에 곁 붙어 몸 만하게
입벌려 웃고 사는 녀석, 알같은 몸으로 은하계 속 누비며 산다 일정한 궤
도로 구르며 제 몸을 지키는 것이 꿴 것인양 보이지만 불법체류를 일삼
는 다수의 주장에 불참하며 굴러간다 구르며 우주에 담긴 추상적인 문양
을 몸 속에 채색한다 맑은 얼굴에 빛살 넣고 달려가는 둥근 몸을 바람이
회오리치며 뒤따른다 다리도 없는, 몸이 온통 다리인, 둥글게 걷는 다리
가 리듬을 타고 커브를 부드럽게 질주하며 몸만한 외눈으로 세상을 정조
준 하는 놀라운 태생, 자전하는 상념에도 무늬가 피는 녀석, 파란 은하계
를 찢고 하얀 꼬리를 남기는 제트기도 아닌 몸이 구를 때마다 출렁이는
불립문자가 된다 일정한 몸체의 공중돌기, 본질은 꿴 것 같지만 실상은
구르는 것 탈색을 모르는 몸빛으로 살아간다 반환점도 없이 도는 둥근
지느러미가 세상빛을 조용히 닮아가는 단추 한 알, 멈춰 있어도 바삐 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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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시인 전북 장수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詩) 수료 2005 「현대시」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