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11) 2018. 10. 17
에벤에셀의 하나님
삼상 7:3-17
벧세메스 주민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순간적인 교만과 방심으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들여다보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70명이 죽는 재앙이 임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기 보다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두려워하여 다른 곳으로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기럇여아림 주민들에게 언약궤를 가져갈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기럇여아림 주민들은 언약궤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궤인 것을 알고 기쁨으로 받고, 그에 합당한 조처를 취합니다.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모시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언약궤는 잘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 후 여호와의 언약궤는 20년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첫 번째 음성>
그 20년 동안 사무엘은 하나님이 쓰실만한 영적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사무엘이 첫 번째 한 사역입니다.
사무엘은 첫 번째 음성은 “우상 숭배를 멈추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3-4절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가장 염려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잊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에 물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을 완전히 몰아낼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공존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의 염려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가나안의 우상에 현혹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대표적인 우상이 바알과 아스다롯입니다. 바알은 남신이고 아스다롯은 여신입니다. 바알은 ‘생산력(生産力)’ 개념을, 아스다롯은 ‘산출력(産出力)’이라는 개념을 상징합니다. 바알은 농경 신으로서 풍년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아스다롯은 ‘성(性)의 여신’으로 다산의 상징으로 숭배되었습니다. 근동지방에서 출토되는 아스다롯 신상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슴의 강조이고, 다른 하나는 불룩한 배 혹은 넓적한 골반입니다.
이 두 신을 같이 숭배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제사 의식에 음란한 행위가 필수적으로 뒤따랐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쉽게 우상숭배에 넘어가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신앙은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대단히 엄격한 윤리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대개 타자들, 특히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연관됩니다.
그러나 바알과 아스다롯은 윤리적 삶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는 개인의 욕망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욕구만을 충족시켜 줄 뿐입니다. 그래서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이 우상숭배에 더 현혹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대대로 이러한 우상숭배는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뿌리 깊이 박혀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한 곳 찾아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국난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한 사람들의 죄를 묻습니다. 국난의 원인이 곧 그들의 우상숭배 때문임을 지적하고 회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레미야의 권고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렘44:16-18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17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18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여기에 나오는 ‘하늘의 여왕’이 바로 ‘아스다롯’입니다. 이 본문은 아스다롯에 대한 숭배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만큼 아스다롯은 매혹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자기들이 겪고 있는 불행이 ‘하늘의 여왕’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우상숭배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문제는 이 우상숭배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가져온다는데 있습니다.
신앙은 ‘이것도 저것도’(both and)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의 문제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6:24).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은 아스다롯을 버리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기에 그 우상들을 버릴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4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를 섬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스바로 모이라>
그러나 사무엘은 우상숭배를 버린 것을 ‘공식화’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식적인 회개 운동, 기도회를 개최한 것입니다.
5-6절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그런데 왜 미스바입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리적인 이점 때문입니다. 해발 780m의 고지대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 8km 떨어져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곳으로 백성들을 모은 이유는 이곳이 비교적 이스라엘의 중앙부에 위치한 곳이어서 전국에서부터 백성들이 모이기에 용이했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러나 단순한 지리적 위치 이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곳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미스바라는 지명은 야곱과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 사이에 맺은 평화협정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밧단아람을 떠나 몰래 귀향하던 야곱은 급히 따라온 라반과 만나 그 동안의 서운했던 감정들을 가감 없이 드러낸 후에 언약식을 갖습니다. 과거의 서운했던 감정을 풀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언약이었을 것입니다. 이 때 라반은 야곱이 가진 재산을 인정해 주는 대신 야곱에게 자신의 딸들을 박대하지 말고 다른 아내를 얻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양자는 돌을 주워다가 무더기로 쌓고는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고 부르고,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부릅니다. 각각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입니다. 돌무더기를 기준하여 서로 넘어와 해를 가하지 못한다는 약속입니다. 일종의 상호 불가침(?) 조약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돌무더기를 다른 이름, 곧 ‘미스바’라고도 불렀습니다. 히브리어 ‘미스바’라는 말은 ‘살피다’, ‘감찰하다’는 의미로서의 ‘망대’ 혹은 ‘파수대’라는 뜻입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그들 둘 사이를 감시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창 31:45-49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47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48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49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미스바는 그러니까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는지 지켜보는 장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감찰하시는 장소인 것입니다.
사무엘이 미스바를 택한 이유는 단순한 지리적 이점도 있지만, 하나님이 이 회개 기도회에서 결단한 내용들을 감찰하여 달라는 깊은 영적인 의미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스바에 모여서 한 일은 무엇입니까?
6절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세 가지 행동을 했습니다.
첫째는 물을 길어 여로와 앞에 부었습니다.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부은 행위’는 자신들의 죄악이 물이 흘러감 같이 흘러가기를 원하는 소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욥 11:16).
둘째, 그날 종일 금식하였습니다. 금식 행위 역시 철저한 자기 절제 행위로서 극도의 슬픔을 토로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을 간구하는 참회의 행동입니다.
셋째,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하며 구체적으로 회개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아뢰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1907년 한국교회로서는 꼭 기억해야만 하는 해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한국교회는 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해서 전국적인 신앙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회복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한 사람의 눈물어린 회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907년 1월 13일 주일 밤 집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당시에 예배를 인도하던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는 무엇인가 막힌 듯했습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집회로부터 멀어졌는가 하고 회중들에게 물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의 죄를 눈물로 뉘우치며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교회의 장로이자 전도사인 길선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집회에 은혜를 내리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는 바로 아간과 같은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집회에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것입니다. 약 일 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을 하면서 내게 부탁했습니다. ‘길 장로, 내가 세상을 뜨거든 내 유산을 돌보아 주시고, 내 아내가 세상을 너무나 모르니 당신만 믿겠소.’ 나는 잘 돌보아 줄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약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뒤에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면서 미화 백 달러 상당의 돈을 사취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길선주 장로는 설교가 끝난 뒤에 열린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자기의 죄악을 큰 소리로 고백했습니다. 그의 눈에서는 회개의 눈물이 흘러 넘쳤습니다. 자기를 신뢰한 친구와 미망인을 속인 죄를 자백하며 날이 밝는 대로 사취한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주겠노라고 배상의 약속을 하면서 쉬지 않고 자기의 죄를 공중 앞에서 자복했습니다.
길선주 장로의 고백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여러 날 동안 견고하게 은혜를 가로막고, 부흥을 가로막고 있던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안에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애끓는 회개가 예배당을 휩쓸었습니다. 울부짖는 통곡소리와 함께 엄청난 통성기도와 함성이 회중 가운데 가득했습니다.
(김남준, 한국교회, 영적기상도를 본다, p.105~110참조)
한 사람이 구체적인 회개를 통해 한국교회의 위대한 회개운동,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회개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아간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살아 온 우리의 죄악을 낱낱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내 안에 없지는 돌아보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영적 부흥을 허락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먼저 가슴을 찢고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 자신도 회복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한국교회와 우리 사도교회를 들어 거룩하게 사용하여 주실 것입니다.
<블레셋의 침공>
그런데 미스바에서의 회개 기도는 뜻하지 않은 오해를 불러 왔습니다.
7-11절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대군을 이끌고 그리로 올라왔습니다. 지형적으로 블레셋은 해안지대에 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중간 산악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나온 것 같습니다.
아마도 블레셋은 사무엘의 인도 하에 이스라엘이 단결하는 것을 보고 큰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강성하기 전에 분쇄해야겠는 생각으로 먼저 선수를 치려 한 것입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사무엘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건져내 주시기까지 쉬지 말고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번제로 바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큰 우레’(큰 천둥소리)를 발하셨습니다. 블레셋 진영에 큰 두려움을 일어나며 혼란에 빠졌습니다. 고대인들은 하늘에서 번개와 우뢰가 발할 때에 하늘의 신이 노여움을 발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몹시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우뢰 외에도 여러 자연 현상을 무기로 삼아 적들을 패퇴시키시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삼하 22:15, 수 10:11, 24:7, 삿 5:20).
이스라엘은 두려움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혼란에 빠진 블레셋을 무찔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대적들의 방해공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뜻하지 않은 시험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어 주심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악의 세력들이 잠시 우리를 대적한다고 해도 성도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의지한다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롬 8: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에벤에셀의 하나님>
사무엘과 백성들은 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돌비를 하나 세웠습니다.
12-17절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15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16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17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사무엘이 돌을 하나 가져다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놓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말하면서,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지었습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잃었던 옛 땅을 회복하고 아모리 족속과도 평화를 유지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여러 곳을 순회하며 말씀을 가르쳐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깨닫게 되는 귀한 은혜가 있습니다.
평화는 힘이나 무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에벤에셀’로 함께 하실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여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큰 우레’를 발하며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기도에도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일하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에벤에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