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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완성)

사무엘상 강해(43) - 믿음은 순종에서부터

작성자박춘경|작성시간19.06.26|조회수525 목록 댓글 0

사무엘상 강해(43) 2019. 6. 26

믿음은 순종에서부터

삼상 22:1-5

 

<다윗의 도피 여정>

 

다윗은 사울의 살해 위협을 피하여 이리저리로 도피하였지만 그 어디에서도 안전한 피난처는 찾지 못하였습니다사무엘 선지자가 있던 라마 나욧도, 친구 요나단도, 제사장의 성읍 놉(아히멜렉)도 사울 왕의 눈을 피할 곳이 못 되었습니다. 급기야 급한 나머지 블레셋의 가드로 피신하였습니다. 그곳은 골리앗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한 장소가 못되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다윗을 알았고 이내 붙잡혀 아기스 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미친 척을 하였고, 하나님께서 아기스의 눈을 가리셔서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셨고, 아기스는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겨 쫓아내라고만 명령하였습니다.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다윗은 아둘람 굴로 피신하였습니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아둘람은 블레셋 진영의 가드와 유다 베들레헴 사이 있는 굴입니다. 그 뜻은 ‘피난처’, ‘은신처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이 지역에는 석회암 동굴이 많을 뿐 아니라 사울의 통치력이 잘 미치지 않았던 곳이므로 다윗이 피신하기 좋았을 것입니다고고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4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 동굴을 발견하고 이곳을 다윗의 피신처로 생각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아둘람 굴에 있다는 소식을 은밀히 가족에게 전했습니다(방법은 알 수 없음). 부모님을 비롯하여 형제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모반(謀反)에 관한 범죄에는 온 가족이 처벌을 당하는 시대였습니다. 자신으로 인하여 가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까 두려워서 속히 그들을 자신이 있는 동굴로 오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 가족들은 아둘람에서부터 약 15km 거리의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다윗에게로 피신하였습니다.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

 

그런데 이 즈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2 “환난 당한 모든 자빚진 모든 자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그런데 가족만 온 것이 아닙니다. 사울의 학정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수소문한 끝에 다윗이 있는 곳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윗은 혼자였지만,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우두머리가 됨).

 

이들이 누구인지 오늘 본문은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 사울의 학정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고통을 받던 자들입니다.

빚진 자 사울의 그릇된 경제 정책의 일면을 보여주는 말입니다즉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어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원통한 자에서 원통은 이라는 뜻입니다. ‘쓴 포도송이( 32:32)’, ‘쓴 물( 15:23)’ 과 같이 미각과 관련된 의미로 사용합니다그런데 이 단어는 감정을 묘사하는 비유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이 됩니다히브리인들은 비통하고 불쾌한 체험을 미각의 관점에서 즉 쓴 맛이라는 관점에서 표현하였습니다다윗에게 모인 사람들은 사울의 불의한 통치와 정책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울 왕권에 의해 정치적경제적영적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 사울을 피하여 다윗에게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불량배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그들 중에는 많은 용사들과 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5선지자 갓’, 대상 12:1-18). 이들이 나중에는 다윗 왕국의 용사들이 되고 장군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오합지졸 같이 보이지만 나중에는 다윗 왕국을 건설하는데 일등 공신들이 됩니다.

 

이들은 숫자는 대략 400명가량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람 계수법에 따르면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전투 요원만 4백여 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는 지금 하나님께서 철저히 다윗을 광야로 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도움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시편 57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시편 142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142:1-7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4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 승승장구한 끝에 왕 위에 올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자신도 모르게 교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셔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더 이상 교만하지 않도록 미리 예방 주사를 주시기 위해 아둘람 굴의 체험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한 훈련은 심지어 예수의 생애에서도 효력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주님이신 예수님도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2:10)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방이 막혀 있습니까? 마치 아둘람 굴에 갇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십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십시오. 위는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임을 인정하며 겸손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피할 길을 내어 주실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 받는 자들, 시대의 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아량을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바닥을 경험하고 있으니 품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몰려온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동료의식이 생겼을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이 왕이 되면 이러한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을까요?

다윗이 훗날 인류 역사에 남을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고난의 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와 변호사가 되어 주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연약한 인간의 심정과 환경을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바라기는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약한 자를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모압 왕에게 부모를 부탁하는 다윗>

 

다윗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아둘람 굴은 노약자들이 생활하기 어려운 공간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3-4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모압 왕에게 자신의 부모님을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증조모 룻의 고향이 모압이었기 때문입니다( 4:13-22,  1:5-6).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보호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지금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음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자신의 생이라고 해서 자기의 힘, 노력으로 운명이 개척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셔야 무엇이 되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개입하시고 계시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있을 때 인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삶이니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오해하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철저히 하나님의 시간표, 곧 때를 따라 행하셨습니다(2:4b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다행히 모압 왕은 다윗의 일행을 위하여 별도의 공간을 내어줍니다.

3절에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라는 말이 나오는데, 미스베는 문자적으로 망대”, “요새라는 뜻입니다. 모압의 산악 지역 곳곳에서 이러한 유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산등성이에서 서로 볼 수 있도록 지어졌고, 각 요새에는 정찰대가 주둔해 연락망을 구축했습니다. 미스베가 정확하게 모압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모압 왕은 다윗의 부모와 일행을 위하여 하나의 요새’(4)를 내어 준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마 400여명의 다윗을 따르는 자들의 가족들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은 그 요새에서 일정 기간 동안 머물렀습니다.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선지자 갓이 나타나 다윗에게 유다 땅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합니다.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선지자 갓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생애 동안 함께한 선지자입니다(삼하 24:11~19). 선지자 나단과 함께 갓은 다윗의 전기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대상 29:29).

그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다윗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지금 다윗은 간절히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사울이 지배하는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순종하기 그리 쉽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갈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

헤렛은 아둘람에서 약 5km 떨어진 곳으로 수풀에 쌓여 있다고 합니다(이후 다윗은 계속 옮겨 다닙니다. 그일라로(삼상 23:1). 마온 황무지(삼상 23:24), 그 다음에는 엔게디 황무지(삼상  24:1).)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신정 왕국의 왕으로 만드시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었습니다.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래서 과감하게 사울이 통치하는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울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은 삼상 21:10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것입니다(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아기스에게로 가니.”)

 

<맺는 말씀 믿음은 순종에서부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순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비록 나에게 손해가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12:1-9).

 

그리고 하나님께서 백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실 때에도 온전히 순종했습니다(22:1-19).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직업, 가족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4:20).

 

그렇습니다. 순종은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요일2:3-5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도 다윗과 같이 순종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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