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강은교
1945년 함남 홍원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 등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았으며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그대는 깊디깊은 강>, <벽 속의 편지>, <어느 별에서의 하루>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이 있고,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다.
종합에의 의지 - 강은교론 / 이 성 우
1.
강은교 시에 대한, 잘 알려진 불만 인간이 성취해 낸 모든 분야에서 이른바 양쪽의 경계에 선 사람들은 간혹 곱절의 찬사 또는 그보다는 훨씬 자주 곱절의 비난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한국 현대시에서 강은교 시인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1974년에 나온 『풀잎』은 그 증명서 같은 시집이다. 시선집이자 신작 시집인 『풀잎』에서 강은교는 자신의 시를 ‘허무집’과 ‘허무집 이후’로 나눠 놓았다.
이 구분은 공교롭게도 지금까지 강은교 시를 양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왔다. 등단 6년 만에 낸 두 번째 시집이 한 시인의 ‘블랙박스’가 된 셈이다. 그 블랙박스를 놓고 제기된 문제들 가운데는 특별히 다뤄 기록할 만한 것들이 있다. 먼저 ‘허무집’의 시편들에 대해서는 그 개성의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사변적이며 선험을 통해 직관 혹은 예감하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1) 또 강은교의 초기시에서 허무의 본질은 관념에 있으며, 시인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안타까움 섞인 기록도 있다.
2) ‘허무집 이후’의 시편들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아쉬움이 토로된다. 한편에서는 현실 참여적인 후기 시편들이 그 언어적 개성을 잃어 강은교 시인 특유의 시세계라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3) 가령, 『소리집』 이후의 시편을 가지고 논한다면 시인으로서의 긴장이 이완되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4) 이 견해에 따르면 강은교 시의 가치는 여전히 ‘허무집’ 부근에 머문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견해도 있다. 후기시에 올수록 강은교의 창작 방법은 사물에 대한 감각적 조응보다 관념적 결합에 기우는데, 이는 삶의 구체적 현실을 생생히 표현하는 데 다소 부담스럽다는 지적이다.
5) 강은교의 후기 시편들에는 아직도 불투명하고 관념적인 추상의 그림자가 제거되지 않았다는 언급
6) 역시 같은 맥락에 속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강은교 시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풀잎』의 ‘허무집’ 부분에 시적 가치를 놓아두려는 견해와 ‘허무집 이후’의 시편에서 변모된 가치를 찾아내려는 시각 사이에서 기우뚱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경계에 선 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내가 이 글에서 강은교 시에 헌정된 찬사보다는 오히려 불만 사항들을 먼저 확인하는 이유는 강은교 시에 내장된 경계적 특성과 그 특성들에 대한 종합에의 의지에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불만은 그것을 채울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
2.
개인적 허무와 사회적 책무 강은교의 시적 여정을 돌아볼 때 개인적 허무와 사회적 책무 사이의 화해 또는 갈등이 전략적인 의식화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특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시인 특유의 허무 의식의 근원에 독특한 실향감이나 아버지에 대한 애증, 시인의 기대를 배반한 사회 현실에 대한 좌절감 등이 자리한다면, 시인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인식 역시 죽음을 스친 개인적인 경험과 거기서 비롯된 삶에 대한 이전과는 다른 생각으로부터 싹튼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강은교 시인에게서 동시에 발견되는 서로 다른 특성들은 전략적 기획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자생적인 발생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집 『풀잎』에서 ‘허무집 이후’의 첫머리에 놓인 작품을 보자.
저물 무렵 네가 돌아왔다 西쪽 하늘이 열리고 큰 무덤이 보이고 떠나가는 몇 마리의 새 食口들은 다시 安心한다 곧 이불을 펴리라 지난 해를 다 바쳐 마련한 삼베이불이 곳곳에서 펴지리라 나는 헌옷을 벗고 낡은 피는 수채구멍에 버린다 곁눈질로 우는 피의 기쁨 뒷뜰에선 오랜만에 꽃잎 떨어지는 소리 마지막 꽃잎도 떨어지고 나면 더 무엇이 살아서 떨어지겠는가 西쪽 하늘이 열리고 네가 돌아왔다 살아있는 것 모두 물이 되도록 물 끝에 거품으로 일 때까지 성실한 너는 또다시 오라. ― 「저물 무렵」(『풀잎』, 1974) 전문
이 시는 죽음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삶 쪽으로 돌아온 사람의 정황에서 시작한다. 화자인 ‘나’는 ‘너’라는 인칭대명사로 지칭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시의 화자인 ‘내’가 넘나든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은연중 인칭대명사의 넘나듦으로 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면적인 교체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굳이 시인의 전기적 사실에 기대지 않더라도 이 시에서의 죽음이 일회적 사건이 아님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가령, ‘큰 무덤’이나 ‘떠나가는 몇 마리 새’는 상상에서든 현실에서든 이 시의 화자에게는 실제로 존재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시에서는 중요하다.
화자가 그것들과 관련된 경험을 쉽게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 돌아온 화자에 대해 식구들은 마음을 놓지만, 정작 당사자인 화자는 죽음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헌 옷을 벗고 낡은 피를 버린다는 진술은 그것이 실제 상황이든 비유적 진술이든 이미 한 번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나 진배없음을 내포한다. 죽음에 근접한 경험을 통해 화자는 ‘다시 살아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물’이 된다는 마지막 연의 진술은 첫 시집에 실린 다음 작품과 맥이 닿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우리가 물이 되어」(『허무집』, 1971) 부분
여기서의 ‘불’은 숯, 뼈의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죽음과 관련된다. 그것을 벗어났을 때, 다시 말해 ‘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한 만남이 가능해진다. 물과 불은 그러나 이때 서로 대척적인 위치에 놓일 뿐이다. 양자 사이의 넘나듦이나 조화는 아직 상정하기 힘들다. 이런 사정이 두 번째 시집의 「저물 무렵」에 와서 변화를 보인 것이다. 죽음을 스치는 경험을 통해 삶과 죽음의 거리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가깝게 느껴진다.
살아 있는 존재가 물이 될 수 있는 것은 따라서 삶과 죽음 사이의 가까워진 심정적 거리에 연유한다. 이 모든 과정은 삶과 죽음의 연속된 체험이라 할 만하다. 이런 체험은 삶과 죽음이 차례로 돌아간다는 인식에 이어진다. 다음에 올 때면 그대여 저승에나 갔던 듯 돌아오게 저승이 저 하늘이라면 여기서 하늘이 참 가까우니 별냄새도 조금 나고 바람때도 조금 묻혀서 山모래 부서지듯 부서지듯 부끄럽게 부서지며 오게. ― 「回歸」(『풀잎』, 1974) 부분
이승과 저승을 오갈 수 있다거나 삶과 죽음이 되풀이된다는 믿음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요소는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다. 아니 삶 그 자체라기보다는 ‘온전한 삶’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상태로 자신의 삶을 끌어올리려는 의지이다. 별이 아니라 별‘냄새’, 바람이 아니라 바람‘때’, 그냥 모래가 아니라 ‘부서지는’ 모래처럼 구체적인 감각 대상들을 저승과 이승 사이에 배치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냥 삶이 아니라 온전한 삶에 대한 희구와 관련된다.
다른 사람은 대신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죽음 관련 체험을 통해 화자는 자신은 물론 타인의 삶을 대하는 시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에 닿는다. 그래서 시인은 “아아, 한때/캄캄하던 나/아아, 한때/텅비어 있던 그대들”(「스스로를 기억하는 노래」)이라 노래한다. 이때 ‘캄캄한 나’와 ‘텅 빈 그대’가 똑같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더 자세히 보면 근본적인 문제는 화자인 ‘나’에게 있다. 화자가 ‘캄캄하다’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그대들’이라 지칭할 수 있는 타인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지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허무 자체를 크게 문제삼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지만, 그 허무가 지나치게 타인들의 삶과 단절된 상태에서 지속되어 왔다면 문제가 된다. 그것은 개인적인 허무와 사회적인 책무 사이에 처한 시인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그 사이에서 시인은 마치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진눈깨비 같은 존재이다.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 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 「진눈깨비」(『소리집』, 1982) 부분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 「무엇이라고 쓸까」(『소리집』, 1982) 부분
진눈깨비는 눈과 비를 사이에 두고 존재의 전이가 가능한 대상물이다. 하지만 진눈깨비를 바라보는 주체의 시각에 따라 사정은 달라진다. 진눈깨비는 경우에 따라 눈도 비도 될 수 있지만 때로는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답답한 존재로 남을 수도 있다. 인용된 시가 바로 후자의 경우를 지칭한다. 세상이 어두워 진눈깨비가 내리는지 아니면 그 반대의 형편인지 이 시에서 그 선후 관계를 따지기는 힘들다. 하지만 부정적인 상황인 것은 틀림없다.
이런 정황은 그 다음에 인용된 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빛, 눈물, 죽음이 각기 동어반복되는 지극히 암담한 국면이다. 거기서 시인은, ‘무엇이라고 쓸까’ 고민에 빠진다. 그것은 문학적 주제의 갈등이며 동시에 시인의 실존이 걸린 문제이다. 시인은,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아무도 없는데/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고 이 시를 끝맺는다. 이 대목에서 시인의 외로움을 읽어내는 것은 손쉽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미심쩍은 일이다.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시인 곁에는 정말, 아무도 없는가? 아마도 이런 형태의 질문으로부터 나름의 대답을 얻기까지는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많은 모색이 있었으리라. 나는 여기서 개인적인 차원의 인간 문제와 역사적 혹은 사회적 차원의 인간 문제가 있음을 얘기하고자 한다. 이 두 관계는 어쩌면 하나로 보이지만, 하나로 들여다보려고 할 땐 많은 모순된, 서로 등을 대고 앉은 이율배반적인 괴리 현상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변증법적인 관계나 상호 보완적인 관계도 아니다. 표현하자면 자율적이고도 통제적인 관계이다.(「시의 현실과 삶의 현실」, 『누가 풀잎으로 다시 눈뜨랴』, 216쪽) 시인의 산문과 시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산문은 오히려 일종의 알리바이 구실을 할 위험도 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인용문에서와 같은 자기 질문을 거쳐 시인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비 내리는 장터에 모여앉은 너희들을 본다. 옹기종기 쓰레기더미 위에 엎딘 너희들을 본다. 비바람에 푸른 살 찢기우고 목숨 꽂은 언 땅에서도 쫓겨나 오직 탐욕의 비늘 낀 손 기다리는 아아 너희들 동강난 뿌리. 너희들은 울고 있다. ― 「배추들에게」(『소리집』, 1982) 부분
어쩌다 끌려왔는지, 넘실대는 핏물이야 가까이 누운 저 노을 속에 던져넣고 아마도 누군가의 밥상 위에서 찌개로 보글보글 끓기를 기다리는 너, 펼친 양지느러미엔 파리떼들 오 파리떼들만 잔뜩 매달려. 말해다오 이제 보는 세상은 어떤가 거기 좌판 위에 걸려 있는 하늘에도 춤추며 바람은 불어가는가 허옇게 뒤집어진 눈 해안선 같은 입이여 ― 「어허, 도미」(『소리집』, 1982) 부분
배추와 도미는 모두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대상들이지만 또한 쉽게 지나칠 수도 있는 것들이다. 거기에서 시인은 새로운 것을 본다. 배추의 눈물을 보고, 자판 위에 올라 있는 도미의 허옇게 뒤집어진 눈을 본다. 물론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본다. 배추는 이제 푸성귀가 아니라 자신의 살을 찢기우다시피 하고 살던 곳에서도 쫓겨난 사람들 같다.
도미도 이젠 한 마리 물고기가 아니다. 제 살던 곳으로부터 끌려나와 피 흘리며 희생되는 어떤 사람들일 수도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허옇게 뒤집어진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이미 존재해 왔던 또 하나의 세상을 발견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알게 되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일은 서로 평행선만 긋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삶의 궤도를 바꾸거나 아예 그 궤도에서 내려서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제로 그것을 행하는 일은, 우리의 가까운 지난 시대가 증명하듯 하나의 크나큰 모험이다. 다만 시인으로서는 자신의 가장 확실한 존재 증명을 작품 안에 새겨 둘 뿐이다.
이제 스미리, 언제나 핏물 넘치고 넘쳐 저물녘이면 시뻘겋게 해 져가는 이 땅에 스미리. 안개 밟고 가는 이들이여 발걸음들은 가볍고 가벼워 한 올 실바람에도 자주 흩어져 버리는 이들이여. ― 「이제 스미리」(『소리집』, 1982) 부분 이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서는 것이 아니라 땅 ‘속으로’ 아주 스며들겠다고 화자는 말한다. ‘위에’가 아니고 ‘속으로’다. ‘이 땅’이라는 전체와 한 개인으로서의 화자가 통합할 수 있는 방안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스미다’라는 동사의 쓰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스미다’는 사전적으로 ‘물, 기름 따위의 액체가 배어들다’는 뜻 말고도 ‘마음속 깊이 느껴진다’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스미다’는 대상들 사이의 운동의 방향성과 심정적 상태라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고려된 시어이다. 시인의 말마따나 ‘자율적이고도 통제적인 관계’에서 비로소 두 대상이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또 ‘스미다’ 같은 액체 상태의 움직임을 유추할 때 비로소 “한 올 실바람에도 자주 흩어져 버리는” 기체 상태와도 같은 한계를 극복할 실마리가 분별될 것이다.
바람소리 두엇이 달려오기에 반갑게 맞이하네 바람소리 두엇을 방에 들이려니 바람소리 서넛이 따라 들어오네 바람소리 서넛을 방에 들이려니 바람소리 대여섯이 따라 들어오네 끝이 없네 너희들 여기 있었구나 수천 날 그리 울면서 여기. ― 「벽 속의 편지: 바람소리」(『벽 속의 편지』, 1992) 전문
화자가 잇따라 방에 들이는 것은 엄밀히 말해 바람이 아니라 바람 ‘소리’이다. 왜냐하면 화자와 바람 사이를 가로막는 유형무형의 ‘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 장벽을 넘기 위한 방편이 ‘소리’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소리를 화자의 방에 들이는 것만으로는 화자와 바람 사이의 벽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것이 ‘울음’을 공유하거나 혹은 인식하는 일이다.
울음은 앞서 살펴본 「이제 스미리」에서 피가 땅에 스미듯, 화자와 바람 사이에 액체 상태로 스며든다. ‘울다’라는 동사는 대상들을 액체 상태로 만들어 융합시키는 구실을 하는 셈이다. 이처럼 대상물들이 화자의 안으로 스며들어 서로 하나가 된다는 시적 상상은 등불이 시적 자아의 내부에 들어와 산이 되고 바다가 된다는 최근의 시적 발상과도 유사한 것이다.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들어와 환한 바다 하나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 「등불과 바람」(『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1999) 전문
등불은 어둠을 밝히거나 삶을 경건하게 비추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시의 화자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환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등불은 바람 한 줄기에도 위태롭게 흔들릴 만큼 나약한 속성을 지닌다. 그 나약함이 이 시에서는 화자인 ‘나’와 등불 사이에서 친화성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이때 주시할 것은 등불의 움직임이다. 등불은 화자의 외부에서 어둠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속으로’ 들어온다.
화자의 내면에 아직도 불 밝혀서 살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다는 뜻일까? 여하튼 등불 하나, 둘이 화자의 내면에 들어와 산이 되고 바다가 되는 과정은 곧 낮고 작은 개체들이 모여서 하나의 큰 장(場)을 이루는 삶의 이치에 가 닿는다. 시인은 아마도 개인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사회나 역사를 더 신뢰하는 듯하다.
강은교의 시세계를 개인적 허무의 심연으로부터 사회적 책무의 인식에 이르는 직선상의 변화로 파악해서는 곤란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강은교 시의 진정한 가치는 인식의 진화론적 발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있다. 그 지점에서 우리가 감지하는 것은 개인적 허무와 사회적 책무 사이에서 진동하는 시인의 의식이며, 그 의식이 지향하는 균형 혹은 종합에의 의지이다.
3.
모더니즘의 기법과 리얼리즘의 세계관 지금까지 큰 조명을 받지는 못했으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강은교 시인의 창작 방법과 세계관의 문제이다. 시인이나 작가에게 있어 세계관이란 현실에 대한 기본 태도인 동시에 그의 예술적 견해를 결정하며, 나아가 창작 방법을 선택하는 관점이다. 강은교 시인은 시 작품 못지않게 많은 분량의 산문을 발표하고 또 본격적인 논문도 여러 편 썼다.
이 글들 가운데 특별히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관련된 시인의 논의를 추출한다면 우리는 강은교 시인의 창작 방법이나 세계관에 직핍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최근 내놓은 시화집에 실린 다음 글은 이 같은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 현재를 가장 현재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항상 벽에 부딪힌다.
리얼리즘의 시도도 아직 시에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모더니즘도 ‘모던……’이라는 시의적절한 이름을 가졌음에도 세계의 모든 모더니즘에서부터 김기림,김수영의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현재에서 일탈하는 패배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음에도 현재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가령 꽃이 피어 있는 사태에 부딪혀서도 그 꽃의 현재를 노래하지 못하고 있다.(「꽃은 통일이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215쪽)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 모두 ‘현재’를 제대로 표현하거나 노래하지 못했다는 것이 강은교 시인의 진단이다. 사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 문명 사회를 배경으로 주체와 객체 사이에 벌어지는 모순과 갈등을 텍스트에 수용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그것의 문학적 발현 방식에 있어서 방향성과 태도가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이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과 충돌을 그려내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리얼리즘은 주체와 객체의 교섭과 통일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더 중요시한다. 가령 1930년대 후반기 한국 문학에서 모더니즘이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감각을 내세워 당대의 역사를 치유 불가능한 파편화된 역사로 파악한 반면, 같은 시기의 리얼리즘은 마르크시즘의 공식화된 역사 발전 단계설에 입각한 일직선적인 시간관에 바탕을 두고 당대를 역사적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이 같은 차이는 작가의 창작 방법이나 서술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를테면 모더니즘 작가들은 단인칭적이거나 복합 인칭적인 서술을 많이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보여 주고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의 다면성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더니즘 작품의 주인공에게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독립된 개별 주체의 성격이 자주 부여된다. 이에 반해 리얼리즘 작가들은 전지적이며 명확한 서술자를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사회 내부의 총체성을 반영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리얼리즘 작품의 주인공에게 사회 계급이나 집단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상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한다. 결국 리얼리즘이란 미학적 방법론이기 이전에 인간의 사고 구조를 반영하는 세계 인식 방법이다. 따라서 리얼리즘의 전체 윤곽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기법 이면에 존재하는 보다 근원적인 세계관이나 역사 의식 등을 전제해야 한다.
이런 사정은 모더니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된 강은교 시인의 언급을 다소 길게 인용해 보자. 최근 50여 년 동안 시는 언어의 실험실이라는 명제에 너무 집착되어 있었고, 개인의 관찰과 사고에 지나치게 절대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시 속에 서구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가 차용되면서부터 시는 그 기교면에선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되었지만, 반면 시의 사회적 관계를 상실하게 되어 갔다.(「인간을 위한 사랑의 시학」, 『누가 풀잎으로 다시 눈뜨랴』, 195~196쪽)
오늘날 우리 시대의 커다란 과오는 테크닉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분리되면서 인간도 테크닉의 도구로 전락하여 개인은 모래화, 원자화되어 가고 있으며, 모든 문화적 기능은 테크닉을 합리화시켜 주는 화장품 역할을 하고 있읍니다.(「자유를 위한 문학」, 『누가 풀잎으로 다시 눈뜨랴』, 206~207쪽)
우리의 시문학사는 박용철이 ‘최고의……’를 고집하던 시절부터 이상한 말(고정된 말)의 면사포를 쓰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면사포는 결국 안이냐 밖이냐의 어설픈 절망문학을, 결국 분단문학을 탄생시켜 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흐르는 물 같은 문학의 본질」, 『순례자의 꿈』, 419~420쪽)
시인이 먼저 문제삼는 것은 정도를 벗어난 언어 실험과 ‘테크닉’이며 또한 그것들이 지나치게 파편화된 개인의 영역에 한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더니즘이란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해 비판하지는 않았으나, 서구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언급하는 대목은 모더니즘 비판으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다. 특히 박용철로 지칭된 이른바 시문학 동인들의 문학사적 공과를 평가하는 부분은 강은교 시인의 문학관의 일면을 잘 드러낸다.
시문학 동인들은 시와 현실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렸기 때문에 ‘분단문학’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끊지 않는, 다시 말해 현실과 항상 어떤 끈을 유지하고 있는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 될 수 있는 대로 깃털을 빼는 것, 색동칠도 물론. 지극한 고도(高度)의 숙련으로 이들을 치장한 뒤 사멸(死滅)시키는 것 ― 그리고도 남는 것, 그것의 외로운 비상(飛翔)을 목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의 즐거움, 예술의 단순성이란 여기에 있다.(「몇 가지 원칙: 삶과 문학을 위해」, 『순례자의 꿈』, 410쪽) 현실과의 연결 고리가 아닌 ‘깃털’이나 ‘색동칠’ 같은 것, 또는 앞서 인용한 글을 참고한다면 지나친 ‘테크닉’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성취한 단순성에 시인은 특별히 주목한다. 그 단순성은 무기교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교를 가했으되 그 기교를 ‘사멸’시킨 이후에도 남아 있는 어떤 고도의 단계, 그것이 바로 시인이 말하는 단순성이다. 아마도 그 단순성은 다음 인용문에 나오는 ‘동시대의 객관적 현실을 나타내는 특수한 반영’으로서의 리얼리즘에 연결될 때 그 의미가 더 명확해질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모든 예술은 인간의 삶과 삶의 행위가 사회와 생생하게 상호작용하는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동시대의 객관적 현실을 나타내는 특수한 반영’이라는 리얼리즘의 방법론에 한층 흥미를 느끼게 된다.(「문학과 현실」, 『순례자의 꿈』, 440~441쪽)
우리 문학은 우리 문학 속에 나타난 왜곡된 현실 내용과 모습을 지양하는 뜻에서라도 우리의 문학 전통 속에 리얼리즘 문학의 선진적 방법을 주체적으로 수용․접목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앞의 글, 445쪽) 리얼리즘의 방법론에 대한 시인의 지지는 매우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또 개인과 사회 사이의 상호 작용의 통로로서 시인은 리얼리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더 나아가 시인은 우리의 문학 전통에 리얼리즘의 문학 방법을 도입하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앞에서 모더니즘의 방법론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는 리얼리즘 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듯도 하다. 그렇다고 리얼리즘에 대한 시인의 기울어짐이 그렇게 단선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은 아니다.
가령 시인이 다른 글에서 “역사적 진실이 확대된 공동 체험의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삶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눈과 그 실체 속에 자신을 동일화시킬 수 있도록 모든 사사로운 이익들을 초월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자유를 위한 문학」)라고 할 때, 그 말은 이른바 세계관과 창작 방법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연관 관계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곧 진보적 세계관이 자동으로 진보적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 또 반동적 세계관이 일괄적으로 반동적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라는 점, 오히려 반동적 세계관이 특정한 경우에는 진보적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루카치의 한결 유연해진 주장을 환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대한 강은교 시인의 견해를 포괄적으로 드러낸 글은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인 「1930년대 김기림의 모더니즘 연구」(1988)이다.
강은교는 이 논문에서 김기림의 모더니즘 운동을 실패한 문학 운동으로 규정한다. 김기림이 주도한 1930년대 모더니즘 운동은 1920년대의 시가 극복하지 못한 감상성과 정치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체 문학 이념으로 등장했으나 이론과 방법의 괴리, 자기 현실을 부정한 관념적 세계주의에 대한 집착, 지나치게 새롭고 신기한 것만을 추구하는 전위 의식 등으로 말미암아 그 가능성만을 제시했을 뿐 실천을 통한 결실은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논문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 논문이 전적으로 모더니즘 비판에만 머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마지막 부분은 김기림이 주창한 ‘모더니즘과 사회성의 종합’에 할애된다. 그가 이처럼 새로운 한국시의 전망으로서 ‘모더니즘과 사회성의 종합’을 주장하게 된 동기는 한국 시단의 기교주의적 말초화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주장이 현실적으로 어떤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침체된 한국 시단을 살려내고 시단의 병폐를 건전하게 회복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과 또 당시의 시대적 상황의 절박함을 감안해 볼 때 그의 주장은 매우 의욕적인 것이었고 또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 것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1930년대 김기림의 모더니즘 연구」, 121쪽) 문학사가 기록하고 있듯 김기림이 내걸었던 ‘모더니즘과 사회성의 종합’은 그 주장의 실체를 보여 주지 못한 채 1930년대 한국 시단의 성격과 한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제언에 그치고 말았다.
김윤식이 이미 언급한 것처럼 모더니즘이 전개되지도 않은 풍토에서 벌써 그 결함을 지적하고 ‘전체로서의 시’를 주장한 것 자체가 때 이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은교가 주목하고 있듯 김기림은 분명 하나의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해 놓았으며, 우리 현대시는 아직 진행형이다. 김기림이 두 세대 전에 말해 놓은 모더니즘과 사회성 혹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종합은 아득하기만 한 것일까. 또한, 강은교의 시론은 자신의 시와 얼마만큼 별개일 수 있을까.
4.
강은교 시에 대한, 덜 알려진 기대 강은교 시에 대한 불만 속에는 이미 그만큼의 기대가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은 김수영이다. 사실, 강은교의 시를 읽으면서 개인과 사회,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같은 명제들을 곱씹을 때마다 나의 뇌리에 감광된 것은 ‘런닝구’를 입고 비스듬히 턱을 괸 김수영의 퀭하니 사람 마음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눈빛이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1950년대 모더니즘의 한계를 넘어 비로소 대표적인 참여 시인으로 부상한 시인, 문학사는 김수영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런 김수영이 유작으로 남긴 「풀」과 강은교의 「숲」, 「일어서라 풀아」 같은 작품들을 함께 읽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설레는 경험은 강은교의 또 다른 작품에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다가 비틀거리는 김수영의 환영과 마주치는 일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 「그대의 들」(『벽 속의 편지』, 1992) 부분 짧게 줄여 말하자면, 김수영은 지나치게 대의명분에 매달린 것이 아닐까? 위에서 패러디된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는 물론 「그 방을 생각하며」나 「육법전서와 혁명」, 「푸른 하늘을」 같은 작품들을 읽어 보면,
김수영은 마치 뚜렷한 대의명분 없이는 혁명을 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반면에 강은교는 혁명은 일상의 사랑이며 낮은 것, 작은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거듭 말하는 것 같다. 위에 인용한 「그대의 들」은 물론이고 같은 시집에 수록된 「벽 속의 편지: 그날」이나 최근의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1999)에 실린 「빗방울 하나가」 연작을 읽어 보면 이 차이점은 더 분명해진다.
시작 초기에 빠져들었던 김수영으로부터 곧 벗어났다는 강은교의 고백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수영에서 벗어난 강은교가 보여 준 시적 행로는 개인과 사회 혹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경계에서 도드라진 것이었고, 나는 그 행로의 한 굽이에서 김기림이 세워 둔 ‘모더니즘과 사회성의 종합’이라는 허황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정표를 하나 더 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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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병익, 「허무의 선험과 체험」, 강은교, 『풀잎』(민음사, 1974), 19쪽.
2) 신경림, 「강은교의 시세계」, 강은교, 『빈자일기』(민음사, 1977), 84쪽.
3) 박노균, 「강은교론: 존재 탐구의 시에서 역사적 삶의 시로」, 김용직 외, 『한국현대시연구』(민음사, 1989), 404쪽.
4) 진형준, 「무덤의 상상력에서 뿌리의 상상력으로」, 강은교, 『순례자의 꿈』(나남, 1988), 464쪽.
5) 이영섭, 「시의 풍요로운 생명감」, 강은교, 『그대는 깊디깊은 강』(미래사, 1991), 145쪽. 6) 이영진, 「자비로워진 허무와 탈주의 정신」, 강은교, 『어느 별에서의 하루』(창작과비평사, 1996), 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