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울 알레르기
“낯이 설어 낯이 설어 미치겠”(「고대가요`remix」, 109)고, “익숙해익숙해미치겠어”(「거울에게」, 118).1 이래도 미치겠고 저래도 미치겠다는 것. 이렇게 ‘거울 알레르기’가 있다면 거울을 보는 데 “강심장”이 필요하기도 하겠다. 그런데 보아하니 강심장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그녀는 왜 자꾸 거울 앞으로 자진해 다가가서는 번번이 괴로워하는 것일까.
황성희에게 거울은 앨리스식 환상으로 통하는 문도 아니고, 물론 윤동주 식의 성찰적 매체도 아닐뿐더러, 이상 식의 ‘또 다른 나’의 무대도 아니다. 황성희의 거울상은 대체로 매우 직설적인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별도의 형상화가 그닥 필요치 않다. 어쨌든 그녀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거울상의 재현이 아니라 거울상을 마주한 자의 ‘감각’과 그 ‘감각에 대한 사유’를 밀고 나가는 데 있다. 그러니까 그녀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거울상을 ‘낯설게/익숙하게’ 느낄 때, 이 느낌 안에는 어떤 비밀스런 전언이 숨겨져 있는가. 왜 나는 이 느낌이 미치도록 불편한가. 이제 나의 불편함은 말해지지 않았던(않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한다.
황성희는 시집 자서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거울을 보면 말문이 막혔다.”라고 적고 있다. 거울은 그녀의 말문을 막는다. 거울(거울상)은, ‘나’는 ‘나’에 관해서 ‘다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모르는 나, 모른다는 의미에서 부재하는 나의 존재를 환기한다. 그러므로 이 거울의 명령은 어느 철학자의 말마따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걸까.
그러나 황성희가 받는 거울의 명령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자, 감각으로 체험해 보라’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리는 지금부터 거울 앞에서 느끼는 ‘낯섦’에 대해서 그리고 ‘익숙함’에 대해서 못 본 척 “그냥 지나”(「시체 놀이」, 24)치지 않고 그 느낌에 다가가 눈을 비벼 보려고 한다. 거울 앞에서 느끼는 이상한 ‘낯섦’과 참을 수 없는 ‘익숙함’이라는 감각적 신호에 응답하면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사태를 필히 고려해야 한다. 그 한 가지는, “거울을 볼 때는 절대 내 얼굴이 내 얼굴인 척해야 한다”(「신격문(新檄文)」, 59)는 거울의 계율을 정립하고 실천하는 주체에 대하여. 또 한 가지는, 이런, 이런, 어느 날 거울이 내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에다 대고/ 저렇듯 물걸레질을 하는 여자”(「신기한 목격담, 55)가 있다는 것. 이 투명한 얼굴은 귀신의 것인가, 존재감이 없는 그냥 우리들 무명인(無名人)의 것인가. 거의 언제나 황성희의 관심은 거울 속이 아니라 거울 밖이다. 그러니까 이 투명한 얼굴은 거울의 속임수나 환상이 아니라 거울 밖에서 물걸레질을 하고 있는 어느 여자의 존재론에 직설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거울 앞을 출발점으로 삼은 이 글은 거울 밖에서 거울 밖으로 떠난다. 거울상은 거울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울 바깥에서 ‘화면 조정’ 시간을 거쳐서 제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거울상을 보고 기겁했다 할지라도, 그를 놀라게 한 대상이 거울의 못된 장난이나 괴기한 환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2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다
이 글에서 살펴보려는 첫 번째 반응은 이렇다. 나는 내가 “낯이 설어 낯이 설어 미치겠는데”, 이것은 도솔가나 혜성가를 지어 부르며 호들갑을 떨게 한 하늘의 변괴보다 더 괴상한 “변괴”란다. 「고대가요 remix」의 이런 구절, “몇십 년째 세 들어 있으면서도 미치게 낯선/ 내 몸만 한 변괴가 어디 또 있을라구요.” 그렇다면 나의 ‘낯(얼굴)’에 무슨 변괴가 발생한 건가. 내 안의 타자가, 복수의 ‘나들’이, 이크, 얼굴이라는 장소에 또 대거 출몰한 건가. 내가 괴물로 변신 중이기라도 한 건가. 이건 그런 경우들이 아니다. 황성희가 이 ‘낯섦’의 신호를 받고 부르는 노래에 일단 주목해 보자. “사실 구지가는 이럴 때나 한 곡조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운을 떼면서.
거북아 거북아.
한 번도 얼굴 본 적 없는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문 같은
그 머리를 제발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널 찾아
평생에 평생에 평생에 찾아
소문만이라도 구워 먹고 말겠다.
노래하는 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북이’를 애타게 불러 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문 같은 머리’를 내밀라고 위협한다. 나의 낯이, 나의 몸이 변괴처럼 낯설 때, 이 ‘변괴’에 호응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문 같은 것’이다. 그것은 부재로서, 공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없는 것’으로서 ‘있는 것’이다. 거울상 자체가 낯선 것이 아니다. 내게 미치게 낯선 것은 차라리 거울상에서 탈락된 것들, 그러니까 거울상이 결여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내 얼굴이 내 얼굴인 척”(「신격문(新檄文)」, 59)하느라고, 내가 나인 척하느라고, 어른-주체가 되느라고 깎여 나간 조각들이랄 수 있다. 거울상에 결코 출현하지 않는 그 부재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문득 그런 순간이 있다.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의 최대치인 ‘평생’을 걸고서 암만 찾아 헤맨대도 결코 일치할 수 없는 것, 기껏 잡았다고 했더니 ‘소문’ 같은 것일 뿐인 이 빈 자리, 이 공백으로서의 실재(the Real)에 대한 시인의 괴로운 감각은 때때로 철없는 귀신의 것 같기도 하다. 달밤에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이런 귀신 놀이를 하곤 하지 않았는가. “너는 아직도 내가 황성희로 보이니?” 그렇다고 황성희의 시에 등장하는 귀신들이 모두 이런 차원에서 출연하는 건 아니다. 귀신이 되는(혹은 귀신과 흡사해지는) 또 다른 방식에 대해서는 뒤쪽에서 잠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나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듯이, 어머니와 어머니 사이에, 집과 집 사이에도 치명적인 간격이 있다. 표상(representation) 가능한 나(어머니, 집)와 표상 불가능한 나(어머니, 집)는 언제나 함께 있으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다. 이 간격에 대한 황성희의 민감한 지각은 이런 이상한 구절들을 쓰게 한다. 밑줄을 그으며 베껴 쓰면, “어제는 백화점에서 어머니와 새 임부복을 샀지만/ 난 아직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자연분만을 꿈꾸는 임산부의 태교」, 99) “거실의 불을 끄는 것은 여전히 쉽기도 하겠지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데 말입니다.”(「그렇고 그런 해프닝」, 135)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어머니나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집”(「앨리스네 집」, 12)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북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문 같은/ 그 머리”와 같이 부재의 방식으로만 그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미치게 낯선 내 몸이라는 변괴’를 응시하면서 구지가를 한 곡조 뽑았던 자에게는 또 이런 주문이 들려온다. 이상한 구지가가 울려 퍼졌던 바로 그 「고대가요 remix」라는 시에서 일어나는 사태다. 이 주문이 통한다면 내 몸의 변괴는 그만 사라질 텐데…….
아버지는 해만 뜨면 전화를 해
내가니아비다내가니아비다 주문을 외고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란 건지
어머니는 해만 지면 전화를 해
내가니어미다내가니어미다 주문을 외고.
‘아버지는 아버지다’, ‘어머니는 어머니다’,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이것은 우리의 진리다. 그러나 황성희에게 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와 어머니는 차라리 동음이의어에 가깝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다. ‘아닌 어머니’는 어머니 표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잃어버린 조각들의 모음이랄 수 있다. 이 표상 불가능한 어머니에 호응하는 것이 거울에 출석하지 않는 ‘나’라고 하겠다. ‘나는 나다’라는 거울의 동어반복을 믿지 않을 때(거울의 말에 속지 않을 때), 나는 갑자기 “살아 있는 변괴”처럼 지독히도 낯설어진다.
표상 불가능한 어머니 X, 황성희 식으로 표현하면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어머니’는 가령 임산부의 몸 안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로선 결코 볼 수 없는 바깥에 속하는 어머니의 얼굴과 같은 위상에 놓인다. 유머러스한 임산부 황성희는 “왜 이런 인테리어를 하셨는지는/ 나도 어머니께 여쭤 봐야 하는데”, 백화점에서 함께 쇼핑한 어머니 옆에서 천진하게 “난 아직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물어볼 데가 없단다.(「자연분만을 꿈꾸는 임산부의 태교」, 98~99) 어머니 X는 현재(백화점 임부복 코너에 함께 서 있는 여인)에 고스란히 환원되지 않는 절대적인 과거에 속한다.
그러한 ‘과거’를 황성희는 종종 ‘기원’이라고 표현한다. 황성희 시집에서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듯이 ‘기원은 기원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표상된 ‘기원’은 현재적인 욕망의 손들로 “리폼”(「검은 바지의 전설」, 36)된 것들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과거’로서의 기원은 그 자체로 ‘다시’ 나타날 수 없다. 황성희가 자주 연출하는 ‘뒤죽박죽 역사-놀이’2 또한 역사로 표상된 과거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에서 비롯된다. 단적으로 ‘역사’는 “이승복스러운 그 무엇”(「탤런트 C의 무명 탈출기」, 30∼31)처럼 표상되는 것이며,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외우는 것이다. 황성희가 골몰하고 있는 이른바 ‘역사-놀이’는 풍자를 노리고 있는 놀이판이 아니다. 그녀가 연출하는 ‘역사-놀이’는 우리의 무의식 차원의 기만을 들쑤셔 놓음으로써 이데올로기의 숨겨진 지반을 해체하는 효과를 낸다. 이데올로기와 상관적인 우리의 무의식적인 차원이란 황성희의 문장으로 보면 이런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실은 외우는) 여자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역사가 자신이 외운 모든 공책이라는 것만 기억하지 못한다.’(「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 41)3 역사적인 지식에 관계하는 암기라는 외부성이 기억이라는 내재성으로 전도됨으로써 역사는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차원에서 유통된다. 이것은 바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 아닌가. 이에 해당하는 지젝의 문장,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그 참여자들의 일정한 무지를 통해서만 그 존재론적 일관성이 보장되는 종류의 현실이다. 만일 우리가 사회적 현실이 진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된다면’ 그 현실은 와해되어 버릴 것.”4 황성희는 우리의 현실적인 앎이 근본적인 무지(망각)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이를 뒤집어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적인 무지(망각)가 근본적인 앎을 누르고 있다는 것. 그녀는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실은 외우는 여자는 2000년 자신이 시간의 벌집 속을 이미 스쳐 간 한 줌 바람이라는 것만 기억하지 사실은 외우지 못한다.”
기억만 하고 외우지 못하는 그것, 바로 그것은 주체의 표상 불가능한 어느 지점을 가리킨다. 지나간 바람처럼 ‘다시 (그러쥐어) 나타나게(re-presentation)’ 할 수 없는 것들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시적 분투를 황성희의 시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매우 집요하게 실천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시의 욕망을 어느 시인은 “불행한 쾌락”5이라고도 했는데, 이에 대해 황성희도 착종된 감정을 품고 있다. 그녀의 양가감정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시가 「후레자식의 꿈」이다. 이 시에서도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다’.
“어머니가 죽었다. 참 잘 죽었다”고 말했다가 뺨을 얻어맞은 “후레자식”에게는 할 말이 있다. “어머니가 죽었다.”의 어머니는 당신들이 표상하는 어머니가 아니다. 내가 가리키는 “이 어머니, 저 어머니, 그 어머니 등등 어머니들께서는” 이를테면 실재계에서 귀환한 실재의 조각들이랄 수 있다. 표상 불가능한 이들은 “제발 잘 돌아가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머니는 어머니다’라고 동어반복하면서 후레자식이라고 욕하고 뺨을 때리고 “자빠뜨리고 돌아가며 발길질을” 하고 “발가벗기고 인두를” 달구고,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 그러한 나(후레자식)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에 대한 징벌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만 간다. 그런데 징벌의 강도가 최대치에 도달하는 클라이맥스에서 반전처럼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뒤집힌다. 우선 이 모든 사태가 꿈의 내용이라는 게 명백해진다. 그리고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응징을 가하던 자가 알고 보니 나였다는 것. 또 그리고…….
아, 살이 타는 이 냄새가 정말 꿈이 아니라면 인두를 들이대는 저 손이 정말이지 내 손이 아니라면 아, 얼마나 좋을까요? 제발 잘 돌아가신 어머니.
이 끔찍한 사태가 꿈이 아니기를, 진짜이기를 바란다는 것. 그러니까 어머니의 죽음을 기뻐한 나는 끔찍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 그렇다면 나는 어머니의 상징적인 죽음을 진정 축도하는 자인가, 제 몸에 매질을 하며 애도하는 자인가. 상징 기호인 언어로 표상할 수 없는 어머니는 ‘제발 잘 돌아가셔야’ 하는 존재이면서 ‘제발 잘 돌아오셔야’ 하는 존재다. 나는 이래도 미치겠고 저래도 미치겠다. “낯이 설어 낯이 설어 미치겠”고, “익숙해익숙해미치겠”다.
3 What time is it now?
그렇다고 시간을 미행하며 소일할 줄은 설마 몰랐지. 그래도 시를 쓰겠다는 건 도가 지나쳐. What time is it now? 에나 또박또박 대답하는 눈 뜬 장님으로는 아무래도 무리겠니? 행복은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닌데 말이지.
굚?「날마다 편히 잠드는 영희의 기술」에서
“What time is it now?”라고 묻는다면, 현재 시각은 (나도 깜박 속아 넘어가게) 내가 나인 척하는 ‘언제나 고마운 만우절’(「언제나 만우절 고마운」, 114)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자기기만이 “날마다 편히 잠드는 영희의 기술”이라는 거겠지. 그런데 문제가 있다. 황성희 시집의 ‘나’는 속지도 않고 속지도 못한다. 익숙한 삶의 질감이 가까운 “행복”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자기를 속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결정적으로 이 기만성 자체가 망각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무의식까지 철저히 속아야 한다. 그러나 ‘익숙해서 미치겠다’고 중얼거리는 이 여자는 자신의 ‘익숙함’을 깊은 데서 의심하는 존재이며, ‘완벽한 일상’과 ‘나의 정체성’에 개입하는 기만성을 이미 눈치채기 시작한 존재다. 황성희의 시편들에서 “익숙해익숙해미치겠어”라고 발작적으로 외치는 여자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어떤 삶에도 시시각각 속아 줄 준비가 되어 있다.”(「언제나 만우절 고마운」, 115)라고 차갑게 천명하는, 자기기만에 대한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김혜순은 황성희의 시집 「표4글」에서 “‘현재 시간’과 싸우는 여자들”을 환영했다. 김혜순이 간파한 대로, 황성희의 여자들이 싸워야 하는 ‘현재 시간’의 본질적인 속성은 “존재 망각”이다. 시적인 시간이 나와 나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는 사태를 함축하고 있다면, 황성희에게 있어서 ‘현재 시간’은 그 간격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변기 위에 앉아” 있는, “칼날 같은”(「화성에 있다는 물의 흔적에 관한 소문」, 88)그 순간이 “What time is it now?”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현재 시간’의 외설적인 본색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성희의 인물들은 이러한 시시각각의 ‘현재 시간’들로 구성되는 삶에 어떻게 대응(대항)하는가. 대체로 그녀들은 “등껍질 밖의 삶을 상상”하지 않는 “착한 곤충”(「정전에 대항하는 모범적 자세」, 126)을 연기(演技)해 낸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연기에 몰입하여 무아(無我)의 일치 상태에 좀처럼 빠져들지 못하고, ‘나 같은 나(나의 일관성, 정체성)’의 배역에서 종종 빠져나와 자신의 역할과 연기 자체에 대해 거리감과 혐오감을 느끼는 인물들이다. 그녀는 “거울을 볼 때는 절대 내 얼굴이 내 얼굴인 척해야 한다”는 거울의 계율을 정립하고 실천하는 주체다. 한 인간에게 주어진 생이라는 것이 “형광등이 켜졌다 꺼지는 것처럼 내 몸에/ 한 줄기 빛이 무심히/ 들어왔다 나갈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거짓말 같고 헛것 같은 인생에 적당히 거짓말로 장단을 맞추어 주자는 것이다. 이 ‘거짓말 전략’에 스스로 속을 수만 있다면 현실 순응적인 그녀들은 현실 ‘속’에서 그럭저럭 만족하고 고만고만 불평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갈 수 없는 곳은 궁금해하지 않”고, “죽음으로 시를 쓰지 않”고, “보이는 것만을 사랑하”는 착한 곤충의 모범적인 자세를 위태로운 자세로, 아이러니한 문젯거리로 만드는 것은 대체 뭔가. 문제는, “갈 수 없는 곳을 궁금해하지 않”는(“죽음으로 시를 쓰지 않”는, “보이는 것만을 사랑하”는) 척할 때, 동시에 나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갈 수 없는 곳을 궁금해하고 있다(죽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성희의 그녀들의 문제성을 이렇게 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시를 쓰겠다는 건 도가 지나쳐.”(「날마다 편히 잠드는 영희의 기술」, 117)
황성희의 시에는 정말이지 도가 지나쳐서 이상해 보이는 여자들이 여러 차례 출연한다. 그런 그녀들은 이 세계의 기만성에 화답하는 주체의 필요조건으로서의 거짓말 수준을 넘어서, 이 세계가 꾸며 낸 리얼리티의 범위를 훌쩍 초과하는(꿈의 말 혹은 광인의 말처럼 들리기도 하는) 거짓말의 과잉으로 세상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거나 불같이 격노하게 만든다. 화가 난 선생님 왈, “너 자꾸 거짓말 칠래.”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그러면서 “눈알을 모조리 뽑겠다” 위협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엉뚱하고 뻔뻔할 수 있다. “거짓말 아닌 세상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거짓말」, 102∼103), 자기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도 모르는(자기기만성을 망각한) 선생님 같은 존재야말로 그녀에겐 가소로울 따름. 그런 그녀 왈, “달력은 오늘을 노래하죠./ 하지만 난 속지 않고 굳세게 거짓말 쳐요.”(「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돌림노래」, 78) 이 ‘굳센 거짓말’은 ‘오늘(존재 망각의 현재 시간)’의 현실에 맞추는 거짓말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과 싸우는 거짓말이다. “굳세게 거짓말” 치는 그녀는 현실의 기만적인 구조를 혹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리얼리티라는 환영을 교란하고 부수는 전쟁 놀이에 한창 빠져 있다. 그녀의 지나친(황당무계하고 때로는 엽기적이기도 한) 거짓말은 아무도 기만하지 않는다. 이 거짓말은 거짓말(허구)이라는 전제를 자기에게도 또 상대에게도 은폐하려 들기는커녕 과시하기 때문에 기만적인 음침한 어둠이 깔리지 않으며 오히려 밝고 천진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때의 거짓말은 ‘작업’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깝다. 그녀가 “난 속지 않고 굳세게 거짓말 쳐요.”라고 외칠 때, 이 외침은 윤리적인 선언과 특이한 지점에서 교차한다.
황성희의 시에는 이와는 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상해진 여자들이 있다. ‘굳센 거짓말’로 ‘약한 거짓말’의 경계 밖으로 초과하는 여자들이 한편에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약한 거짓말’의 세계 ‘속’으로 지워지는 투명한 여자들이 귀신의 존재감같이 서려 있다. “아무도 여자를, 여자의 놀이를 아는 척하지 않는다.” 모두들 하나같이 그녀를 보지 못한 것처럼 “그냥 지나간다.”(「시체 놀이」, 24∼25) 이제 이 ‘투명한 여자’를 찾아보자.
이건 아무 데도 숨어 있지 않은 한 여자를 찾아내는 술래잡기야.
시행의 모든 나머지는 술래를 불러내는 주문쯤이라고나 할까.
1부터 12까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 있어.
유리는 깨졌고 오래전부터 시간이 흘러내리고 있지.
기억해, 이건 시간 속에서 익사한 아기의 배를 가르는 부검이 아니야.
주의 사항은 여자가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것.
이 텅텅 빈 문장 속에서조차 말이야.
명심해, 이건 여자는 아무 데도 숨어 있지 않다로 시작하는 시야.
굳이 클라이맥스를 찾자면
자신의 몸이 투명하다는 걸 여자가 모른다는 것 정도?
굚?「술래잡기의 비밀」에서
술래잡기는 ‘숨어 있는 자’와 ‘찾는 자’ 사이의 긴장감으로 이루어지는 놀이다. 그런데 “아무 데도 숨어 있지 않은 한 여자를 찾아내는 술래잡기”라니! 놀이에는 과제가 주어진다. 해결하기에 ‘적당한’ 어려움이 따르는 과제 말이다. 과제가 너무 쉬우면 놀이에 긴장과 흥미가 생기기 어렵고, 너무 어려우면 놀이의 쾌락은 짜증으로 변할 것이다. 숨어 있지 않은 자를 찾는 과제는 표면상(“이 텅텅빈 문장 속에서”) 너무 쉬워서 놀이가 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도 ‘아직’ ‘아무’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다. 너무 쉬워 보이는 과제가 기괴한 난제로 뒤바뀌는 이유는 시에 분명히 밝혀져 있듯 여자가 투명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여자의 ‘투명성’은 놀이의 비밀이면서 여자 자신도 모르는 비밀이다. 술래가 찾아야 하는 여자가 귀신인 건가? 어쩐지 이 술래잡기가 귀신 이야기처럼 으스스해진다. 그러나 이 시가 내놓는 시적 문제는 귀신같은 여자가 아무래도 귀신이 아닌 듯하다는 것. 여자는 귀신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 여자의 정체가 그냥 귀신이었다면 우리의 공포심은 ‘이야기’라는 층위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면 그뿐이겠지만, 이 여자는 아무래도 “101동 803호의 안방”이라는 구체적인 현실 공간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범상한 행위를 하고 있는, 우리가 ‘빤히’ 아는 여자에 불과한 것 같아서, 그녀의 투명성에 대한 의문은 나의 투명성에 대한 경악과 비명으로 이동한다. 여자를 귀신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타자의 시선은 그냥 통과하는 시선이다. 그것은 거꾸로 여자의 존재 방식이 자동적이며 습관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신기한 목격담」, 「투명한 정원」 같은 시에도 나오는 ‘투명한 여자’는 “익숙해익숙해미치겠어”라는 비명이 발원하는 이 세계의 ‘완벽한 안쪽’에 대한 시적 포착이자 표현이다. 그래서 “평범해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라고, 황성희는 시집 자서에 마지막 문장을 써넣었을 것이다.
이 세계의 소시민들은 ‘착한 곤충들’로 평범하게 살다 보니 개별성이 지워지고 이름이 지워지고 주소가 지워지고…… 몸까지 지워지는 건 아닐까. 이렇게 변명할 수 있다. “살다 보니 잊었다고 말할게.”(「변명」, 23) “그 투명한 이름”(「훙커우 공원의 고양이들」, 20), ‘투명한 주소’(「투명한 정원」, 49), ‘투명한 몸’(「눈」, 101),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신기한 목격담」, 55), “투명해진 나”(「누구 없어요」, 66). 나의 일상사는 “투명한 점묘”(「투명한 점묘」, 70). “누가 꺾어 가도 상관없고 언제 시들어도 상관없는/ 나, 정말 저 개나리 중 아무 개나리야?”(「정말로」, 69) ‘아무 개나리’는 “양B로 오인받아 도살당하는 양A”(「개나리들의 장래 희망」, 72). 양B와 양A 사이의 오인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그 둘은 ‘아무 개나리’이므로 구별할 필요조차 없이 교체 가능하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에다 대고/ 저렇듯 물걸레질을 하는 여자”의 동작이 어째서 내게 슬픔을 불러일으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작은 하염없으나 부질없는 헛수고다. 문제는 거울이 아니라 ‘나’다.
황성희의 ‘투명인간’은 이 세계 밖으로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 속으로 지워진 존재다. 그녀의 인물들이 이 세계 속에서 투명인간으로 지워지지 않기 위해 “생생한”(「탤런트 C의 얼굴 변천사」, 19) 사실감과 존재감을 획득하고자 애쓰는 모습은 매우 처절하면서도 우스꽝스럽다. 나의 생생한 얼굴과 존재감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실현할 것인가. 투명한 이름을 생생한 이름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시도들은 문자 그대로 ‘무명(無名) 탈출기’(「탤런트 C의 무명 탈출기」, 30)다. 무명(無名)에서 탈출하여 유명(有名)에 도달했을 때 얻게 되는 뚜렷한 이름을 황성희는 ‘역사’와 ‘스타’에서 찾는다. 그래서 투명인간의 공포 속에서 이렇게 외치는 여자들이 있다. “좀 더 역사 깊은 걸로 그려 줘. 누구한테든 단번에 들킬 수 있는 그런 거.”(「자해 공갈단편`굚`『그녀의 칙릿 도전기』 중에서」, 22) “우리 집을 구할 내가 준비된 스타라는 걸 제발 좀”(「네덜란드식 애국 소녀」, 35) 알아줘. “난 스타를 원해”(「난 스타를 원해」, 28).
그러나 ‘역사’와 ‘스타’야말로 실체가 모호한 것, 비어 있는 이미지가 아닌가. 그것은 타자의 욕망과 시선이 구성해 낸 것이며, ‘주체’가 ‘이미지’ 속으로 사라지는 방식이 아닌가. 그러나 황성희는 “칙릿 도전기”의 여자들을 결코 비난하거나 풍자하지 않는다. 그녀들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기도 하다는 걸 황성희는 감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우스꽝스럽고 슬프다. 일단, 그녀들로부터 ‘역사’와 ‘스타’는 너무나 멀리 동떨어져 있기 때문. ‘먼 거리’는 역사와 스타가 만들어지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가까이 가면 텅 비어 있는 그것. 물론 우리는 황성희의 시에서 무명 탈출기의 그녀들을 아이러니하게 만드는 또 다른 지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유포되는 “이승복스러운 그 무엇”(「탤런트 C의 무명 탈출기」, 30∼31), 낡은 이데올로기들, “국사 책의 단군 영정”, “시작에 관한 공공연한 왜곡들”, “9시 뉴스”(「난 스타를 원해」, 28∼29) 따위에 대한 불신과 혐오. 빛나는 스타가 머지않아 “지나간 이름”(「캐스팅 디렉터편`굚`『그녀의 칙릿 도전기』 중에서」, 33)이 된다는 것. 물론 이 환멸의 지점들은 뻔하다. 그렇지만 황성희가 “탤런트 C가 천의 얼굴이 가능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세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란 결코 쉽지 않아요.”라고 물어 올 때, 그녀의 블랙 유머와 아이러니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4 ‘고백’이 아니라 ‘고백의 문학사’다
‘나’를 생생하게 느끼게끔 해 주는 또 한 가지 비결을 황성희는 노골적으로 발설한다. 그것은 ‘상처’를 가지고 나의 존재를 눈에 띄게 표식하는 방식이다. “비명은 왜 질러, 아프지도 않다는데. 혹시 알아? 내가 아프다고 생각할지. 이 병실 앞을 누가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말이야.”(「자해 공갈단편`굚`『그녀의 칙릿 도전기』 중에서」, 22) 나의 존재감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기에 ‘상처’는 기왕이면 역사적인 것으로 분식되고 과장될 수 있으면 좋겠지. 그래서 이를테면, “국 냄비에 덴 자리를 총상이라고 속”(「탤런트 C의 무명 탈출기」, 30)이고, “메밀묵 따위를 만들다가” 덴 넓적다리를 “80년에 칼에 찔린 거”(「귀남이가 안 나오는 귀남이 이야기」, 50)라고 꾸며 대는 인물들이 출연한다. 이 세계 ‘안’에서 이 세계의 논리로, ‘속물적’으로 존재감을 맛보는 일은 이런 방식으로도 희화화된다.
웃고 말 일이 아니다. ‘주체’와 ‘상처’에 대한 황성희의 이 차가운 유머는 문학사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첫 시집에서 황성희가 보여 주는 ‘시간에 대한 미행’이 도달한 가장 문제적인 질문이 바로 거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딴 뜻은 없어요. 어쨌든 난 안 아프니까.
가끔씩 그 여자의 알몸을 뒤집어쓰고 시장을 볼 뿐이에요.
그 여자의 꿰맨 자국을 다들 얼마나 신기해한다고요.
그럼 난 무척 아팠다고 이야기해요.
언제 왜 얼마나 아팠는지 지어내다 보면
백 년 정도는 금방 흘러가 버리죠.
굚?「가장행렬」에서
황성희는 고백을 하지 않고 ‘고백의 문학사’를 연출한다. 원래 고백의 주체는 ‘아픈 자’였다. 그런데 「가장행렬」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듯이, 이 시의 ‘나’는 상처를 가장하는 자이며 고백을 연기하는 자다. 이 시에서 전제하고 있는 상처의 주인인 “그 여자”는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으며 심지어 죽음을 연상시키는 “허공”에 속해 있기도 하다. 나는 “그 여자”를 빌려 “언제 왜 얼마나 아팠는지 지어내”며 고백을 연기한다. ‘그 여자’는 고백의 주체로 애용되어 왔던 문학적인 캐릭터와 같은 존재다. 나는 ‘그 여자’를 변용하고 활용하여 “시장 사람들”에게 “무척 아팠다고 이야기”한다. 황성희가 “시장 사람들은 무엇에든 빨리 싫증을 내니까” “백 년 정도는 단숨에 흘려보낼 그럴듯한 상처가 내게는 필요하”다고 썼을 때, 우리는 ‘시장’을 이를테면 ‘출판 시장’으로, ‘백 년’을 ‘근대문학 백 년’으로 (알레고리적으로) 바꿔 읽게 된다. 그랬을 때, 황성희는 근대문학 100년을 “언제 왜 얼마나 아팠는지 지어내다” “금방 흘러가 버”린 시간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고백의 문학사는 상처에 대한 신화이고 픽션이며 주석이다, 이 과감하고 과격한 요약은 ‘거울(이상)과 자화상(윤동주) 그리고 거대한 뿌리(김수영)’(「거울과 자화상 그리고 거대한 뿌리」, 56∼57)의 밖을 모색하고 있는 황성희의 문제적인 출발점일 것이다. 어쨌든 그녀의 관심은 고백의 거울이 아니다. 문제는 거울 바깥의 주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조금 더 말하거나 새롭게 말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봤듯이, 황성희는 자신의 위치를 대단하게 선언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녀의 문체는 크게(많이) 말하지 않고 작게(적게) 말한다. 이를테면, “딴 뜻은 없어요. 어쨌든 난 안 아프니까.”
김행숙 1970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춘기』, 『이별의 능력』과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 『창조와 폐허를 가로지르다』,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강남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