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의 「내심」 감상 / 김기택
내심
이병률 (1967~ )
지하도 걷다가 어느 화원 앞이었다
화원이라는 말이 오랜만이어서 걸음이 느슨해지고
잘생긴 나무 화분 있어 멈추었다
희박해지는 공기 탓이었나
금방이라도 모든 죄를 고백할 듯 창백하구나, 사람들
그 나무 이름이 인도 벵갈고무나무였지
그때 한 검은 사내가 나무 앞에 우뚝 선다
나는 조금 떨어져 서 있었기에
그에게 충분한 자리를 내줄 수 있었다
터번만 두르지 않았을 뿐
누가 봐도 그는 인도에서 가져온 오래된 침묵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넓은 나무 이파리를 만지고 만지더니
가던 길을 간다
그러고는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그도 나무도
와도 너무 와버렸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 나무의 이름은 벵갈고무나무랬지
이번엔 나무가 사내 쪽으로 몸을 튼다
나무는 황금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내의 몸에서 풍겼던 냄새 뭉치로 나무는 잠시 축축하다
햇빛이 드는 것처럼 지하도는 잠시 정신이 든다
나는 내심 벵갈의 어디에 있다
지하도 걷다가
화원 앞이었다가
내심 나는 화분에 심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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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와서도 벵갈고무나무는 인도의 공기와 침묵을 주위에 퍼뜨리고 있구나. 화분 주위에 인도의 기운을 퍼뜨리며 살고 있구나. 낯선 땅에서 적응하고 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머나먼 거리를 견디고 있지만, 인도의 기품을 잃지 않고 있구나. 그 힘이 한국에 온 인도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구나. 나무도 인도인도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내심’에서 오래오래 침묵으로 대화하고 있구나. 화분만한 공간에서 인도의 역사만큼 길고도 오랜 이야기가 흐르고 있구나. 한국의 공기와 인도의 침묵도 함께 어우러지고 있구나.
김기택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