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가을 (외 2편)
노향림
가난한 새들은 더 추운 겨울로 가기 위해
새끼들에게 먼저 배고픔을 가르친다.
제 품속에 품고 날마다 물어다 주던 먹이를 끊고
대신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킨다.
누렇게 풀들이 마른 고수부지엔 지친
새들이 오종종 모여들고 머뭇대는데
어미 새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음울한 울음소리만이
높은 빌딩 유리창에 부딪쳐 아찔하게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행여 무리를 빠져나온 무녀리들 방향 없이
빈터에서라도 낙오되어 길 잃을까
드문드문
따듯한 입김 어린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그 지시등 따라 창 밑까지 선회하다가
있는 힘 다해 지상에서 가장 멀리 치솟아 뜬
허공에 무수히 박힌 까만 충치 자국 같은 비행체들
캄캄한 하늘을 날며 멀리로 이사 가는
철새들이 보이는 가을날의 연속이다.
푸른 편지
작은 창문을 돋보기처럼 매단 늙은 우체국을 지나가면 청마가 생각난다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창유리 앞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는 청마 고층 빌딩들이 라면 상자처럼 차곡차곡 쌓여있는 머나먼 하늘나라 우체국에서 그는 오늘도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쓰고 있을까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라고 우체국 옆 기찻길로 화물열차가 납작하게 기어간다 푯말도 없는 단선 철길이 인생이라는 경적을 울리며 온몸으로 굴러간다 덜커덩거리며 제 갈 길 가는 바퀴 소리에 너는 가슴 아리다고 했지 명도 낮은 누런 햇살 든 반지하에서 너는 통점 문자 박힌 그리움을 시집처럼 펼쳐놓고 있겠다 미처 부치지 못한 푸른 편지를 들고 별들은 창문에 밤늦도록 찰랑이며 떠 있겠다
시인의 본적지
나는 다른 하늘을 꿈꾼다.
전생은 어느 인디언 마을의 원주민
본적은 움막을 틀었던 이억만년 전의
그 나무 화석이 있는 곳
얼음과 눈 덮인 언덕은 나의 요새였다.
뽀얀 어금니만한 나뭇잎이 늦겨울부터 얼굴을 내미는
그 마을은 시인의 마을이라 해도 좋다.
한번도 먼 마을에는 여행 간 적 없이
오로지 야성의 본능대로 도자기에 무늬를 새기듯
그것이 시인 줄 모르고 시를 새겼다.
추위와 혹독한 얼음 바위를 뚫어
내가 만든 요새엔 한땀 한땀 혈흔처럼
시의 무늬 새겨져 있다.
이따금 나는 둘레를 돌며 도자기에 새길
천연 글감 얻으러 나귀 타고 마실 간다.
동면에서 마악 깨어나 튕겨져 오른
오소리의 통통 튀는 울음소리
눈 위의 얼음새꽃
얼음장 속 집을 짓는 벌새 날갯짓 소리
눈꽃 속 가녀린 흰 잎 흔드는 은방울꽃 찾아간다.
이억만년 전의 둥지에서
도자기에 새길 천연 이미지 얻으러 나왔다가
사시사철 흰 어금니만한 잎새들
눈처럼 반짝이는 본적지 언덕에서
잠깐잠깐 나는 꿈꾸곤 한다.
⸺시집 『푸른 편지』 (2019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