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를 지나는 구름의 시간 (외 1편)/ 조수일

작성자김명|작성시간22.03.12|조회수27 목록 댓글 0

모과를 지나는 구름의 시간 (외 1편)

 

조수일

 

 

 

어제의 시간을 모과의 오후라 부를래요

홀로 폭삭, 익어버렸으니까요

그림자를 벗어 놓고 떠나온 남녘의 어느 바닷가였어요 간간히 드나드는 바람이 유일한 여행자, 쓸쓸히 낡아갈 일만 남은 저물녘에 덧씌우는 당신의 방식을 힘껏 비켜서고 싶었어요 시야 밖, 홀로 영글어 오래오래 매달린 가을볕의 샛노란 꿈이 나였으면

타인의 시간으로 비행을 일삼는 나는 더는 꽃일 수 없는 야생일까요 수직의 통증처럼 우르르 떨어지는 낙과가 당신일까요 갈변이다가 파묻혀 벌레 슬어가는 최후일까 봐 훌쩍도 거렸어요 높이 걸려 염탐을 일삼는 당신은 꿈의 꼭짓점, 끝내 발굴되지 않는 향기로운 꽃무덤이고 싶었던 나는 이유 없이 줄곧 어두워가는 그늘이었으므로, 암각이었으므로 그 점에 이어져 있었어요

뚝뚝, 파발처럼 나를 선회하는 한 무리 구름은 오랜 내일이니까요

 

 

 

세족*을 읽다

 

 

 

얼굴 본 적 없는 미소년이
여린 새순 같은 무릎을 낮추고
허릴 굽혀 발을 씻긴다
얼굴 가득 살얼음이
고산의 슬픈 흔적처럼 거무스레 스며 있다
소년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수줍음이 얼굴 가득 일렁인다
찰방찰방 물과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잠시
굳어버리곤 하는 공기를 희석시킬 뿐이다
천장 가득 흐릿한 조명이 지루한 듯 눈을 껌뻑인다
불빛 아래 물속,
꼼지락거리는 손놀림이
등 붉은 물고기 꼬리지느러미를 닮았다고 문득, 생각한다
바다의 어류를 본 적 없는 소년은
어디서 물고기의 몸놀림을 대대로 답습한 것일까
먼 옛날 유대 땅,
무릎 굽혀 발을 씻긴 눈 깊은 한 사내를 떠올린다
생각 없이 누운 나와의 괴리는 얼마쯤일까

너무 멀리 밀려와 버린,
너무 많이 잊어버리고 살아 온 내가
고산의 살얼음처럼 뒤척인 밤이다

 

 

*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섬김의 저세를 일컫는다.

 

 

 

⸺시집 『모과를 지나는 구름의 시간』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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