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헤롯과 얼마나 다를까?
본문 : 마가복음 6장 14 ~ 20절
사람들은 종종 큰 사건이나 뉴스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절대로 저렇게는 안 될 거야.” 또는 정치인의 부정부패를 보아도 그렇고, 유명인의 범죄 소식을 들어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인 줄로 생각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처음부터 특별히 악한 사람이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작은 욕심 하나를 정리하지 못하고, 작은 거짓말 하나를 덮으려다가 더 큰 거짓말을 하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이번 한 번만…” 하며 미루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자리까지 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폭군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을 책망하는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고, 크게 번민하기도 했지만, 달갑게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던 헤롯이 끝내 결단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죄를 정리하지 못했고, 사람들의 시선과 체면을 더 의식하다가 결국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사역을 기록해 나가다가, 왜 갑자기 헤롯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헤롯이 얼마나 악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이 이야기를 기록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말씀을 듣고도 끝내 결단하지 못했던 헤롯의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시려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나는 헤롯과 얼마나 다를까?’로 해보았습니다. 따라서 ‘나는 헤롯과 다르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혹여라도 나에게 헤롯과 같은 모습이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헤롯과 무엇이 다를까요?
1. ‘나는 헤롯처럼 말씀을 들었면서도 결단을 미루고 있지 않은가?’입니다.
오늘 본문 19절과 20절에 보면, 참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었을 때, 헤롯과 헤로디아의 반응이 전혀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고, 반면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하였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말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두 사람에게 똑같은 책망의 소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귀를 막고 요한을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헤롯은 달랐습니다. 자신을 지적하는 책망이었는데도,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게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번민했다’는 것은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고 불편했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자신의 죄를 정확히 찌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세례 요한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양심의 가책도 느꼈고,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괴로웠지만-, 그 말씀을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을 통해 “용서하라, 기도하라, 예배를 소중히 여기라. 세상 욕심을 버리라” 하는 책망의 소리를 들었다고 합시다. 여러분 모두가 똑같이 들었습니다. 똑같이 마음이 찔리고 불편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왜 나를 지적하나? 왜 그런 말씀을 하냐?”며, 마음의 문을 닫고 화를 냅니다. 반면 마음은 불편하지만, “맞아, 목사님 말씀이 백번 옳지. 내가 잘못 살았지” 눈물 흘리며 받아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헤로디아입니까, 헤롯입니까? 우리는 ‘헤로디아는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우리는 예배당에 나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찔림도 받고, ‘아멘’으로 말씀을 달게 듣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헤롯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안 들어서가 아닙니다. 은혜를 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말씀을 듣고 은혜 받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헤롯은 요한의 설교를 들으며 감동을 받았고, 양심의 가책도 느꼈습니다. “내가 인생을 이렇게 살면 안 되지”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끝내 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다음에 하면 되겠지” 미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도 헤롯과 비슷한 모습이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습니다. 들을 때에 ‘아멘 아멘’ 하며 은혜도 받습니다. 때론 눈물을 흘리며, 회개도 합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말씀대로 살겠다는 순종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잘못을 깨달았으면,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을 야단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나는 헤롯과 얼마나 다를까?”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헤롯이 말씀을 듣고서 그대로 살기로 결단하였더라면, 그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은혜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들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새로 오신 분들이나, 오래동안 신앙생활하시는 분이나, 이것 하나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바른 길로 가서 복을 받기를 원하기에 말씀하시는 분’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 모두, 그 바른길로 걸어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복을 받기 위해 오신 분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 결단을 해 보길 원합니다. ‘이제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헤롯과 같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넘치시도록 축복하시는 복된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2. ‘나는 헤롯처럼 죄를 알면서도 그대로 붙들고 있지 않은가?’입니다.
우리 함께 17절과 18절을 읽겠습니다.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이게 무슨 말이냐면, 당시 헤롯이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의 친동생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불륜을 저지르고, 강제로 결혼하였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명백한 죄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목숨을 걸고 헤롯을 향해 외쳤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죄다!” 사실 헤롯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0절 중반을 보면, “크게 번민했다”고 했습니다. 잘못된 줄 알았기에 마음이 찢어지게 괴롭고 아팠던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은 끝내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지도 않았고, 그 죄를 끊으려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왕궁의 안락함, 헤로디아가 주는 달콤한 쾌락, 내 육신의 정욕을 단호하게 잘라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괴로워하면서도, 슬그머니 죄와 타협하고 만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헤롯이 죄를 단호하게 끊지 않고 곁에 내버려 두자, 19절에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헤롯이 죄와 타협하며 지내는 동안, 그 죄가 왕궁 안에서 점점 자라나 마침내 요한을 죽이고, 헤롯까지 망하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가 자기의 죄를 끊었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TV에서 20대의 아가씨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 아가씨가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해 살이 너무 쪄서 과체중으로 생명이 위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보다 못한 방송단이 병원과 협의하여, 이 아가씨를 살리기로 하였습니다. 방법은 병원에서 위를 반으로 줄여 식욕을 줄이도록 하고, 헬스 트레이너가 매일 붙어서 운동으로 살을 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가씨에게 말합니다. “이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냐? 아니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이냐?” 고민 끝에 이 아가씨가 살을 빼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위 절제 수술을 받고, 식사조절을 하면서 피나는 운동으로 살을 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130kg가 넘던 체중이 78kg까지 줄어 예쁜 아가씨로 바꿘 것을 보았습니다.』 이 아가씨의 6개월 전과 후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차이’였습니다. 이 아가씨를 살린 것은 ‘단순히 살을 빼야지’ 마음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원인을 제거하기로 한 것입니다. 먹고 싶은 것을 절제하고, 바꾸기 싫은 생활 습관을 끊어냈기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그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헤롯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헤롯과 같이 죄인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교회를 다니지만, “내가 이것 만큼은 도저히 내놓을 수 없습니다” 하는 안방 깊숙이 숨겨둔 나만의 ‘헤로디아’가 있지는 않습니까? 죄를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영적으로 죽느냐? 사느냐?의 차이’입니다. 내가 죄를 끊으면 살게 될 것이고, 내가 죄를 끊지 않으면 언제가 내 숨통을 조일 독사가 될지 모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마시고, 단호하게 죄를 끊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실수와 잘못은 분명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집사님 한 분이 열심히 일을 하다가 보니, 오늘이 수요일인지 몰라 수요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실수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분명 오늘이 수요일인지 알면서도, 저녁에 술친구와 약속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뻔히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잘못이요, 죄입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이것도 잘못이요 죄입니다. 혹시 우리는 알면서도 잘못을 하는 죄를 짓고 있지는 않는가요?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잘못을 했을지라도 괜찮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이제 그것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끊어내야 할 때입니다. 이 시간에 나를 돌아보며, 그저 씁쓸하게 후회하는 것으로 끝내지 마십시다.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나를 도우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단호하게 죄의 뿌리를 끊어내겠다는 진짜 회개의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나는 헤롯처럼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며 살지 않은가?’입니다.
우리 함께 16절을 읽겠습니다.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참. 이상한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다는 소문이 온 갈릴리에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헤롯이 “내가 목 벤 요한이 살아났다.”고 말하는 걸까요? 이것은 ‘그만큼 그의 마음속에 세례 요한의 죽음이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짐으로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화려한 왕궁에서 살고 있었고, 왕의 권세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양심 속에는 “내가 목 벤 요한”이라는 가시가 여전히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헤롯은 그런 괴로움을 안고 살게 되었을까요? 그 결정적인 원인은 ‘헤롯이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들의 시선과 체면을 너무 의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뒤에 이어지는 사건을 보면, 헤롯이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자, 흥에 겨워 사람들 앞에 큰소리를 칩니다. “네가 원하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그러자 헤로디아의 딸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때, 26절에 보면, “왕이 심히 근심하나”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왜 왕이 심히 근심하였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요한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헤롯은 세례 요한의 말을 달갑게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멈췄어야지요. 심히 근심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26절 중간에 보면, 어떻게 했어요?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자. ‘거절할 수 없다’는 말이 뭘까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는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요? ‘자기 체면과 사람들 눈치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세례 요한을 죽이고 맙니다. 어쩌면 헤롯은 그날 생일잔치에서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을지 모릅니다. 왕으로서 체면을 세웠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결정이 자기 마음속에 가장 큰 짐으로 남았기에 무심코 이런 말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의 눈치와 내 체면을 지키기 위해 내렸던 그 결정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했던 헤롯의 모습이 오늘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삶의 자리에서 죄를 단호하게 끊지 못하고, 믿음의 결단을 미루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에서의 체면을 더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친구들 모임에 가서, 직장 회식 자리에 가서, 사업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내가 교회 중직자인데, 이러면 안 되지’ 하는 양심의 찔림과 번민이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헤롯이 생일잔치 자리에서 ‘심히 근심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 잔치 자리에서 근심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마음에 슬그머니 헤롯과 똑같은 비겁함이 찾아옵니다. ‘여기서 나 혼자 거룩한 척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내 체면이 뭐가 되나? 에라 모르겠다, 이번 한 번만 눈감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주자.’ 하나님이 서 계셔야 할 자리에 세상 사람들의 평판을 올려놓고, 눈치 보느라 슬그머니 신앙을 타협해 버립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야, 너 참 쿨하다, 너 참 성격 좋다”며, 박수를 받았을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체면은 지켰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리고 예배당에 앉아 있을 때-, 묵직한 죄책감이 들지는 않으셨나요? 결국 헤롯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내린 선택 때문에 평생 지을 수 없는 죄책감을 갖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나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보다 내 체면을 더 앞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의 시선은 잠시이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평가는 잊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헤롯과 같이 사람을 의식하다가, 또는 체면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야단치는 설교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헤롯과 같이 실패한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헤롯이 말씀을 들었을 때, 결단하였더라면, 그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또 죄인 것을 알았을 때 바로 회개하고 끊었더라면,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였더라면, 결코 안타까운 인생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말씀을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어떤 분은 마음이 찔리기도 하고, 어떤 분은 “내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마음을 만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헤롯과 같이 번민만 하다가 말 것입니까? 사람의 눈치와 체면만 의식하다가 잘못된 선택을 하시렵니까? 이제 말씀을 들었으면,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또한 잘못한 것을 알았으면, 즉시 회개하고 끊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께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귀하게 쓰시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중 단 한 사람도 헤롯과 같은 사람이 없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