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외곽의 오래된 지하철역, ㅇ ㅇ ㅇ 역.
출퇴근 시간만 조금 벗어나면 사람들의 발걸음은 급격히 줄고, 차가운 형광등 불빛만이 길게 늘어선 플랫폼을 비추었다.
구석 벤치에 앉아 바닥을 닦고 쓰레기를 줍는 청년 **강도윤(23)**은 새벽 4시부터 한밤 11시까지 이곳에서 일했다.
빚에 쫓기다 남겨진 어머니가 떠나고, 아버지 **강철우(56)**는 2년 전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 신세가 되었다.
도윤이 일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가 먹을 약 값과, 월세 38만 원짜리 반지하 방을 지키기 위해서.
도윤은 매일 같은 시간에 플랫폼 바닥을 닦았다.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이 물걸레를 건조시켰고, 스피커에서 울리는 “이번 역은 봉천입니다”라는 안내음이 그의 하루를 나누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스피커 아래에 서서 바깥의 소리를 들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코트에서 떨어지는 빗물, 구두가 젖어 꾹꾹 소리를 내는 발걸음들.
그럴 때마다 도윤은 호주머니에서 우산 한 개를 꺼내 벤치 위에 조용히 놓았다.
그것은 역에서 분실물로 신고되지 않아 버려질 예정이던 우산 중에서 가장 멀쩡하고 단단한 우산이었다.
그 우산은 반드시 같은 장소에 놓였다.
플랫폼 끝의 벤치, 벽시계 오른쪽 바로 아래.
왜냐하면,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가 항상 그 벤치 앞에서 아들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비가 쏟아지면 아버지는 손힘이 약해 우산을 제대로 펼 수 없었고, 우비를 입을 돈도 없었다.
도윤은 퇴근해 지하철역을 빠져나올 때 아버지가 빗물에 젖어 떠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우산을 몰래 벤치에 두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우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그 우산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다.
손잡이에 작고 조용한 리본 하나가 매달려서.
아버지는 손끝이 떨려 글씨를 쓰지 못했지만,
리본은 말 대신 건네는 메시지였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사람들은 벤치에 우산이 놓여 있는 광경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누가 자꾸 우산을 두고 가나?”
“도둑도 참 착하네. 다음날 다시 가져다 놓는다니.”
가끔 누군가 그 우산을 들고 가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늙고 지친 손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젖은 휠체어 바퀴를 끌며 씩 웃었다.
“오늘은 빗물이 많이 왔네.”
그 말 속에 감추려는 떨림이 있었다.
어느 늦은 밤,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이 지하철 유리창을 흔들었고, 전신주가 삐걱거리고, 스마트폰 긴급 알림이 계속 울렸다.
도윤은 마지막 열차가 출발하고 난 뒤
벤치에 우산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특별히 더 튼튼한 우산이었다.
며칠 동안 아껴둔 월급 일부를 써서 산,
검은색 자동 우산.
찰칵.
버튼을 누르면 강하게 펼쳐지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 오늘은 안 젖으셨으면…”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전철을 타려고 돌아섰다.
그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휠체어 바퀴가 바닥에서 물을 끌어당기는 소리.
“도윤아…”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빗물에 씻겨 더 떨리고 있었다.
“오늘은… 네가 더 많이 젖은 것 같구나.”
도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비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리본이 달린 어제를 우산을 내밀었다.
“아빠는… 너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데…”
도윤은 그 우산을 바로 아버지 손에 다시 쥐어주었다.
“아버지가 여기 와 주는 것만으로… 나는 매일 버틸 힘이 생겨요.”
둘은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하철역의 마지막 불이 꺼지고, 빗물 소리만 남았다.
며칠 후, 아버지는 폐렴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의사들은 말했다.
“며칠간 차가운 비를 많이 맞으신 것 같습니다.”
장례식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검은 양복 한 벌도 없었고, 조화도 없었다.
도윤은 겨우 낡은 와이셔츠 하나를 입고
사진 없는 작은 유골함을 품에 안았다.
장례를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돌아온 밤,
그 벤치 위에는 하얀 리본이 달린 우산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우산 손잡이에 작은 종이가 묶여 있었다.
도윤아,
네가 언제나 내 자랑이었다.
비가 오면, 이 우산을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렴.
나는 늘 너의 위에 있을 거야.
도윤은 사람 없는 플랫폼에서 우산을 펼쳤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우산 위에 부딪히며 울렸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버지, 이제… 비를 맞아도 괜찮아요.”
비는 여전히 쏟아졌지만
오늘은 추위보다 따뜻함이 더 크게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